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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의 성성적적과 사마타·위빠사나 선수행가 마틴 버첼러

집중의 사마타·관찰의 위빠사나 조합이 불교명상 근본

▲ 마틴 버첼러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으면 특정의 정신상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정신상태가 나타난다”며 “이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을 제거함으로써 남들을 더 알아차리게 되고 그들의 고통에 좀 더 도움을 주고 대응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명상법과 불교 전통, 즉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테라바다, 현대 위빠사나)에서 시작해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간화선)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보면 수행법이 매우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명상수행자들이 실제로 닦는 방법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두 가지 기본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초기 팔리어 전통의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초점에 되돌아오는 사마타
위빠사나는 성품·변화 관찰
방법은 다르지만 효과 동일

화두 잡으면 산만함 사라져
추상적 인지에 빠지지 않아
시간 지나면 깊은 고요 스며

고요함이 분명 도움 되지만
명상의 효과 중 하나일 뿐
알아차림 없다면 혼침 빠져
집중·관찰 균형 있게 닦아야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즉 수행 자체의 측면과 그 수행으로 얻는 효과의 측면입니다. 명상을 시작할 때는 흔히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라고 하는데, 각 전통마다 선호하는 대상은 호흡, 질문·화두, 진언 또는 관상(시각화) 등이 있습니다. 즉 집중 수행은 ‘호흡, 질문·화두, 진언 또는 관상’이라는 집중의 초점에 되풀이하여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방법과 상관없이 비교적 동일합니다. 즉 수행자는 침착하고 고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집중은 고요를 개발하기 위해 닦는 것이고, 부처님이 설명했듯이 애욕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의 측면에서 사마타를 ‘집중’이라 번역할 수 있지만 수행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고요’ 또는 ‘적정’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집중 수행(되풀이 돌아오는 것)이 다양한 전통에서 비교적 유사하다면, 위빠사나 수행법은 매우 다릅니다. 테라바다 전통에서는 호흡, 소리, 감각 등 경험의 조건이 된 성품과 변화를 관찰합니다. 반면 간화선 전통에서 위빠사나적 측면은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이 느끼는 의심의 발전에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효과는 유사합니다. 명료성과 식별력을 개발하여 무지를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측면에서 위빠사나는 ‘깊이 보기’ 또는 ‘관찰’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효과의 측면에서는 ‘통찰’이라고 번역됩니다.

이제 간화선 수행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참구합니다. 수행의 초점은 흔히 ‘이뭣고?’ 화두인데 ‘이것은 무엇인가?’로 해석됩니다. 참선을 할 때는 “이뭣고?”라는 질문에 계속 되돌아오며 집중합니다. 송담 스님은 법문에서 “이뭣고?” 질문이 땅에 박은 말뚝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말뚝에는 염소를 줄에 메어두었는데, 염소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없고 줄의 길이만큼만 주변을 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화두 수행자는 “이뭣고?”라는 닻에 돌아옴으로 인해 생각에 정신이 팔려도 그리 멀리 가진 못합니다. ‘성성적적’의 ‘적(寂)’은 고요한 집중을 의미하며 산만함과 불건전한 생각이 사라지는 명상입니다. 송담선사가 말한 닻을 내리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화두로 돌아올 때마다 세 가지 집중의 효과를 얻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쫓아가던 생각을 지속하지도 확대하지도 않습니다. 둘째, 이렇게 되돌아오면 반복되는 사고양상의 힘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 수행자는 몸·마음·환경이 합쳐진 전체적 경험으로 돌아옵니다. 소소하고 추상적인 인지작용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수행자는 좀 더 고요하고 침착해지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깊은 고요가 스며들어 ‘적적’이 되는 것입니다. 간화선을 수행할 때 수행자는 “이뭣고?”를 그저 반복하지도 관하지도 않습니다. 간화선에서 중요한 것은 화두를 깊이 참구하는 것입니다. 영문판 ‘Great Doubt, Great Enlightenment(큰 의심, 큰 깨달음)’의 설명을 보겠습니다.‘화두를 참구하는 것과 관하는 것은 다르다. 참구는 의정을 일으키는 데 반해 관하는 것은 마음을 화두에 집중하는 것이다. 화두를 깊이 의심해야만 한다. 집중만으로는 진정한 의심을 일으키기 어렵다.’

