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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틀로서의 사성제

기자명 김정빈

눈 깜박임 하나도 사성제에 의한다

지난주에 필자는 사성제를 ‘틀로서의 사성제’와 ‘내용으로서의 사성제’로 분류했다. 그런 다음 틀로서의 사성제는 비단 불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루는 보편적인 이치임을 말했다. 그에 비해 내용으로서의 사성제는 불교의 사성제와 기독교 등 다른 종교의 사성제가 다를 수 있다.

틀로서 사성제는 사절판 그릇
인간은 이 그릇에 문제 담아
소소한 작은 문제들이 아닌
모든 문제 총괄하여 다룰 뿐

구절판이라 불리는 음식 그릇이 있다. 하나의 비유로서, 이 구절판을 사절판으로 바꾸면 그것이 틀로서의 사성제가 된다. 사절판의 첫 번째 구역에 사고팔고(四苦八苦)를 담고, 두 번째 구역에 십이연기를 담고, 세 번째 구역에 열반(깨달음·해탈)을 담고, 네 번째 구역에 팔정도를 담은 것이 내용으로서의 사성제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성제의 틀 안에서 해결된다. 예를 들어 경영난에 빠진 회사가 있다고 하자. 이 경우 회사가 경영난에 빠진 것이 사성제로서 보면 고성제, 즉 ‘문제’이다. 이렇게 문제가 생기면 그 상대편에 문제의 ‘해결’ 상태가 자연히 설정되며, 이것이 사성제의 멸성제인 것은 물론이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이것이 사성제의 집성제이고, 그렇게 해서 밝혀진 원인에 따라 문제의 해결 ‘방법’이 도출되면 그것이 사성제의 도성제이다.

문제, 해결, 원인, 방법이라는 네 부분으로 나뉘어 문제가 발생돼 해결되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반적인 원리이다. 이 원리는 심지어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작은 행위까지도 적용된다. 우리는 왜 눈을 깜박이는가. 그것은 눈이 건조해져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눈을 깜박이는 작은 행위에서 불편이라는 고성제, 편안함이라는 멸성제, 건조함이라는 집성제, 깜박임이라는 도성제를 찾아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듯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적용받는 일반 원리로서의 틀에 당신께서 깨달으신 내용을 담으셨다. 바꿔 말해서 부처님께서는 삶에 부여된 ‘가장 큰 문제’를 사성제의 틀에 담으신 것이다. 불교는 한편으로는 앞에서 본 회사의 경영난이라든가 눈 깜박임 등을 다룬다. 그렇지만 불교의 본령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수많은 문제의 총합으로서의 ‘대문제(大問題)’로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서의 사고팔고를 다룬다.

이렇듯 대문제를 고성제로 제기한 다음, 부처님께서는 그 상대편에 문제의 해결 상태로서 열반(깨달음·해탈)을 멸성제로 배치하셨다. 여기서부터 불교는 불교 아닌 종교와 갈린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 기독교를 살펴보기로 하자.

기독교는 명시적으로는 사고팔고를 들고 있지 않지만 그 또한 삶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생긴, 삶이 갖고 있는 작은 문제를 넘어 삶의 대문제를 다루는 종교라는 점에서 불교와 같다. 다만, 고성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성제에서 기독교는 불교와 다르다.

불교가 열반을 멸성제로 제시하는 데 비해 기독교는 내세의 천국(구원)을 멸성제로 제시한다. 또한 불교가 십이연기를 문제의 원인으로 진단한 데 비해 기독교는 신과의 불화를 문제의 원인으로 진단한다.

두 종교의 문제 진단은 불교가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데 비해, 기독교는 타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낮과 밤처럼 다르다. 이렇게 되어 불교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통제하는 주체적인 종교, 기독교는 자신의 운명을 타자에게 맡기는 신 중심의 종교가 되었다. 이 다름은 두 종교로 하여금 각기 다른 도성제를 제안하도록 이끌었다. 불교는 팔정도를, 기독교는 대속자 예수에 대한 믿음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내용으로서의 사성제는 서로 다를지언정 기독교 또한 틀로서의 사성제를 벗어날 수 없고, 이는 대승불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용으로서의 사성제에 있어서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나 부파불교와 다른 면이 있다. 그렇지만 비록 대승불교라고 할지라도 틀로서의 사성제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대승불교는 ‘반야심경’이 ‘무고집멸도’를 설하는 데서 보듯이 사성제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잘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다음 주부터는 이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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