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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만수산 무진암-무량사-성주사지

무염선사, 고독한 두 천재 고운·매월을 품다

▲ 이른 아침의 햇살 도량에 드니 부여 무량사의 무성한 느티나무 잎 사이로 석등, 오층석탑, 극락전 3개의 보물이 금빛을 발한다.

만수산(萬壽山) 무량사(無量寺)!

한없음을 담은 산이요 무한을 안은 절이다. 그 무엇을 품고 있기에 셀 수도 없단 말인가? 중국 수(隋)나라의 길장 스님은 ‘묘법연화경’을 삼론종 입장서 풀어 쓴 ‘법화의소(法華義疏)’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기쁨, 사랑과 증오의 분별로는 잴 수 없으므로 무량이요, 과거, 현재, 미래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무량이다.”

무진암엔 김시습 부도탑 섰고
무량사엔 그의 자화상 안치돼

마조 제자 보철에게 인가 받은
무염 스님 별칭은 ‘동방대보살’
귀국 후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
성주산문 열어 40년 교화 매진
행적은 최치원이 쓴 비문에 남아

저 웅대한 중층 전각 극락전에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한 삼존불 모셔져 있다. 그렇다면 이 도량에 깃든 무한무량이란 아미타부처님의 지혜광명일 터. 이 자리가 극락이다! 자비심 가득한 이타행(利他行) 실천하는 사람만이 갈 수 있다는 그 ‘극락’이 이른 아침 내려진  햇살 사이로 펼쳐져 있음이다.

김시습이 올랐을 만수산 정상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세조의 ‘왕위찬탈’ 사건이 발생하자 보던 책 덮고는 시 한 수 지어가며 한 평생 떠돌던 그가 30여년의 방랑 끝에 선택한 곳이 무량사였다. 그는 어디에 머물든 세속을 초월한 선승처럼 서 있고 싶어 했다.

▲ 매월당 김시습은 무량사를 찾아 열반에 들었다.

“소나무 숲 우거진 도량/ 내가 찾아가 선방문 두드렸다/ 노승이 선정에 들자 흰 구름이 둘러쳐 주고/ 들판의 학이 옮겨간 곳엔 맑은 운치 펼쳐져 있다/ 새벽 해 밝아오니 전각은 금빛을 내고/ 차 연기 퍼지니 웅크렸던 용 날아가는 듯/ 맑고 한가로운 경치 찾아 노니니/ 영광과 욕됨 둘 다 잊었노라.”(시 ‘장안사’ 전문)
그러나 고향 떠난 나그네가 안고 가야 할 숙명인 고독을 내려놓지는 못했다. 적어도 20대까지는!

“…내일 아침 명산 향해 길 떠나/ 또 다시 달과 바람 든 곳 찾아 가지만/ 멋지고 아름답다 해도 내 고향 아니니/ 그저 찻잎을 다리노라.”(‘장경문 밖으로 나가 차를 다리며’ 일부)

소설이라도 써야 했을까? 31살의 김시습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으로 들어가 금오산실(金鰲山室) 짓고 칩거했다. 이 때 사용한 호가 ‘매월당(梅月堂)’.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가 그 산에서 빚어졌다.

▲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은 백제와 신라의 탑 양식이 혼재돼 있다.

“도(道)는 물을수록 굳어 버리나 심(心)은 살필수록 연마돼 간다”며 선심(禪心)을 펼쳤던 그를 두고 사람들은 ‘행동은 선비인데, 자취는 승려(행유적불 行儒迹佛)요, 마음은 선비인데 행적은 승려(심유적불 心儒跡佛)’라 했다. 조선의 이이는 왕명으로 지은 ‘김시습전’에서 ‘100대의 스승’이라 전했다. 그는 저 절에서 생을 마감했고, 그의 선기를 간파했던 산사는 그의 육신을 다비했다. 그의 부도탑 저 무진암 앞 부도전에 서 있고, 그의 자화상은 무량사에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김시습은 지금의 저 극락전을 마주 하지는 못 했다. 극락전은 김시습 사후 130여년 후에나 조성됐다.

만수산 정상을 지나 전망대에 이르렀다. 성인들이 머문다는 성주산(聖住山)에 오르려면 비로봉으로 걸음 해야 한다. 6월 햇살 치고는 뜨겁다. 산 정상에 서 있는데도 30도의 폭염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후일을 도모할 일이다. 시원한 계곡 소리 들으며 하산하고 싶다면 심연동 길로 들어서야 하지만 사람 발길 잘 안 닿는 심원동 길을 택했다.

일설에 의하면 저 무량사(無量寺)에 무량(無量)이란 스님이 머무른 적 있다고 하는데 통일신라 때 활약했던 무염(無染) 스님을 두고 한 말이다.

