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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오세종 도금장인

부처님 눈 열고 금빛가사 입히는 장인 신심도 금빛이어라

▲ 예배대상인 부처님에게 금빛가사를 입히는 오세종 도금장인은 행복하다. 그 신심도 금빛으로 빛나서다.

‘모셔놓고 예배 올리면 해갈되려나….’

1979년 단청·도금 분야에 입문
화공·옻칠 섭렵하며 전문성 키워

생활이 신앙된 부처님 개금불사
예배 대상 성상에 심혈 기울여
최소 9번 옻칠한 뒤 금박 입혀
전통식 옷칠개금불사 보존 고집

“자네는 부처님을 빛내는 사람”
법장 스님 말씀 되새기며 불사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우전왕은 제석천 청으로 도리천에 오른 부처님이 그리웠다. 감로법문을 향한 갈증으로 마음은 메말라갔다. 매일 마른 목 치켜 올려 하늘을 우러러봤다. 볼 수 없었다. 나라 안 훌륭한 장인을 수소문했다. 법비[法雨]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마음에 물 대듯, 부처님 형상을 조성하고 싶었다.

“내 솜씨가 세상 제일이다.”

장인으로 건축, 조각 등 공장(工匠)을 맡아보는 천인 비수갈마천이 나섰다. 우전왕은 스스로 어깨에 메고 나른 향나무를 장인과 더불어 쪼갰다. 그 소리는 도리천까지 뻗쳤고, 부처님은 성상(聖像) 모신 공덕을 제석천에게 설했다.

“누구든지 나의 형상을 칠보, 놋쇠, 붉고 흰 동, 백철, 납, 주석, 철, 나무, 진흙으로 조성하거나 아교, 채색으로 장엄하기를 스스로 했거나 남을 시켜 했거나 모두 불도를 이룬다. 심지어 동자의 유희나 풀, 나무, 붓, 손톱을 갖고 불상 그린 사람도 불도를 이룬다.”

‘조상공덕경(造像功德經)’을 허투루 볼 수 없다. 불도 이루는 공덕이다. 부처님 조성하거나 장엄하는 장인이 가볍게 불사에 임할 수 없는 이유다. 오세종(56, 서인) 도금장인은 부처님을 금빛가사로 장엄하고 눈을 연다. 그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전통 옻칠개금불사 장인이다.

“부처님은 예배대상이에요. 사바세계 모든 고통을 품은 중생들이 앞에서 엎드리면 그 하소연 품어주시는 성상입니다. 일시적인 광택은 가당치 않죠. 언제 어디서든, 오래 그리고 불현듯 바라봐도 그윽하고 아픈 마음 어루만지는 빛으로 장엄해야 합니다.”

가정사가 어려웠다. 가방끈은 짧았다. 처음엔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1979년에 입문했다. 막 성년이 되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쩌면 기연(機緣)이었다. 돌이켜보면 부처님 가르침 받을 만한 선근이 있어 스승을 만나고 삼보에 귀의한 인연이었다. 지극한 서원과 숙겁의 인연이었으리라.

▲ 오세종 도금장인은 부처님을 온전히 조성하는 불사에 여념이 없다. 도금과 화공, 칠공 세 분야에 문화재수리기능 자격을 취득한 이유는 부처님은 신앙이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31호 양용호 단청장 문하에서 불교미술을 배웠다. 견습공이 된 그는 스승 따라 전국 사찰을 누비며 일했다. 부처님오신날 전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부처님오신날 전에는 새로 조성한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2달 전부터 밤과 새벽하늘 별빛을 부지기수로 봤다. 당시엔 옻이 아닌 카슈로 개금불사를 했다. 카슈는 2시간이면 말랐다. 2시간씩 불침번을 섰다. 마르면 일어나서 금을 입히고, 다시 카슈 바르고 마르면 금을 입혔다. 스승은 전국 불사현장 스케줄을 잡고 사방을 다녔다. 서울 구룡사 만불전 개금도 했다. 한국문화재기술수리협회장을 역임했던 고 박준수 선생과 의정부 약수선원에서 밤새 옻칠개금했던 적도 있다.

불사현장을 눈에 담고 가슴에 새겼다. 아쉬웠던 점을 수첩에 메모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렇게 저렇게 해 보겠다는 계획도 적었다. 남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수첩에 켜켜이 세월 쌓인 만큼 발원은 두터워졌다.

“부처님을 장엄해야겠다.”

