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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숭인동 묘각사

시대와 호흡하며 낙산의 변화를 이끌다

▲ 묘각사는 시대와 호흡하며 전법, 개혁, 나눔 도량으로 끊임 없이 변화해 왔다. 사진은 묘각사가 개최한 지역아동 희망나눔 행사 모습.

종로 큰길 옆 바위산 낙산(駱山) 향하는 길. 작은 슈퍼와 과일가게, 세탁소를 지나 아담한 공터를 벗어나면 좁은 오르막길 따라 소박한 모습의 가정집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 중간 쯤 한옥기와 얹은 멋스런 건물이 조화를 이루며 앉아있다. 관음종 총본산이자 낙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귀의처 묘각사(주지 홍파 스님)다.

1930년 포교·전법도량으로 개산
불교야학운동 등 사회개혁 전개
십시일반 서로 나누는 실천도량
템플스테이로 불교세계화 기여

묘각사가 이곳에 터를 잡은 건 86년 전인 1930년이다. 관음종 종조 태허 스님이 ‘ㄱ’자 한옥에 작은 부처님 한 분을 모시고 시작한 도량은 현재 대불보전과 원통보전, 낙가선원 등을 갖춘 대가람으로 거듭났다. 밖에서는 묘각사를 관음종 총본산, 템플스테이 대표사찰 등으로 평가하지만 낙산 사람들에겐 편하게 찾아와 차 한 잔 마시고, 쉴 수 있는 친근한 동네 절이다.

옛 낙산 사람들이 기억하는 묘각사는 ‘이야기 도량’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심신이 피폐했던 시기, 낙산 자락에 묘각사를 연 태허 스님은 법화신앙을 통해 사회에 희망을 불어넣는 운동을 전개했다. 스님은 묘각사뿐 아니라 낙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법문했고, 주민들은 낙산의 어른으로 태허 스님을 따르고 존경했다. 특히 1958~1961년 매일 사시에 탑골공원에서 법문한 이후, 묘각사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낙산 사람들과 외지인들로 항상 북적였다.

반면 청년들이 말하는 묘각사는 ‘사회개혁운동의 중심지’다. 서슬 퍼런 1970년대 묘각사는 불교야학운동 본부이자 불교사원화운동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묘각사 주변 청계천과 창신동, 숭인동 일대는 봉제공장과 피복공장이 즐비했다. 묘각사는 그곳에서 일하는 어린 친구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여는가 하면, 대학생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가르치고 사찰과 연계시키는 사원화운동을 펼쳤다. 당연히 국가기관의 감시대상이 됐고, 주지 홍파 스님은 안기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요즘 낙산 사람들은 묘각사를 ‘부자 절’로 부른다. 각종 재일과 재, 행사 등에 모인 불자들의 십시일반을 이웃과 나누다보니 오해 아닌 오해를 받고 있다. 실제 설에는 떡국 떡, 여름에는 수박, 추석에는 햅쌀, 동지엔 팥죽 등을 십수년째 이웃과 나누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역 내 독거어르신,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에는 2달에 1번씩 정기적으로 후원품을 전달하고 있다. 묘각사에 따르면 한 해 나눔비용만 1억여원에 달한다.

묘각사의 또 다른 별칭은 ‘손님 많은 절’이다. 2002년 월드컵대회를 계기로 템플스테이를 시작한 묘각사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대상을 외국인에 집중했다. 지난 14년간 다녀간 외국인만 1만6000여명. 이제는 동참자들이 SNS에 게재한 내용만 보고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에도 미 콜럼비아대학 재학생, 국제로타리클럽 회원, 슈퍼탤런트월드 참가자들이 묘각사를 방문해 한국의 불교문화를 체험했다. 올해 목표인 외국인 참가자 1500명은 이미 지난달 넘어섰다. 묘각사로 인해 낙산 사람들에게 외국인들은 더불어 생활하는 이웃이 된지 오래다.

작은 토굴로 시작해 포교·전법의 중심지로, 사회개혁운동의 터전으로, 자비나눔 실천도량으로, 한국불교 세계화의 선봉으로, 시대와 호흡하며 변화를 통해 발전을 거듭해온 서울 숭인동 묘각사. 그 변화와 발전의 중심에는 언제나 낙산 사람들이 있었다. 묘각사가 낙산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오늘도 변화를 꿈꾸는 이유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청소년·청년포교 강화해 활기 불어넣을 것”

묘각사 주지 홍파 스님

 
“도량은 마음을 닦고, 마음을 쉬는 곳입니다. 묘각사가 그동안 걸어온 길은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살펴 제공하고, 지원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묘각사는 낙산 사람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귀의처이자 쉼터가 될 수 있도록 시대에 발맞춘 변화를 이어갈 것입니다.”

홍파<사진> 스님은 변화를 강조했다. 물이 고이면 썩게 되듯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결국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게 스님의 철학이다. 홍파 스님이 생각하는 묘각사의 다음은 포교와 전법이라는 초심으로의 회귀다.

스님은 “우리사회 고령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실감할 정도로 낙산 주변이 어르신 동네로 바뀌고 있다”며 “더욱 심각한 점은 젊은 세대의 유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태허 스님이 탑골공원까지 찾아가 전법활동을 펼친 것처럼 묘각사의 활동범위를 숭인동과 창신동 전체로 넓히고 청소년·청년포교를 강화할 계획”이라며 “묘각사 도량이 젊은 활기로 넘쳐난다면 낙산에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나눔활동과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한 발걸음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홍파 스님은 “십수년간 나눔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풍족하지 않아도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고 동참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어 “도움이 필요한 분들 중에도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향후 묘각사의 자비나눔 활동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사각지대에 놓여 빈곤한 삶을 이어가는 분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또 “템플스테이와 더불어 유등법회와 신곡재(新穀齋) 등 사라져가는 한국불교문화를 전승하는 일에도 적극 앞장설 것”이라며 “누구나 찾아와 쉴 수 있는 사찰,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묘각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홍파 스님은 태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동국대 불교학과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현재 관음종 총무원장,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1351호 / 2016년 7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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