성주산 아래에 오합사(烏合寺)가 있었다. 백제 28대 왕 법왕이 태자시절(598∼599 추정) 전쟁서 죽음에 이른 원혼들이 불계에 오르기를 바라며 세운 사찰이다. 어느 날, 불길한 징조가 들었다.

“적색마(赤色馬)가 북악의 오합사에 들어 와 울면서 불사(佛寺)를 수일 동안 돌다가 죽었다.”(삼국사기) “백제의 오회사(오합사라고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주야로 여섯 시간이나 절을 돌아 다녔다.”(삼국유사)

▲ 석탑 옆 비각에 최치원이 쓴 무염 스님의 비문이 서 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쓰러진 건 660년. 백제의 흥망이 갈릴 중대 시기가 도래했음을 적마는 전하려 했던 것일까? 오합사는 불탔고 사명도 성주사(聖住寺)로 바뀌었다.

신라 태종무열왕의 8대손. 9살 때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는 호를 받은 인물. 12살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출가한 후 821년 당나라 성남산 지상사(至上寺)서 화엄을 공부했으나 선종으로 돌아 선 무염은 불광사(佛光寺)를 찾아가 마조도일의 제자 여만(如滿)선사와 법거량을 나눴다. 불광여만의 평이 일품이다.

“내가 많은 사람 만나보았지만 이러한 젊은이를 본 적 없다. 훗날 중국이 선풍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신라로 가서 선법을 들어야 할 것이다.”

▲ 성주사지 3층석탑엔 모두 ‘자물쇠’로 보이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마조도일의 또 다른 제자 마곡보철(麻谷寶徹)로부터 인가 받은 무염은 중국 전역을 다니며 병고와 가난에 힘겨운 사람들을 보살폈다. 중국 사람들은 무염 스님을 일러 ‘동방 대보살’이라 칭했다.

847년 중국서 귀국하자 신라 왕자 김흔이 무염 스님에게 성주사(聖住寺)에 머물기를 청했다. 성주사를 구산선문의 하나로 삼으며 성주산문을 연 스님은 40년을 교화에 매진했다. 평소에도 물을 긷고 나무를 했던 선사. 경문왕이 사신을 보내 궁중으로 모시고자 하니 “나를 아는 사람은 성주(聖住)를 무주(無住)라 하고, 나를 모르는 사람은 무염(無染)을 유염(有染)이라 한다”고 일갈하며 물리쳤던 선지식.

뜬 해는 져야만 하는 법. 무염 스님은  888년 열반에 들었다. 스님의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保光). 석탑 뒤 비각에 서 있는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는 무염 스님을 이렇게 새기고 있었다.
“찾아오는 이로 하여금 지혜로 눈을 뜨게 하고, 법열로 배를 채워줌으로써 뜻을 정하지 못한 무리들을 깨우쳐주고, 무지한 습속을 변화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 무염 스님의 선기가 깃든 성주사지엔 1개의 국보와 3개의 보물 석탑이 서 있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봤던 것일까? 무염 스님의 행적 5000여 자가 새겨진 저 비문은 12살 때 중국에 들어가 18살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던 고운(孤雲) 최치원이 30대 초반에 썼다.(890년 전후 추정)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로 손꼽힌다.

3살 때부터 한시를 짓기 시작하며 신동으로 불렸던 김시습. 그도 역시 만수산을 넘어 신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천재 무염, 고운의 숨결이 배인 산사를 찾아 저 탑과 비문을 마주했을 것이다. 세 천재가 나눈 대화가 궁금하다면 성주사지로 가 보시라.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만수산 무량사 앞 주차장. 무진암은 주차장 도착 전 왼쪽에 있다. 무량사 일주문을 지나 작은 계곡을 지나면 바로 만수산 등산길이 보인다. (도솔암과 태조암을 거쳐 비로봉에 오른 후 전망대로 갈 수도 있다.) 만수산 정상 표지석에서 전망대(500m)로 들어서야만 한다. 전망대서 내려와 갈림길에 닿으면 심원동 주차장과 심연동으로 가는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심연동 하산길을 추천한다. 심연동서 성주사지까지의 약 2Km 구간은 찻길이다. 버스를 이용해 성주사서 무량사로 원점 회귀할 수 있다.


이것만은 꼭!

 
무량사 극락전: 조선 중기 건축의 장중한 맛을 잘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처럼 중층불전으로 건축됐다. 보물 제356호. 극락전에는 1627년에 그린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

 

 

 

 


 
극락전 소조아미타삼존불: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안치했다. 17세기 전반기 유행한 대형 소조불상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2008년 보물 제1565호로 지정됐다.

 

 


 
무진암: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탑과 시비를 품고 있다. 1495년 건립된 김시습의 부도는 신라와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했다고 한다. 도량에 들기 직전 오른편에 있다.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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