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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음악가























<사진설명>사진 오른쪽 위부터 이찬우, 변규백, 이종만, 반영규씨.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회 때마다 부르는 ‘삼귀의’, ‘사홍서원’ 등 의식곡만이 아니라 봉축 행사때 들을 수 있는 ‘오늘은 좋은날’까지 우리가 무심코 부르고 듣는 불교음악 뒤에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 땀흘리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식에 장엄함을 더하고 신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애써온 사람들의 가슴 속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조용한 절에서 무슨 음악이냐며, 아이들에게 노래 가르치고 작곡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스님들도 계셨죠.”
‘청법가’를 작곡한 이찬우 씨가 대학시절, 작사가인 운문 스님을 만나 절에서 스님들과 생활 하며 작곡하고, 어린이 합창단을 지도했을 때를 회상했다. 당시 이찬우 씨는 운문 스님의 글에 곡을 붙이고 틈틈이 서울 시내 초등학교를 순회하며 어린이들을 모아 찬불가 가르치는 일을 했다. 찬불가를 만들도록 독려한 운문 스님 외에는 그에게 아무도 ‘잘한다, 애쓴다’는 격려보다는 오히려 절에서 음악한다는 이유로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구박을 받는 신세였다. 운문 스님은 그 때문에 다른 절로 옮겨야 했고 이찬우 씨도 스님을 따라 옮겨 다녔다. 그러나 찬불가에 대한 냉대에 결국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 절을 떠나 부산에서 교회합창단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찬우 씨의 고생담은 1960년대 찬불가 작곡가들이 불교계에서 겪어야 했던 보편적 상황이었다. 1960년대야 그렇다고 하지만 요즘이라고 상황이 나아졌을까.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수없이 생각하죠. 빚은 늘고 가족들에게도 미안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부처님오신날 동대문운동장하고 우정국로 회향식에서 그렇게 딱 두 번 나오고 말 음악인데 하고 생각하면 왜 이러고 있나 싶어요.”

찬불동요를 만드는 좋은 벗 풍경소리 이종만 씨는 한숨 어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의 이런 푸념은 투정 어린 불만이라기보다 교계의 무관심에 대한 섭섭함이다. 그가 찬불동요를 만들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조계사 어린이 합창단을 지도하던 황학현 씨가 곡을 부탁한 인연으로 시작됐다. 합창단을 지도하면서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지금은 함께 풍경소리 활동을 하는 정유탁 씨도 만났다.



“내가 만든 곡이 법회에서 불려질 때

가슴에는 만볼트 짜리 전류가 흘러”

사이 사이에 고비도 많았다. 1년에 한 번씩 사무실을 옮겨야 했고, 곡을 부탁할 때는 CD 20장으로 ‘봉사’를 설득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고 회한이 들 때 그는 청도 운문사 학인 스님들이 격려차 500만원을 보내주셨던 일을 떠올린다. 또 청주에서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전화로 자신이 만든 가사를 불러주는 마음도 헤아려본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고마운 사람들 덕에 ‘코가 꿰어’ 지금까지 찬불동요를 만들게 됐다는 그는 풍경소리 사무실에 빼곡히 들어찬 CD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꽈악 차 오른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제가 만든 노래들을 부를 때 제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아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일하다 보니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자신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곡을 부르는 모습에서 작곡가들이 힘을 얻는 것은 이종만 씨 뿐만 아니다. 교회 합창단을 지도하던 이찬우 씨도 1980년대 찬불가집이 나오고 전국의 합창단에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접하자 마음이 움직였다.

이제 “남은 인생은 불교 음악을 위해 바칠 것”이라는 그의 장담이다.
대한불교소년소녀예술원 원장으로 찬불가 작사가로 활동하고 있는, 황학현 씨는 불교 음악을 하며 겪는 경제적인 곤란함을 한탄하기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세속의 경제 논리로 보면 불교계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작년까지 제가 이 일하면서 쏟아 부은 돈이 억대가 되죠. 다 부모님 돈을 털어 넣은 거예요. 제가 여기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여태껏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았겠죠. 돈이 많아서 하는 것도 아니구요. 단지 제가 해야할 일이니까 하는 것이죠. 이게 불심이라면 불심인지도 모르죠.”

그는 1982년 작사를 시작해 400곡 가량 작사했다. 창립한지 10년이 된 대한불교소년소녀합창단이 배출한 학생 가운데에는 반 이상이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다. 이들이 불심을 가지고 교계에서 활동하는 것은 그에겐 큰 보람이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도 아닌데 이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불교음악을 만드는데 나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화살을 만드는 장인에게 계속 화살을 만드는 이유를 물어보는 것과 같군요. 처음 시작할 때도 사명감으로 시작했으니까, 지금도 하는 거지. 불교 음악을 통해 참회하고 발심해 불교를 더 친근하게 여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거죠.”

포교지 ‘자비의 소리’를 발간하며 ‘붓다의 메아리’, ‘어화너’, ‘무상게’ 등 1970년대부터 수 십년 간 찬불가 가사를 만들어 온 반영규 씨는 불교음악을 하는 이유를 화살 만드는 장인에 비유했다. 타종교의 예를 들 것도 없이 찬불가를 만들어서 불교음악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건 그야말로 사족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불교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예전만큼 활발한 창작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80년대 활발한 활동을 해온 작곡가 변규백 씨는 요즘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 작곡활동이 뜸하다. 뜸한 활동에 개종설마저 돌 정도였다.

“찬불가는 불사입니다. 불심으로, 의욕을 가지고 하면 되겠다고 열심히 작곡했지만 이제는 마음도 비우고, 참회하고 기도를 하면서 소리가 흘러넘칠 때 곡을 쓰죠. 곡을 쓰는 데 서두르지 말자고 스스로를 채찍질합니다. 숫자는 아상일 뿐이죠. 사람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노래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그게 제 과제지요.”
국악을 전공한 그는 60년대에 수년간 절에 다니며 염불 소리를 채집했다. 그리고 불교 음악이 우리 민요의 뿌리임을 발견했다.


황학현씨



“제가 공부해온 음악들은 결국 모두 불교음악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고, 우리 민족과 역사인 것이죠. 불교문화 없이 우리 민족은 정체성을 드러낼 수가 없어요. 우리 민족이 불러온 노래들은 불교 음악에서 민중으로 뿌리내린 것이니 저는 태어나기 전 조상 때부터 불자인 것이고, 그것을 다시 꽃피우고자 노력하는 건 당연한 거죠.”
법회에서 합창단이 환희심으로 얼굴을 환하게 펴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에 만 볼트의 전류가 흐른다’며 행복해 하는 그는 불교음악을 만들 때의 의욕을 숨기지 않았다. 이들 불교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산사음악회에서 한 곡이라도 더 불교음악을 소개하고, 방송에서도 한 번 더 찬불가를 틀어준다면 찬불가를 부르는 사람이 많아질텐데”하는 바람으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선림 기자 knw@beopbo.com

부산지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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