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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페샤와르 - ② 샤지키데리의 카니시카 스투파

서역 제일의 카니시카 대탑 자리에는 공동묘지만 남아

▲ 1908~1909년에 카니시카 스투파가 발굴된 페샤와르 근교 샤지키데리의 현재 풍경.

1909년 3월 당시 페샤와르 박물관의 미국인 큐레이터 스푸너(D. Brainerd Spooner)는 근교 샤지키데리에서 불타의 사리와 재가 담긴 금동용기를 발굴하였다. 거기에는 카로스티 문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모든 구법승이 찾아 예배하고
언제나 밝은 빛을 발한다 해서
‘작리부도’라는 이름으로 불려

1909년 3월 페샤와르 박물관
미국인 큐레이터인 수푸너가
불타 사리 담긴 금동용기 발굴

팻말은 물론 아무런 흔적도 없어
지금은 지역사람들도 존재 몰라

“카니시카푸라(당시 푸루샤푸르)의 대왕 마하라자 카니시카의 갸륵한 선물인 향기로운[사리]함을 대장군 승가람(mahāsena samghārāma)의 카니시카 정사(kanishkavihara) 건설의 총감독인 사노(寺奴) 아기사라(dasa agisara)가 유정들의 안락과 이익을 위해 설일체유부의 스승들께 바칩니다.”

이는 당시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카니시카 대탑은 동아시아에서 ‘작리부도(雀離浮圖)’라는 이름으로 서역 제일의 탑으로 찬탄되었고, 현장을 비롯한 여행기를 남긴 거의 모든 구법승들이 그곳을 찾아 예배하였다. 그에 앞서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 푸쉐(Alfred Foucher)가 페샤와르를 방문하여 동남쪽 군즈(Gunj) 게이트 밖 교외의 두 언덕을 현장법사(630년 무렵 간다라 입성)가 ‘대당서역기’에서 말한 카니시카 스투파로 비정하였는데, 스푸너의 발굴로 인해 그의 가설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었다.

▲ 공동묘지 앞까지 마을이 들어섰는데, 마을은 파슈툰의 전사 아쿤드 다르웨자의 묘지에 따라 아쿠나바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가운데 푸른 돔이 아쿤드의 사당이다.

현장은 카니시카 대탑 이야기를 과거4불(佛)이 앉았던 대도성(푸루샤푸르) 동남 8∼9리의 핍팔라수(보리수)로부터 시작한다. 과거 마지막 부처인 석가여래께서 이 나무 밑에 앉아 “내가 열반에 들고 400년이 지난 후 ‘카니시카’라고 하는 일세에 뛰어난 왕이 출현하여 여기서 멀지 않은 남쪽에 스투파를 세우면 나의 다수의 골육사리가 이곳에 모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실제 이 예언은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에도 기술되고 있으며, ‘아육왕전’에서도 동일한 형식의 이야기가 아쇼카왕의 본생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멸 400년, 카니시카 왕이 출현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왕은 죄와 복(인과)을 믿지 않고 불법을 업신여겼다. 사냥을 나갔다가 [소똥으로] 3척의 탑을 쌓고 있던 목동으로부터 이 같은 불타의 예언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그 또한 불탑을 세워 불교를 공경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가 세운 불탑은 목동의 탑보다 3척이 작았고, 그래서 자꾸 쌓다보니 400척이 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둘레가 1리 반, 높이가 5층 150척의 기단 위에 400척의 탑신을 세우고, 여기에 다시 25층의 금동 상륜(相輪)을 얹어 햇빛이 비치면 밝게 빛나는 장엄한 대탑이 완성되었다. 왕은 여기에 여래의 사리 1곡(斛: 10말)을 안치 하였다.

현장보다 100여 년 전에 이곳에 들린 송운과 혜생(518∼521, 인도 체재)은 300보의 기단 위에 400척 높이의 탑을 구축하고, 여기에 다시 13층의 금반(金槃)으로 이루어진 300척의 철주(鐵柱)를 설치하여 도합 700척의 높이였다고 전하고 있다.

다시 송운 일행보다 100여 년 앞서 푸루샤푸르에 온 법현(399∼412년)은 불타의 예언과 함께 카니시카(罽膩伽) 왕이 소치는 아이의 3척의 불탑 위에 40장(丈: 400척)의 탑을 세우고 온갖 보배로 장식하여 남섬부주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전하였다. 그리고 현장보다 100여 년 늦게 이곳을 찾은 혜초(723∼727) 역시 세친과 무착보살이 머물던 카니시카 가람(葛諾歌寺) 옆에 항상 빛을 발하는 탑이 있다고 언급하였으며, 혜초보다 30년 뒤에 간다라에 온 오공(750∼790)은 이 절의 이름이 카니시카 왕의 성탑사(罽膩吒王聖塔寺)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탑사의 현저한 특징은 150척 높이에 25층(송운에 의하면 13층)으로 된 금 쟁반(金槃) 형태의 찻트라(Chattra: 寶輪)였다. 이는 법륜(dharmacakra) 즉 진리의 수레바퀴를 상징한다. 그것은 언제나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크라를 갖는 불탑’ ‘작리(雀離)부도(cakrin buddhastūpa)’로 불렸을 것이다. 장안에 전해진 ‘작리부도’는 장엄함과 화려함의 극치였다. 1척을 30㎝로 이해하여 현장의 전승에 따른다면, 기단(150척) 45m, 탑신(400척) 120m, 금빛의 상륜 45m이다. 송운에 의하면 거중기로 철주를 들어 올리는 데에는 천신의 도움이 있어야 하였다. 송운과 혜생이 인도에 간 것도 실은 거기에 북위 효명제의 태후(靈)가 보시한 700여 척의 깃발을 내 걸기 위함이었다.

