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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제9 편관일체색신관(遍觀一切色身觀)

아미타불에서 나오는 광명이 우리를 어둠 속에서 구원해

오늘 공부할 ‘관경’의 말씀에서는 아미타불의 빛, 아미타불의 광명에 대하여 정면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오키 신몬(靑木新門)이라는 일본의 작가가 떠올랐습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굿,바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영화가 있습니다.

여덟 번째 관상 이뤄진 뒤
무량수불의 광명 관찰해야
밖으로 부처님 생각함으로써
안으로 마음의 눈 밝아져

우리로 말하면 시신에 염(殮)을 해주는 직인(職人)을 일본에서는 ‘납관부(納棺夫)’라고 합니다. 아오키는 실제로 납관부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글을 썼고, 그것을 원전으로 해서 만든 영화가 ‘굿,바이’입니다. 그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영화를 먼저 봤고, 나중에 그 원전인 ‘납관부일기’를 구해 보았습니다. 이 책은 같은 제목에, 조양욱 옮김으로 문학세계사(2009)에서 번역되었습니다.

‘납관부일기’ 책에 보면, 아오키는 왜 신란(親鸞) 스님은 ‘교행신증(敎行信證)’ 1권에서 “진실한 가르침을 드러내는 데는 대무량수경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교행신증’은 정토의 경론을 발췌하여 6권으로 만든 책인데, 제1권은 왜 정토신앙을 할 때는 ‘무량수경’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밝힌 부분입니다. 이 의문에 대해서 아오키는 수많은 ‘교행신증’ 강의서를 찾아보았지만, 뚜렷한 대답이 없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그가 찾아낸 답은, 신란 스님이 ‘무량수경’을 정토신앙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라고 말한 것은 부처님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라 말하였습니다. 실제로, ‘교행신증’ 제1권에 보면, 부처님 얼굴에 빛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문을 모아놓고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부처님 얼굴을 ‘광안(光顔)’이라 하였습니다. 바로 그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을 ‘관경’에서 찾아보면,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할 대목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희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여덟 번째) 관상이 이루어지고 나면 다음으로 마땅히 무량수불의 몸과 (몸에서 나는) 광명을 관찰해야 한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라. 무량수불의 몸은 백천만억이나 되는 야마천(夜摩天)의 염부단금의 색과 같다. 부처님의 키는 육십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다. 미간에 난 하얀 털은 오른쪽으로 감겨 있는데 (그 크기가) 다섯 수미산과 같다. 부처님의 눈은 청정한데 마치 네 가지 큰 바다가 청백(淸白)하여 분명하게 (잘 비치는 것과 같다. 무량수불의) 몸의 모든 모공(毛孔)에서 광명이 나오는데, 마치 수미산과 같다.

저 부처님의 원광은 백억의 삼천대천세계로 (뻗어 가는데), 원광 중에는 백만억 나유타 항하사만큼의 화불(化佛)이 있다. 그 하나하나의 화불을 다시 한없이 무수한 화보살(化菩薩)이 시자(侍者)가 되어 (화불을 모시고 있다.)”

원광에서 나는 빛들 속에 바로 화불들이 존재합니다. 빛이 곧 부처님이기에, 빛으로 이루어지는 화불 역시 무량하고, 화보살 역시 무량합니다.

“무량수불은 팔만사천의 큰 특징(相)이 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특징 중에 또한 팔만사천가지의 미세한 특징(隨形好)이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미세한 특징에는 다시 팔만사천 갈래의 광명이 나오고, 그 하나하나의 광명은 시방세계에서 (무량수불을) 염불하는 중생들을 거두어 주시고 버리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우리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중생들을 거두어주시는 것은 바로 아미타불로부터 나오는 빛입니다. 광명입니다. 그분으로부터 발해지는 광명이 우리를 어둠 속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렇게 (무량수불에게서 나오는) 빛과 상호와 화불에 대해서는 다 설할 수 없다. 다만 (그 모습을) 기억하고 생각함으로써 마음의 눈을 밝히게 할 뿐이다.” 밖으로 부처님을 생각함으로써, 안으로 염불하는 자의 마음(心眼)을 밝히자는 것입니다. ‘관경’에서 관상염불을 통해서 의도하는 바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무량수불의 빛과 상호와 화불)을 보는 자는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을 다 뵈올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을 다 뵙기 때문에 염불삼매라 이름한다.” 이 문맥에서 보면, 관상이 곧 염불이고, 염불이 곧 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49호 / 2016년 6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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