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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수라(阿修羅)

힌두 신화 속에서 우주적 질서 해치는 존재…불교에선 팔부중

▲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프람바난 시바 사원의 라마야나 조각 패널 중 시타를 납치하는 아수라 라바나.

불탑에 주로 조성되는 신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존재가 있다. 세 개의 얼굴에 팔은 여섯이나 여덟 개를 하고 각 손에는 해와 달 또는 염주나 칼, ㄱ자 형태의 측량도구인 구(矩)를 들고 있기도 하다. 이 특이한 형상 때문에 주로 탑의 상층기단에 새겨지는 팔부중(八部衆) 가운데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가장 수월하다. 이 신이 아수라다.

세 개의 얼굴에 6∼8개의 팔
각 손에는 해·달·염주·칼을 든
형상으로 탑 상층기단 새겨져

경전에서는 인드라의 선행과
아수라 비행 대조한 예 다수
비구들에게 선행을 독려하고
아수라 게으름·폭력성 드러내

불교의 우주론적 체계 속에서
윤회 설명하는 독립세계 구분

불교 속에 그려지는 아수라(Asura)는 비교적 익숙한 신 가운데 하나다. 난장판이 된 어떤 현장을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 단어는 현대까지 살아남았다. 이 신의 존재가 신화 속에서 보여주는 상투화된 혼돈과 폭력의 상황을 빗대어 한 말이다.

그러나 아수라라는 말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의 의미도 애매하기 그지없다. 아수라(또는 아후라 ahura)라는 단어는 ‘아베스타’와 ‘리그베다’에 각각 등장하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이 단어가 신성한 신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후자에서는 때로 배제되어야할 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수라(sura)’는 ‘신’ 또는 ‘선함’을 뜻하며, ‘아수라(asura)’는 신이 아닌 존재를 의미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전통과 초기 힌두교 전통 속에서 아수라와 데바(Deva)를 서로 상반되는 신적 존재로 규정한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아수라(아후라)가 선량하고 고귀한 신적 존재를 가리킨다면 데바는 거부해야할 존재다. 아수라-데바의 대립적 해석은 힌두교에서 역전되어 나타난다. 데바는 선신이며 아수라는 거부하거나 제거해야할 악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초기의 베다 신화에서 데바와 아수라가 그다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게다가 ‘아수라’ 라는 단어는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명사로 쓰이기도 하지만 ‘힘센’ ‘강력한’ 등의 형용사로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인드라와 아그니, 또는 바루나 같은 데바들도 아수라로 불렸다. 이러한 명칭은 훨씬 후대에 이르러 점차 서로 분명한 집단적 구분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힌두 신화 속에서 데바와 아수라의 전투는 매우 정형화되며, 거의 대부분의 전투 속에서 아수라는 최종적인 패자가 된다. 이들의 전투에는 최고의 신들이 종종 개입해 결국에는 아수라를 우주적 질서를 해치는 존재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한다.

다만, 데바와 아수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집단의 역할과 의미가 완전히 구분되거나 어떤 한쪽이 도덕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로는 데바가, 때로는 아수라가 천상을 차지하거나 우주를 지배한다. 이들의 지배는 영속적이지 않다. 대체로 아수라가 우주에 대한 패권을 차지할 때 세계는 혼란스럽다고 묘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데바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마치 번영과 쇠퇴를 거듭하는 우주의 역동적인 모습을 데바와 아수라의 반복적인 전투 속에서 그려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데바와 아수라의 끊임없는 전투들 속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흔히 악신으로 간주되는 아수라들도 수행이나 고행을 한다는 점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고결한 심성의 수양을 수반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대 인도 대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고행이나 수행이라는 것은 어떤 초인간적인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수행은 데바나 아수라 모두가 자신들의 힘을 증강시킬 필요에 따라 이행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데바와 아수라들의 경쟁관계가 초기 ‘우파니샤드’ 문헌부터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찬도갸(Cha-ndogya) 우파니샤드’에는 아수라 비로차나(Virocana)와 데바의 대표자 인드라가 서로 창조주 프라자파티를 찾아가 자아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 질문하는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 참다운 자아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프라자파티는 진정한 자아는 육체로 이루어진 자아라고 답한다. 아수라 비로차나는 그 대답을 듣고 만족한다. 반면 인드라를 비롯한 데바들은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거듭 질문을 계속하여 참다운 자아를 추구한다. 이러한 진리의 탐구에 대한 데바와 아수라의 태도는 마치 ‘우유의 바다 휘젓기’ 신화에 나타나는 것처럼 불사(不死)를 추구하는 두 존재를 보여주는 듯하다.

▲ 캄보디아 씨엠립 앙코르와트 1층 회랑. 우유의 바다 휘젓기 가운데 아수라상.