이것이 화두 수행입니다. “이뭣고?”를 질문할 때마다 온몸과 마음으로 의정을 키우려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물음표입니다. 이런 질문은 깨어있음을 요구하고, 그래야 화두 참구가 활발하고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惺)’이라 하고 깨어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송광사에서 선승으로 있던 시절(1975~1985)에 구산 스님께서는 ‘성성적적’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구산 스님은 화두 참구 중 성성과 적적을 균형 있게 개발해야 할 것을 강조했고, 이것은 부처님 말씀에 매우 가깝습니다. 두 분 다 성성과 적적의 수행이 제각기 역할과 효과가 있다며, 즉 집중은 사견이나 애욕의 제거에 도움이 되고 지혜는 무지의 제거에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간화선 수행은 집중과 관찰의 조화 속에서 해야 잘 이루어집니다. ‘큰 의심, 큰 깨달음’에는 ‘선종영가집’에서 인용한 영가현각의 말씀이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없이 깊은 고요 속에 머물면 혼침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고요가 없이 알아차림만 있으면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알아차림도 고요도 없는 상태가 있으면 생각에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혼침 속에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명상의 함정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고요함이 분명 도움이 되지만 명상의 효과 중 하나일 뿐이며, 성성한 알아차림 없이 너무 고요하기만 하면 혼침에 빠지는 것입니다. 명상을 세상과의 연결을 끊거나 무관심해지는 방법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반면 고요함이 충분치 않으면 생각이 산만해지거나 들뜨기 쉽습니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에서는 깨어있음과 적정을 함께 닦습니다. 다시 말해서 집중과 관찰을 균형되게 닦는 것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흔히 고요와 통찰로 번역되지만 집중과 지혜와도 같다고 합니다. 냐나틸로카 비구가 저술한 ‘불교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고요의 힘은 동요되지 않는 것이다.(…) 통찰의 힘은 무상·고·무아의 숙고다.’ 현대 위빠사나 전통에서는 흔히 명상을 시작할 때 호흡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명상의 자리에 앉아 호흡을 알아차리려 하면 곧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 호흡의 체험으로 명상수행자를 되풀이 돌아오게 할까요. 바로 호흡에 대한 집중인 동시에 호흡에 집중하려는 의도입니다. 되돌아올 때마다 습관적 사고양상을 증대시키지 않는 것이며 동시에 이 습관이 고착되는 힘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마음은 가구를 들어낸 방처럼 점점 넓어집니다. 그리되면 계속하여 생각이나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안정되고 고요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테라바다 방식의 명상에서는 특정한 형태의 집중을 개발합니다. 한 곳에 집중하고 닻을 내리지만 긴장하진 않습니다. 즉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대상에 주의를 두고 그것을 배의 닻처럼 사용합니다. 닻은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해주지만 그렇다 해서 배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명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는 생각, 느낌, 감각을 멈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감지하는 것은 인간의 몸과 함께 오는 기능입니다. 다만 수행자는 이것들과 좀 다른 관계를 개발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1975년 송광사에서 출가하면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1975~1985년에는 “이뭣고?”를 되풀이해 물으면서 간화선 수행만 했습니다. 두 번째 안거를 하는 동안 좌선 중 내 생각을 이전과는 다르게 알아차리게 됐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가 하는 대부분의 생각이 저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보았고, 그런 성향을 해결하려면 많은 수행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마음챙김 수행을 만난 후 그 경험을 되돌아보았을 때 저는 간화선 수행에서도 알아차림이 개발되지만 간접적인 방식으로 개발됨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간화선에도 마음챙김이나 자비수행이 있는지 묻곤 합니다. 저는 현대 위빠사나에서처럼 마음챙김이나 자비수행이 분명히 드러나진 않지만 효과는 동일하다고 말해줍니다. 부처님은 고요와 명료성이 개발되면 애욕과 무지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구산 스님은 집중과 관찰을 함께 닦으면 사견과 무지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거나 성성적적을 닦으면 특정의 정신상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정신상태가 나타남을 말해줍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을 제거함으로써 남들을 더 알아차리게 되고 그들의 고통에 좀 더 도움을 주고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중과 관찰을 ‘지혜로운 자비’나 ‘자비로운 지혜’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을 치우는 수행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또한 자비가 관찰수행에서도 나오지만 좀 더 고요하고 넓고 열린 마음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보곤 합니다. 무상을 알아차리면 삶의 일시성에 자비심을 느끼게 되고 타인이 가진 변화의 가능성에도 자비심이 우러납니다. 고통을 좀 더 알아차리면 고통이 통증과 고립을 뜻함을 깨닫고 통증을 가진 사람에게 자비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정된 자아가 없고 단지 내적 조건이 외적 조건을 만나는 흐름임을 좀 더 알아차린다면 우리와 남들의 생존을 지원하는 정교한 생명의 망에 좀 더 연결되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간화선 수행에도 수행자가 좀 더 알아차리도록 해주는 효과가 있지만 간접적으로 그렇게 된다고 믿습니다. 화두에 집중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줄어들 것입니다. 생각이 줄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좀 더 알아차릴 것입니다.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앉아서 화두를 참구하고 있었습니다. 지붕에는 거센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잡념에 빠져 있을 때 저는 비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화두를 들며 의심하는 중에는 배경으로 지붕의 빗소리를 알아차렸습니다. 화두를 들면 만물이 무상하며 특정 개인과 상관이 없음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맛지마니까야’의 구절을 소개하면서 발표를 바치겠습니다.

‘만물은 근본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주의력은 그들에게 존재를 주고, 접촉은 그들에게 시원(始原)을 주며, 느낌은 그들이 만나는 장소를 주고, 집중은 그들과의 충돌을 주고, 마음챙김은 그들을 다스리게 해주고, 이해는 그들의 최정상이며, 해탈은 그들의 핵심이다.’

정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이 내용은 동국대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와 국제선센터가 6월23일 개최한 ‘간화선 국제학술대회’에서 마틴 버첼러의 발제를 요약한 것입니다.

[1349호 / 2016년 6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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