작리부도의 존재와, 그것이 카니시카 왕이 설일체유부의 스승들께 봉헌한 탑사라는 것을 알고 페샤와르에 온 이상 거기부터 먼저 가야 하였다. 모든 인도불교사와 미술사에서 샤지키데리는 페샤와르 남쪽에 있다 하였고, 구법승의 여행기에서도 10리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게다가 현장은 대도성(페샤와르) 동남쪽 8∼9리에 높이 100여 척의 핍팔라수가 있고, 이 나무 남쪽에 카니시카 왕이 세운 스투파가 있으며, 대 스투파 서쪽에 세친이 ‘구사론’을 저술하였던 카니시카 가람이 있다고 하였으니, 카니시카 가람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라도 페샤와르 관광을 샤지키데리로부터 시작해야 하였다. 마침 간다라를 뜨겁게 달군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석양이 비친 폐탑지를 관광하는 것은 황홀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 카니시카 스투파에서 발굴된 사리용기. 2세기. 사진은 영국박물관에서 만든 복제품. 또 하나의 복제품과 진품은 페샤와르 박물관에 있다. 용기뚜껑의 삼존상은 브라흐만(범천)과 인드라(제석천)의 예배를 받고 있는 불타. 성도 후 범천이 설법해주기를 청하는 모습으로 추정한다. 본체의 입상은 해와 달의 신에 둘러싸인 카니시카 왕. 용기에는 세 조각의 불타유골이 들어 있었는데, 발굴단에서는 1910년 안전한 보호를 위해 이를 미얀마로 보냈고 현재 만달레이 힐의 우칸다 승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순진한 생각임을 깨닫는데 조금의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프론터에 내려와 샤지키데리의 위치를 물었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호텔 문을 나서자 몰려든 구경꾼들 역시 그러한 곳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였다. 릭샤도 택시도 불통이었다. 페샤와르에서의 첫날 기억을 카니시카 스투파에 두려했던 생각이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장소를 옮겨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장 위쪽으로 걸어가려는데 일단의 구경꾼들이 우리를 불렀다. 그곳을 안다는 릭샤를 잡아놓고 있었다. 재차 확인해주기를 부탁하자 잘 안다는 답변과 함께 요금까지 200루피에 흥정해주었다. 운전수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노인이었다. 물론 말은 통하지 않았다.

릭샤는 시장을 지나고 무굴 시대 세워진 게이트를 지나고, 또 하나 더 지나고, 골목길을 가다 다시 큰 길로 나왔다. 이따금 차를 세우고 묻기도 하였다. 어느덧 도심을 벗어난 것 같았다. 샤지키데리는 시 외곽일 것이니 다 와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운전수는 이제 지나가는 릭샤나 택시를 붙들고 묻고 있었다. 어째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이미 200루피의 거리를 넘은 것 같았지만, 이제는 우리 자력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해가 지고 있었고 릭샤는 계속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릭샤왈라가 시동을 끄고 내렸다. 또 어디로 물으러 가는 것인가? 어디 가냐고 묻자 길 건너 모스크를 가리켰다. 확성기에서 알라신은 위대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기도시간인 모양이다. 울화가 치밀었다. 그냥 가버릴까 하다 여기가 이슬람국가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기다렸다. 10여 분 후 그가 나타났을 때 두 말없이 200루피를 그의 손에 쥐어주고 내렸다. 그가 뭐라 뭐라 소리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상당히 먼 거리였다. 이미 해는 졌고, 시장 통도 거의 철시하였다. 백열전등이 뜨겁게 켜진 허름한 식당 돗자리 위에 차려진 설은 밥과 양파와 홍당무 몇 조각, 한 덩이의 닭고기 커리로 저녁을 해결하였다. 검은 구레나룻의 식당주인도, 요리사도, 손님들도 모두 우리만 지켜보고 있었다. 페샤와르의 첫날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사진 위,아래 발굴당시의 카니시카 스투파 유적의 동판화와 발굴현장. 그러나 오늘날 이 곳이 어디쯤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음날 새벽 스마트폰의 구글 지도상에 뜬 ‘카니시카 스투파(Kanishka stupa)’까지 순전히 GPS만을 이용하여 걸어가기로 하였다. 시네마로드에 있는 숙소에서 대략 3㎞ 거리였다. 새벽이어서 사람들의 방해도 없었고 복잡한 시장 통의 미로를 헤맬 일도 없었다. 여성병원 앞을 지나 안다르샤흐 바자르를 따라 내려갔다. 새벽이었음에도 물고기 전문시장인지 큼지막한 연어를 거리에 쌓아놓고 분배하고 있었다. 좀 더 가니 웅장한 성문의 고르 카트리(Gor Khatri)가 나왔다. 한 때 카니시카 가람으로 비정된 곳이다.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사용되는 듯 아침 산책을 나온 이들이 약간 열린 문틈으로 출입하고 있었다.