이와 같이 데바와 아수라를 통해 그려지는 신화적 사건은 인간의 이중성에 관한 비유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심성 가운데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 선량함과 부정함, 절제와 탐닉,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 심성의 양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두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 가운데 아수라는 부정적인 단면들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수라가 갖는 이러한 상징성보다, 폭력적이고 호전적이며 퇴치해야할 존재로 신화를 통해 기억하고 있다.

이같이 퇴행적이고 파괴적인 아수라의 존재가 인간성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면, 역시 불교에서도 이러한 아수라의 모습은 적극적으로 극복되어야할 존재로 해석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우파니샤드’에 나타나는 아수라 비로차나와 인드라(제석천) 사이의 진리를 추구하는 경쟁의 모티프는 불경 속에도 그대로 차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잡아함경’ 제40권에 ‘바치경(婆稚經)’이 있는데 이 바치는 ‘우파니샤드’에 등장했던 아수라 비로차나를 말한다. 여기서 아수라 비로차나와 인드라는 각각 부처님 앞에서 자신의 이익을 다 추구하고 난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게송으로 읊는다. ‘우파니샤드’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인욕(忍辱)을 강조하는 제석의 게송을 찬탄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잡아함경’에는 인드라의 선행과 아수라의 비행(卑行)을 대조하는 예들을 다수 제시하고 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구들에게 선행을 독려하는 한편, 아수라들의 게으름과 거만함, 폭력성 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불교의 윤회론적 체계 또는 우주론적 체계 속에서 아수라의 집단은 불교의 윤회를 설명하는 하나의 독립적인 개별 세계로 구분된다. 불교는 데바와 아수라 모두를 욕계(欲界)속에 포함시키며, 이 속에 천신(데바)들과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 등을 포함시킨다. 6도 윤회란 이것을 말한다. 이 세계들을 욕계라 부르는 것은 육체를 가지면서 동시에 욕망을 소유한 존재가 거주할 공간이기 때문이다. 공간적 위계상 아수라는 지상보다 높은 천상에 위치하지만 천신들의 세계보다는 다소 낮은 위치를 차지한다. 이 여섯 개의 세계는 중생들이 육도(六道)윤회의 과정을 통해서 과거 자신의 업보에 의해 들어가게 되는데, 그 중 하나의 세계가 바로 아수라 계(界)이다.

불교 내에서 아수라의 형상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는 다소 불확실하다.

불경 내에서 개별적인 아수라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지는 않지만, 힌두 맥락에서 아수라는 각각의 아수라들이 매우 구체성을 띠고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시타(Sita)를 납치한 아수라 라바나(Ravana)는 열 개의 머리와 스무 개의 팔을 특징으로 하며, 아수라 라후(Rahu)는 해와 달을 들고 있는 두 팔과 큰 두상을 특징으로 한다. 아수라 마히샤(Mahis·a)는 물소 형상과 일정한 연관성을 갖는다.

아수라가 불교에 흡수되어 동아시아로 전파되면서 어떤 아수라의 특징을 선택해 조상(造像)에 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중국과 일본 또는 한국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해와 달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다수의 팔과 얼굴을 갖는다는 점이다. 물론 몇몇 사례는 제외하고라도, 이러한 특징은 아수라가 도상화 되는 과정에서 아수라를 표현하는 특징을 동아시아인들이 공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서산 보원사지 5층 석탑의 아수라상.

윈강(雲岡)석굴은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일찍 조성된 아수라 상을 보여줄 것이다. 다면다비(多面多臂)에 해와 달을 들거나 일부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의 불탑 기단에 새겨진 아수라상이 좌상(坐像)인 것을 고려하면 거의 차이가 없다. 해와 초승달을 위쪽으로 들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데 한국의 경우는 해와 달을 거의 원형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아수라의 특징은 일견 아수라 라후(Rahu)를 연상시킨다. 신화에 따르면 해와 달은 라후가 불사의 감로수를 마시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 앙갚음으로 라후는 주기적으로 해와 달을 삼키게 되는데, 이러한 아수라 라후의 특징이 동아시아 아수라상의 형상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팔과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도 아수라 라바나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많은 팔과 머리는 인도전통에서 신적 권위를 상징하는 일반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이를 반드시 라바나의 영향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이 초기의 자유로운 아수라의 형상을 보여준다면, 한국은 비교적 고정되고 정태적인 모습이지만 아수라의 다양한 지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은 8세기경 나라(奈良) 고후쿠지(興福寺)에 조성된 아수라상과 같이, 정교한 아수라의 표정을 담아내고 있다.

심재관 상지대 교양과 외래교수 phaidrus@empas.com

 

[1349호 / 2016년 6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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