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의 진실을 고발한 장편서사시 ‘한라산’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이산하 시인이 두 번째 산문집을 냈다. 전국 27곳의 산사를 돌아보고 자연과 숨 쉬며 체험한 기록들을 책으로 엮었다. 저자는 2002년 ‘적멸보궁 가는 길’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글에 새로 12편을 추가하고, 임재천 사진작가의 작품을 수록해 산사의 사계와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 재구성했다.
저자는 여러 산사의 특색을 시인의 시선으로 포착해 깊이 응시한다. 예컨대 순천 불일암은 “부사와 형용사가 없는 절”이고, 영주 부석사는 “그리워할 대상이 없어도 그리움이 사무치는 절”이며, 화순 운주사는 “가장 슬프고 애틋한 절”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단순히 산사의 풍경과 문화유산을 돌아보는 답사기에 그치지 않고 밖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는 구도기에 가깝다.
특히 저자는 산사의 가장 장엄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생생하게 전해준다. 새벽녘 산사의 고요함을 비롯해 노스님의 기침소리, 절마당의 꽃잎이 피고 지는 소리마저 놓치지 않고 마치 바로 옆에서 듣는 것 마냥 섬세하게 글로 담아냈다. 같은 곳을 다녀와서도 우리가 그냥 지나쳤던 풍경과 소리, 곡진한 이야기들이 그의 글에서 보이고 들리는 이유다. 시인의 눈을 통해 미처 느끼지 못했던 산사의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풍경 속에서 우리의 생을 돌아보게 된다.
저자가 처음 산사여행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부터다. 외할머니가 주지로 있던 암자에서 만난 ‘백구두를 신은 젊은 객승’과 노숙하며 전국의 절을 찾아다닌 것이 산사여행의 시작이었다.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하고 긴급 수배됐을 때, 아득한 심정으로 그가 찾아간 곳도 절이었다. 그 후로도 삶이 버거워 한숨이 깊어지는 날, 그는 산사에서 위로받고, 깨닫고 자신을 성찰했다. 그 눈물겹고 애틋한 감동적인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에는 삶에 대한 저자의 진지한 고민도 묻어난다. 저자는 인간은 우주의 가랑잎 위에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모래알들일 뿐이며 결국 기울어지다 사라져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때문에 피었다가 지는 것은 모든 존재의 거역할 수 없는 숙명임을 강조한다.
책을 읽고 나면 산문을 나서듯 들떠 있던 마음이 찻잎처럼 가라앉으며 적막 같은 강물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저자가 행간에 숨겨둔 맑은 바람 한 자락, 은은한 범종소리가 찌든 마음을 씻어준다. 1만5000원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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