생활은 신앙이 됐다. 이 일, 평생 업으로 삼겠다 서원할 즈음이다. 예산 수덕사 주지였던 법장 스님이 차 한 잔과 법명 내주며 젊은 도금장인에게 한 마디 일렀다.

“자네는 부처님을 빛내는 사람이야.”

개금불사에 뜻을 세웠다. 구리족 원소인 금(金)은 공기나 물에서 변하지 않는다. 빛깔 변화도 없다. 강한 산화제로도 변함없다. 부처님 옷으로 입혀드리고 싶었다. 변하지 않는 자비 같은 금으로 성상을 장엄하는 불사는 신심의 발로였다. 도금으로 1993년 문화재수리기능 자격을 취득했다. 뭔가 부족했다. 전통식 옷칠개금 하려면 옻을 알고 다뤄야 했다. 사실 금박 잘 입혀도 옻칠 잘못되면 개금은 헛수고다. 불자로서 부처님 한 분 조성하는 일에 버금하는 불사를 꿈꿨다. 도금에 이어 화공, 옷칠 분야까지 문화재수리기능을 인정받았다.

“당장 돈 몇 푼으로 먹고 살려는 게 아니에요. 보물이나 국보들 특히 성상인 부처님을 보존하려면 선대 장인이나 화승들 훌륭한 지혜로 복원해야 합니다. 오랜 풍파 견디게 한 선조들 정성에서 배워야 하죠. 현대식 공법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수백년 수천년 전 정성까지 함께 복원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 개금불사에 있어 옻칠은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옻칠개금은 생옻칠 위에 금을 입히는 불사다. 정성과 시간과 싸움이다. 옻칠 한 번에 보통 삼칠일이 걸린다. 하루는 칠하고 하루는 그늘에서 말리는 과정을 9번은 거쳐야 한다. 그래야 옻 위에 금이 올라간다. 나무에서 직접 채취한 생옻이라 단가도 높다. 1관(3.75kg)에 300만원을 넘는다. 90cm 높이 불상에 생옻 반관 정도가 들어간다고 한다.

쉽지 않았다. 자연에서 나온 재료이지만 아무나 다룰 수 없다. 게다가 옻이 타고 오르면 온몸에 물집이 잡힌다. 그때부터 피나는 가려움에 시달려야 한다. 그 역시 수없이 긁었다.

“옻은 생명이에요. 칠해놓으면 살아 움직입니다. 숙성되면 우리식 언어로 ‘핀다’고 합니다. 목조든 청동이든 옻이 잘 먹고 그 위에 금박 입힌 뒤 속에서 옻이 피기 시작하면 색이 굉장히 곱게 나오죠. 해놓으면 금방 광택 나는 카슈 도금과 비교해 은은하게 황금색이 천천히 퍼져나가는 셈입니다. 깊이 있는 색과 빛이 나고, 옻칠 해놓으면 개금 수명도 오래 갑니다. 동처럼 옻도 1mm 부식되는 데 300년이 걸립니다. 왜 전통 옻칠개금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종립 광동고 3학년 아들 녀석에게도 아비의 길을 보여줬다. 2011년 서울 삼천사 목각삼세불과 목각탱 생옻칠 개금작업을 맡자, 3000배를 했다. 딸 셋 뒤 낳은 늦둥이 아들과 함께 했다. 108배씩 했다. 아들은 4번째 108배에 들어서자 주저앉았다. 그래도 힘들어하는 아비에게 포도 한 알씩 집어주면서 아비의 3000배 회향을 끝까지 지켜봤다. 지금 아들은 세계적인 요리사가 꿈이다. 아비가 하는 일은 돈이 안 됐다. 도전해보고 싶은 일에 먼저 끌렸다. 그는 꼭 돌아오라고 했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던 적은 없었을까. 기술이 눈에 띄게 늘지도 않고 인정받기까지 세월도 많이 걸렸다. 조급해질 때마다 3000배로 다잡았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가시적인 성과가 이르게 나와야 하는 요즘 사람들이 손사래 치며 거절하는 일은 그에게 문화재 복원이자 신심의 문제였다.

그래서일까. 고집스럽다. 중금속도 만진다. 7세기에 제작된 국보 제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가 아직도 찬란한 황금빛을 내는 것은 수은도금 덕택이다. 그는 천년 가도 변치 않는 빛을 지켜내는 세계 최고 전통보존 기법을 전해야 한다는 자부심으로 수은도금을 한다. ‘감은사지 사리함’ 재현도 그래서 시작했다.

