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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예화와 불교문학 ④

근기에 따라 그림으로 가르침을 베풀다
언어 밖 의미를 되새긴 심우도
영상시대에 부응하는 설법방법

심우도(尋牛圖)는 법당 외벽에 벽화로 많이 그려져 있다.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선화(禪畵)이다. 열 장면으로 구성돼 십우도(十牛圖)라고도 부른다.

곽암선사는 십우도송 서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중생의 근기를 살펴 병에 응하여 처방을 베풀 듯, 소를 기르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었다. 처음에는 점점 희어지는 것으로 역량이 아직 충분치 못함을 드러내고, 다음에 순수하고 참됨에 이르러서는 근기가 점차 익어감을 표현했다. 나아가 ‘사람과 소를 보지 못함’에 이르러서는 마음과 법이 모두 없음을 나타냈다. …열 편의 아름다운 게송은 서로 빛을 비추어 주고 있다. 처음 소를 잃어버린 곳에서부터 마지막 근원으로 돌아감에 이르기까지, 여러 근기에 잘 대응하는 것이 마치 굶주리고 목마른 자를 구원하는 것과 같다.”

심우도는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언어 밖의 의미를 되새겨(敎外別傳), 사람 마음의 실상을 찾아(直指人心), 바로 부처가 되는 것(見性成佛)을 이상과 원리로 설명한다. 그러나 아니러니 하게도 언어예술인 시를 통해 스토리텔링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더 대중화 되고 상상의 나래로 펴며 선(禪)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영상시대를 맞아 이러한 스토리텔링 방식은 매우 흥미롭고 즐거운 설법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은 어떤 사물로 말미암은 전이된 감정이 동적으로 발생하는 흐름에 주목해 성찰에 이르게 한다. 인간의 감정은 특정 매개물에 따라 끊임없이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을 반복하며 움직인다. 스피노자는 이를 ‘감응’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존재에 대한 운동론을 설명하면서 신에서 출발한 정신과 감응은 기쁨과 슬픔, 사랑, 지성, 자유 등의 문제로 이행한다고 했다. 인간의 감응은 숲이나 들판, 산, 색깔, 소리, 이미지 등이 신체적 정신적 관계와 연관될 때 아늑함이나 그리움, 두려움, 공포 등을 지각해 언어화 또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감응은 공감과 동일성, 공동체 연대로 이어진다.

문학은 상상력을 통해 감정의 문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자연을 배경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심우도는 매우 매력적이고 효과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심우도를 그려보면서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 깨닫는 프로그램 개발, 심우도를 자작시로 짓고 읊조리면서 차근차근 수행 단계를 밟아가는 프로그램 활용 등은 부처님 말씀을 재현하고 지혜를 쌓아가는 또 다른 여정이다. 공감의 생성장치인 문학은 감응이 절정에 이를 때 몰입하고 감동한다. 심우도는 그런 감동의 질료이고 원천이며 보물창고임이 분명하다.

독립영화감독 백학기 시인은 절필선언 후 시나리오 창작을 위해 고향 암자를 자주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심우도에 심취해 6개월 동안 심우도 연작시를 완성했다. 지난해 문단데뷔 35년, 첫 시집을 낸 지 30년 만에 시선집을 묶어 내면서 그토록 안 쓰겠다던 시 10편을 추가해 북 콘서트를 열었다. 연작시 ‘흰소’는 삶의 존재론적 상황을 심우도에 비유한 것. ‘흰소 9’는 심우도 9번째 그림에 대한 스토리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참된 지혜를 뜻하는 반본환원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압축했다.

“산은 산이다// 백년여관도 보였다/ 시냇가에 심은 교회도 보였고/ 고려수산도 지척이다// 가까이/ 호남탕 굴뚝도 보였다// 인근 초등학교 교정에서/ 뛰노는 아이들 소리가/ 삼천대천세계를 울린다// 한때는 처녀였고/ 한때는 어머니였던/ 연지암 비구니 스님이/ 절 마당에 물을 뿌리고 있다// 물은 물이다.” 백 시인은 “결국 종교란 우리 삶이 궁극적인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길잡이다”고 말했다.

불교시는 기호를 통해 삶 속의 억압을 분출하고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열린 불교정신의 연장선에 있다. 진정한 감응이란, 자신이 믿는 종교 공간에서 창작할 때 감정이 고조되거나 확대돼 심리적 변화를 일으킨다. 억압된 감정이 무의식 속에서 회복되거나 정서적 순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서 불교시는 숭고함, 에너지, 깨달음의 순간들을 은유하고 분출하는 ‘언어의 사원’이다. 본디 시(詩)라는 문자 역시 언(言)과 사(寺)의 조합이니, 부처님과 동행은 그렇게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박상건 동국대 겸임교수 pass386@hanmail.net
 

[1349호 / 2016년 6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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