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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름꽃의 운명

기자명 김용규

여름꽃의 화려함은 결실 맺기 위한 치열한 노력

이곳 ‘여우숲’에는 지금 반딧불이 불빛들이 밤 숲의 허공에 아주 긴 시를 쓰고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귀해진, 그러나 이곳에서는 벌써 한 달이 넘도록 밤 숲을 채우는 풍경입니다. 소쩍새 노랫소리 밤새 일어서고 또 흩어진 지도 오래입니다. 한편 낮 동안의 숲은 매미들의 합창으로 소란하고 숲의 먼 자리에서는 ‘부우욱 구우욱-’ 멧비둘기 노래 얌전하게 들려오거나 이따금 ‘꿩- 꿩’ 꿩의 노래 단말마처럼 들려옵니다. 집 근처 휴경지에는 개망초들이 그 하얀꽃을 피우고 뒤덮어 저기가 혹시 메밀꽃밭이 아닌가 생각하게도 하는 풍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양(陽)의 극점인 하지가 지나자 그렇게 숲에는 바야흐로 진한 여름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색은 더욱 짙어져 담록(淡綠)은 이미 암록(暗綠)의 지경에 이르렀고 소리 역시 더없이 다양하고 풍요로워져 어지럽기까지 한 때입니다. 향기 또한 지극하고 그득하니 숲에 머문다는 것과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호사인 시절이 지금 빚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그윽한 향기들을 일으키고 뒤섞고 있는 주체인 꽃들은 무디어진 인간의 눈에는 좀체 뜨이질 않습니다. 하긴 이미 저렇게 짙어진 암록의 숲에서 미약한 생명이 제 조그마한 꽃들을 피워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싶습니다. 그 어려움을 나는 여름꽃들의 운명이라 부릅니다.

생명은 모두 일음일양의 길(一陰一陽之道) 위에 놓여 있는 법, 밝음을 구하면 그 밝음이 만드는 어둠을 끌고 가야만 합니다. 봄꽃들의 밝음은 피기만 하면 저 자신을 드러내기가 가장 수월하다는 것이지만, 어두운 운명은 밤이면 영하로 떨어지는 늦추위와 아직 나는 벌레가 거의 없는 매개자의 곤궁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여름을 추구하는 꽃들이 누리는 빛은 안전함으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잦은 비 있으니 물이 풍부하고, 연중에서 해가 가장 긴 시절을 누릴 수 있으며 동시에 온도 역시 가장 높아 쑥쑥 자라기에 생장의 조건상 부족함이 없습니다. 또한 허공을 오가는 곤충들 역시 밤낮으로 가장 그득할 때이니 매개자의 빈곤을 염려할 까닭이 없습니다. 반면 저 짙어진 암록의 숲에서 제 꽃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들이 감당하고 극복해야 할 어둠의 운명인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또한 제 어둠과 그 한계를 넘어설 힘도 다 가지고 오는 법, 여름 꽃들은 저마다의 방편으로 암록의 치열함을 넘어섭니다. 먼저 색(色)으로 승부를 걸어 자신의 결실을 맺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저 묵정밭을 채우고 있는 개망초들의 흰색이나 이팝나무 토해내는 흰 빛깔은 어떤 표백제로도 흉내를 내기 어렵습니다. 나리꽃 붉은빛이나 큰 원추리 노란빛깔, 하늘말나리의 오렌지 빛깔, 자귀나무 그 화려한 분홍색은 일단 피워 내기만 하면 나비나 벌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습니다. 색이 딸리는 녀석들은 향(香)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니 지금 한창인 밤나무 꽃과 얼마 전 참 좋았던 아카시나무 꽃, 낮은 풀섶의 꿀풀들이 빚는 향 따위가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제 꽃 모양이 너무 작거나 볼품없는 녀석들은 그 미미한 꽃에 가짜로라도 커 보이게 하는 헛꽃을 달아 제 모양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좁쌀보다 작은 꽃을 촘촘히 피우는 산수국 나무의 꽃이나 백당나무의 꽃은 그 작은 꽃들의 가장자리에 진짜 꽃의 수십 배 크기에 달하는 하얀색 헛꽃을 만들어 벌들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녹음 속에서 연두색 꽃을 피우는 산딸나무 역시 그 특색 없는 색깔을 이겨낼 순백의 잎사귀를 마치 진짜 꽃처럼 변형시켜서 연두색 꽃을 떠받치면서 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향기도 볼품도 미약한 어떤 꽃들은 치열한 시간을 회피해서 피어남으로써 제 어두운 운명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이제 장마가 지나가며 피어날 달개비꽃(닭의 장풀)과 달맞이꽃은 그 미미한 향기와 볼품없는 모양새를 어쩌지 못해 한낮의 개화를 회피합니다. 달개비는 대부분의 꽃이 만개하는 한낮을 회피하고 새벽과 아침 시간을 택해 피어 이른 곤충을 부릅니다. 한편 달맞이꽃은 달이 떠오르는 시간, 저녁을 택해 늦게 움직이는 나방류의 곤충을 독차지합니다.

여름꽃의 운명에 오직 안전하고 찬란함의 빛만 거하지 않듯, 모든 삶의 나날이 그렇게 빛과 그림자의 구조로 형성되고 흐르고 있음을 나는 이 여름 숲에서 재차 각성하고 있습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49호 / 2016년 6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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