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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픈 인연을 대하는 자세

기자명 김용규

주어진 인연 원망 않는 절벽 위 소나무 가르침

숲을 깊게 마주하면서부터 나는 다른 생명 안에 있는 고난과 상처를 알아채게 되었습니다. 내가 숲을 깊게 마주한다고 표현하는 것의 의미는 숲에 사는 풀과 나무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자원으로 인식하는 인간중심의 눈을 벗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그것이 식용이나 약용할 수 있는 대상인지, 혹은 해로운 대상인지 등의 용도중심적인 시선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숲을 이루는 생명 하나하나가 태어나고 자라고 결실을 맺고 소멸해 가는 삶의 전 과정을 내 삶의 그것과 대비하며 바라보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 생명의 삶과 내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그 눈을 열기만 하면 분석적 지식이나 과학의 렌즈로는 만날 수 없는 지경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중 오늘은 소나무가 아픈 연(緣)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 삶에 찾아오는 아픈 인연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풀과 나무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삶이 주어진 자리에서 일생,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식물에게 내려진 형벌일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에는 주어진 자리에서 나고 살고 죽어야하는 명(命)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식물들은 스스로 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광합성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동물들은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반면 누군가를 잡아먹고 살아야 하는 참담한 형벌을 지녔습니다.

십여 년 전 나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바위를 뚫고 자라는 소나무를 긴 시간 동안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가파르고 위태로운 절벽에도 생명이 살아갑니다. 그중 가장 분명하게 눈길을 끄는 나무는 역시 소나무입니다. 흙 한 줌 고이기 어렵고 도저히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그런 자리에서 그 바위를 딛고 자라는 소나무를 처음으로 인식한 어느 날 나는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너는 왜 여기냐? 어느 부잣집 정원이나 마을 어귀, 아니면 흙더미 풍부한 어느 산중에서라도 태어나지 못하고 왜 하필 여기냐?’ 그리고 이런 궁금함이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저것이 가능하지? 어떻게 나무가 바위를 뚫고 자랄 수 있지?’

바위를 뚫고 자라는 소나무를 보며 든 나의 의문과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내게 오랜 세월 풀지 못한 숙제 하나를 풀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왜 지금 가난한 부모님을 만나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일까?’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품어 온 그 의문 속에는 다음과 같은 야속함이 숨어있었습니다. ‘더 부유하고 더 높은 교양과 학식을 갖춘 부모님을 만났더라면 내가 해보고 싶은 소박한 열망들을 마음껏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 절벽 위의 소나무를 여러 차례 깊게 마주하면서 이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답(自答)을 내리며 깨끗이 지울 수 있었습니다.

‘아, 삶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구나. 삶은 오직 주어지는 것이구나. 내가 내 삶의 시작과 관련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구나. 생명 모두는 그저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제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구나.’ 훗날 ‘업’에 관한 불가의 소식을 접하고 이 궁금함은 더욱 깊게 해소되는 계기를 만났지만, 그 전까지의 시간 동안 품어왔던 의문과 쓸데없는 원망은 그날을 계기로 완전히 지울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내 생각을 한 뼘쯤 더 성숙시킨 계기 역시 그 소나무의 모습을 통해 찾아왔습니다. 소나무가 흙 한 줌 고이지 못한 자리에서 삶을 부여받은 것은 제 부모 나무의 씨앗이 바람과 만나 흐르다가 하필 그 바위 위에 떨어진 탓일 것입니다. 또한 하필 그 씨앗이 발아(發芽)하기에 겨우 가능한 흙이 있었고, 적당한 습도 조건과 충분한 빛 조건이 작용한 탓일 것입니다. 문제는 발아 그다음이었을 것입니다. 어린 소나무는 뿌리 내릴 흙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거세면 언제든 송두리째 삶을 잃을 위태로움이 그 가난한 삶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절벽의 암벽은 그에게 아픈 인연이자 원망하고 싶은 인연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그 소나무는, 아니 지금 어디든 절벽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소나무들은 대부분 그 절벽의 바위를 뚫고 뿌리를 박아 살고 있습니다. 바위를 뚫지 못하는 다른 어떤 종류의 나무들(예컨대 느티나무)은 그런 바위를 끌어안고 살아내고 있습니다. 아픈 인연을 대하는 자세를 나는 그렇게 숲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351호 / 2016년 7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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