서문으로 들어가 동문으로 나왔다. 오후에 다시 오게 될 것이다. 시장을 다 지난 것 같았다. 경찰들이 밤새 지켰는지 바리케이트가 골목을 막고 있었다. 검문은 없었다. 이윽고 푸쉐가 말한 군즈 게이트가 나왔고, 성벽 같은 시장 담을 따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동네가 끝나고 약간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가니 도로 좌우로 공동묘지가 펼쳐졌다. GPS는 공동묘지를 가로 질러 우리를 마을 안으로 안내하였다. 이른 아침 남의 동네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지만 도리 없었다. 골목을 따라 가다 다시 샛골목에 들어섰는데, 막다른 골목이었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한 청년을 만났다.

“샤지키데리, 카니시카 스투파?”

갸우뚱하는 그에게 다시 외쳤더니 따라오라고 한다. 그를 따라 다음 샛골목에 들어가니 이번에는 막다른 골목에 쪽문이 있고,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청년은 옆집에서 열쇠를 얻어 열고, 문을 두드려 안쪽에서도 열게 하였다. 그 길은 다시 공동묘지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조그만 개울에서는 마을 오수가 내려오는지 악취가 풍겼다. 공동묘지 안쪽으로 20m쯤 걸어가자 모스크인 듯한 조그마한 사당이 나타났다. 거길 기웃거리자 관리인인 듯한 이가 튀어나와 소리를 지른다. 아마 들어가지 말라는 것 같았다. 그는 청년에게 안쪽에서 평상을 가져오게 하고 차도 내왔다. 그러는 사이 한명의 청년은 두 명이 되고, 세 명, 다섯 명, 열 명이 되었다. 또 물었다. “웨어리즈 샤지키데리? 카니시카 스투파 웨어?”

대답이 없었다. 참다못해 일어섰다. 왔던 길을 따라 쭉 가니 묘지가 끝나는 곳에 공터가 나타났고, 큰 나무 밑에서 아이들과 청년들이 크리켓을 하고 있었다. 영어를 조금 아는 청년이 등장하였다.

“샤지키데리가 어디냐? 카니시카 스투파 유적지에 가려고 한다.”

 
▲ 사진 위,아래 순서대로 카니시카 대왕 입상(인도 마투라 박물관), 앞뒤 양면에 ‘왕중왕 쿠샨의 카니시카’와 ‘불타’라는 그리스 문자와 입상이 새겨진 금화.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대답이 없다. GPS가 지시하는 스투파의 지점은 공동묘지에 인접한 집이었다. 처음 만난 청년이 사촌누나의 집이란다. 허락을 얻는데 또 10여분, 이윽고 구글 지도상의 카니시카 스투파의 정확한 지점에 섰다. 아무 것도 없었다. 잡초만 무성하였다. 사진이라도 찍을까 하였으나 찍지 말란다. 다시 공동묘지로 나와 작은 모스크 입구 평상. 이제 크리켓을 하던 친구들까지 우리를 둘러쌓았다. 말쑥한 차림에 근엄하게 생긴 흰 수염의 노인이 등장하였다. 모두들 깍듯한 것으로 보아 촌장쯤 되어 보였다.

“샤지키데리가 어니냐? 우리는 카니시카 스투파 유적지를 보기를 원한다. 카니시카 스투파!”

청년이 비로소 통역하였다.

“여기가 샤지키데리, 샤지데리, 샤직데리이다.”
“카니시카 스투파는 어디 있는가?”

저들끼리 뭐라 뭐라 하였다. 뭐라는 것이지? 그러다 문득 촌장 입에서 ‘달러’라고 하는 말이 나왔다. 어디서 듣기에 파키스탄의 파슈툰 족은 지역촌장이 치안 사법권까지 갖는다고 하던데, 이른 아침 알지도 못하는 마을에 들어왔다가 구금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영어하는 청년이 통역하였다.

“하우 매니 달러 카니시카 스투파?”
…….

이제 한시라도 빨리 이 샤지키데리를 벗어나야 하였다.

“생큐 베리 머치.” “앗살람 알라이 쿰.”

그날 오후 페샤와르 박물관의 학예관에게서 확인하였다. 카니시카 스투파의 터는 샤지키데리 공동묘지이며, 팻말은 물론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다고.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샤지키데리의 오늘날 명칭은 아쿠나바드(Akhoon-abad)였고, 공동묘지 옆의 사당이 바로 파슈툰의 전사 아쿤드 다르웨자(Akhund Darweza, 1553∼1638)의 묘지였다. 페샤와르 시민이, 샤지키데리 사람들이 ‘샤지키데리’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였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51호 / 2016년 7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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