▲ 보물인 문화재 상주 남장사 목각탱도 그의 손을 거쳐 개안했다.

고집은 스님들이 그를 찾는 이유였다. 아쇼카왕 석주를 재현한 삼천사 세존진신사리불탑 상륜부를 옻칠개금했다. 상주 남장사 목각탱 생옻칠 개금도 그가 했다. 모두 신심으로 빚은 불사였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미륵장육삼존불 복원불사 중 옻칠개금도 마찬가지였다. 복원에는 고령토 275Kg, 안동삼베와 한산모시 120필, 찹쌀 80kg, 생옻 55관(206kg), 금박 620속, 금분 470속이 소요됐다. 문화재 전문가를 비롯한 연인원 1200여명이 동원된 대작불사였다. 개금불사는 그의 몫이었다. 본존 높이가 11.82m, 협시보살인 법화림보살, 대묘상보살은 8.79m에 달하는 거대한 소조불에 그의 붓질이 더해졌다. 카슈 벗겨내고 안동포로 배접한 뒤 9번 옻칠하고 금박 입혔다. 100일이 걸렸다. 수차례 옷칠하고 도금했다. 미륵장육삼존불은 그렇게 다시 세상에 나퉜다.

그는 곧 수덕사로 향한다. 대웅전(국보 제49호)에 모셔진 목조삼세불좌상(보물 1381호) 옻칠개금불사가 맡겨졌다. 100일을 예정했다. 이번엔 아예 절로 들어가 숙식하고 매일 108배하면서 불사에 임할 작정이다.

지중한 인연이다. 법장 스님이 그 뜻대로 살라며 준 법명은 ‘서인(瑞印)’이다. ‘상서로울 서(瑞)’자에 ‘도장 인(印)’자를 썼다. 그대로다. 그는 상서로움을 입히는 사람이다. 부처님 덕분이다. 그의 마음도 상서로움 입었다. 개금불사 회향하면 늘 그렇다.

부처님 향한 그리움을 금빛으로 장엄한 오세종 도금장인. 그의 신심, 금빛이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30여년 개금불사…반출 성보문화재 재현

장인 손길 닿은 작품

김제 금산사 미륵대불 개금
‘감은사지 금동사리함’ 재현


▲ 김제 금산사 미륵전 미륵장육삼존불.

오세종 도금장인은 도금과 화공, 옻칠공까지 문화재수리기능을 가진 몇 안 되는 전문가다. 그래서 30여년 동안 전국의 부처님 개금불사를 맡았다. 전통 옻칠개금방법을 고집하는 장인정신 때문이다.

그가 꼽은 개금불사 중 단연 첫 번째는 김제 금산사 미륵전 미륵장육삼존불이다. 10m가 넘는 부처님에 그의 옷칠 붓이 닿았다. 조계종 제17교구본사인 금산사는 1000년 넘게 미륵신앙 법맥을 이어온 도량이다.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에 모셔진 부처님이 미륵장육삼존불이다.

▲ 개안 전 상주 남장사 목각탱(보물 923호).

문화재 복원은 그의 자부심이다. 보물 제923호인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탱에 생옻칠을 하고 개금했다. 안동 봉정사 목조관세음좌상(보물 1620호) 역시 그의 솜씨다. 이외에도 원주 구룡사 목조삼세불, 해남 미황사 삼세불 등에 금빛가사를 입혔다.

▲ 삼천사 세존진신사리불탑.

초전법륜지 인도 사르나트에 있는 아쇼카왕 석주를 원형 그대로 접목한 삼천사 세존진신사리불탑 상륜부 옷칠개금도 그가 붓을 들었다. 상륜부에 옻칠개금으로 빛을 새겼다. 오대산 상원사 봉황보당도 그의 공방 해인당에서 작업했다. 봉황에 옻칠하고 금을 입혀 조성했다.

▲ 오대산 상원사 봉황보당.

▲ 교토고려미술관 조선왕실촛대 재현.

불자로서 해외반출 성보문화재 재현도 소홀하지 않는다. 개금불사에 바빠 미뤄뒀지만 ‘감은사지 금동사리함’을 재현 중이다. 앞서 일본 교토고려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촛대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통일신라시대 비로자나불상도 재현했다.

 

[1348호 / 2016년 6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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