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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한국 왔지만 결핵으로 또다시 사투

  • 상생
  • 입력 2016.07.04 15:44
  • 수정 2016.07.04 16:57
  • 댓글 0

조계사·화계사·법보신문 이주민돕기 공동캠페인

▲ 새터민 서모씨가 작게는 자신의 건강을, 크게는 조국 통일을 발원하며 서울 조계사에서 향을 사르고 있다.

새터민 서모씨에게는 꿈도, 희망도 없이 모든 정신과 힘을 오직 먹는 것에 전념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수년 동안 쌀 한 톨 제대로 먹어보질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발길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먹을 것을 찾아 헤집고 다녔다.

새터민 대학생 28세 서모씨
배고픔 지쳐 중국으로 탈북
공안 피해 온갖 고난 겪으며
한국 와 악착같이 살았지만
임파선 결핵 발병해 고통

중국에 가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13살에 두만강을 건넜다. 굶어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였다. 중국에서 8년, 도망자 신분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느 날 어머니는 한국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다며 아들을 설득했다. 한 번 더 목숨을 걸기로 했다. 2010년, 메콩강을 건너 태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길지 않지만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은 서씨에게 많은 깨달음과 교훈을 줬고 삶에 가장 중요한 방향을 찾게 해줬다.

서씨는 한반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함경북도 작은 산골마을 출신이다. 아버지는 2살 때 세상을 떠났고 집안의 기둥이었던 어머니도 가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지내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가을이 되면 피땀 흘려 농사지은 곡식을 ‘군량미’라는 명분 하에 모두 수탈해 갔다. 몸이 약한 어머니를 돌봐야 했던 서씨는 먹을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산과 들을 헤매면서 씀바귀, 쑥, 더덕 같은 산나물을 채취했고 10리 이상 떨어져 있는 시장에 걸어가 먹다 남은 국수 국물을 두 손 빌어 비닐봉지에 담아 오기도 했다.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다. 수확이 끝난 늦가을, 협동농장에 버려진 옥수수이삭을 주워 집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총을 들고 곡식을 지키는 군인들은 서씨를 도둑으로 몰며 옥수수이삭을 빼앗으려 했다. 차가운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주운 이삭을 빼앗길 수 없었다. 이삭은 서씨와 어머니의 생명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군인들은 서씨를 순순히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서씨는 피투성이가 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서씨는 그날 어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기다시피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며 흐느꼈다. 새벽녘, 어머니는 서씨를 흔들어 깨웠다.

“중국으로 가자.”

정리할 것도, 준비할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먼저 중국으로 떠났다. 서씨도 어머니가 남긴 전화번호 하나만 손에 쥔 채 얼마 후 두만강을 건넜다. 어느 지역인지도 모르고 며칠을 걷고 또 걸었다. 중국어를 배워야 살아남겠다는 생각에 한족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 중국공안이 밤낮으로 탈북자를 잡으러 다녔기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13살 아이가 일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겨우 용접 일을 찾아 돈이 조금 생긴 후에야 어머니께 전화를 할 수 있었다.

몇 달 만에 어머니를 만났지만 자리 잡을 곳은 마땅치 않았다. 공안들의 눈을 피해 밥을 먹다가도 숨고, 잠을 자다가도 도망쳐야 했다.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공안이 알게 되면 불이익을 당한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하기 일쑤였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중 한 조선족이 서씨 모자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시집을 가 자리를 잡으라고 권했다. 서씨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최소한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집과 남편이란 보호막이 있어야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팔려가듯 시집 간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서씨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눈물은 가슴으로부터 밀려오는, 표현할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현실에 대한 슬픔과 자신을 이런 궁지로 몰아낸 조국에 대한 증오가 함께 흘러나온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남한에 가자.”

그날 어머니의 모습은 “중국으로 가자”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호했다. 어머니는 “한국에 가면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동의할 수 없었다. 북한에서 남한과 자본주의에 대한 악선전을 듣고 자란 서씨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중국에서 8년 생활을 마치고 2010년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지 6년, 어머니의 바람처럼 서씨는 대학생이 됐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태어나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2년 전, 서씨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임파선 결핵이었다. 치료과정이 너무 힘들어 1년 동안 휴학하며 몸을 추슬렀지만 복학 후 다시 재발해 한 학기 만에 학교를 다시 쉬어야 했다. 그동안 몸무게는 10kg이상 빠져 현재 45kg을 오락가락 한다. 앞으로 1년간은 한 달에 2번씩 병원치료를 받아야 하고 독한 약을 매일 12알씩 복용해야만 한다. 그로 인한 위궤양과 위염도 달고 살아야 한다. 어머니 역시 각종 질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기에 서씨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암흑 같은 현실 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서씨는 “배고픔을 통해 더 큰 세상을 봤다”고 말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 대신 하얀 쌀밥을 먹고, 쓰레기를 뒤지며 깡통을 줍던 손에는 펜이 들려 인생의 미래를 직접 설계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서씨는 나눔의 길을 걷고자 한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신한 대한민국처럼 지금은 받고 있지만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몸을 추스른 뒤 공부를 마치면 중국물류사업에 도전하고 싶다.
그는 “내 자식에게는 분단된 나라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다”며 “후대에 온전한 대한민국을 물려주겠다는 사명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고 말했다.

모금계좌 농협 301-0189-0372-01 (사)일일시호일. 02)725-7014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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