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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확고한 진리의 틀

기자명 김정빈

모든 인류의 영원한 자산 사성제

팔만대장경에 설해져 있는 법문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시지 않았더라도 알려져 있는 법’과 ‘부처님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진 법’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팔만대장경에는 불살생, 불투도 등의 계율이 설해져 있는데, 이는 부처님만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현자들이 설한 진실, 즉 ‘부처님께서 설하시지 않았더라도 알려져 있는 법’이다. 그에 비해 오온, 십이처, 연기법, 삼십칠조도 등은 ‘부처님께서 설하시지 않았다면 중생이 알 수 없는 법’이다.

문제, 원인, 해결, 방법의
사성제는 보편적인 진리

무고집멸도의 반야심경은
‘고’ 없다면 설할 수 없어

그렇다면 고(문제)­집(원인)­멸(해결)­도(해결방법) 등 네 항목으로 짜여져 있는 사성제는 어떨까? 사성제는 그릇, 즉 틀로써의 면과 과일, 즉 내용으로서의 면으로 나눌 수 있는 부처님의 첫 번째 설법이다. 이 두 면 중 사성제의 틀은 ‘부처님께서 설하시지 않았더라도 알려져 있는 법’이며, 내용은 ‘부처님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진 법’이다.

모든 사람은 원인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 원인 없이는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성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 원인­결과의 이치를 바탕삼아 문제, 원인, 해결, 해결방법이라는 틀에 맞추어 설해진 법문이며, 따라서 사성제의 틀은 ‘부처님께서 설하시지 않았더라도 알려져 있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부처님을 제외한 인류의 다른 현자들은 부처님처럼 사성제의 틀을 명확히 보지 못했고, 그 때문에 자신들의 사상을 이 틀에 맞추어 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첫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인데, 사성제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씀 중 “회개하라”는 도성제에 해당되고 “천국”은 멸성제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이 첫 말씀만으로는 천국 아닌 지상이 어떤 상황이 어떤지(고성제)와 그 상황이 왜 생겨났는지(집성제)를 알 수 없다.

그 때문에 그 부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보완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보완된 결과 기독교 교리는 고성제(문제): 인간은 땀 흘리고 출산하는 고통에 처해 있다, 집성제(원인): 그 원인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신의 뜻을 거스른 데 있다, 멸성제(해결): 인간은 구원되어 천국을 가야 한다, 도성제(방법): 예수의 대속희생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로 정리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성제라는 틀이 모든 지식인들에게 잘 호소되는 보편성과 영원성을 가진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성제가 담는 내용물로서의 교리에 대해서는 불교와 기독교(및 다른 가르침)가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사성제의 틀 자체에 대해서라면 이 법문은 불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영원한 자산이라는 의미이다.

사성제의 틀 안에 넣으면 어떤 종교 교리든 쉽게 설명되고 이해된다는 점은 대승불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도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한국 불교는 사성제의 틀을 이용해 교리를 선포하지 않는다. 이용하기는 커녕 사성제 법문을 ‘소승’이라며 폄하하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반야심경’이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반야심경’에는 ‘무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부정하는 구절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반야심경’은 사성제의 틀 안에서 설해진 법문이다.

‘반야심경’에는 ‘모든 고통을 건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반야심경’의 고성제(모든 고통)와 멸성제(건넜다)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추론의 방법을 통해 우리는 ‘반야심경’의 집성제가 ‘뒤바뀐 꿈같은 생각’이라는 것과 도성제가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는 것’임도 알 수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사성제는 작게는 눈 깜박임부터 크게는 인생 전체를 구원하는 데 이르기까지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틀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반야심경’을 비롯한 모든 대승경전들을 사성제의 틀 안에 넣어 새로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경전이 설하는 내용은 지혜로운 사람에게 단 십 분이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불교를 널리 홍포하는 데 매우 유용하리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49호 / 2016년 6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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