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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해주 스님

마음 찾아 떠난 선재동자, 화엄대해에 솟은 수미산이 되다

▲ 오는 8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해주 스님은 "동국대 부처님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평생 귀의처이자 스승이 되어주신 부처님 앞에서 스님은 단정히 손을 모았다.
법명이 특이하다. 바다 해(海), 머무를 주(住). 법호는 수미(須彌), 수미산을 뜻한다. ‘불교총람’ 인명록을 다 뒤져봐도 이런 법명 쓰는 이는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수미해주(須彌海住) 스님 딱 한 명이다. 동국대 최초의 비구니교수. 화엄학의 대가이자 여성불교운동의 대표주자, 그리고 첫 비구니 동국대 정각원장. 굵직굵직한 타이틀이 줄을 잇는 해주 스님에게 던진 첫 질문은 법명 이야기였다.

▲무슨 뜻이 담긴 법명인가.
“운문사 사리암 행자 시절에 은사스님이 주신 법명이다. 해탈하겠다고, 마음공부 하겠다고 절에 왔지만 이름은 좋은 것 갖고 싶었나보다. ‘바다에 머문다’는 뜻이 마음에 안 들었다. 바다하면 고통바다[苦海]만 생각났다. ‘고통의 바다에 머물고 있으면 어쩌나’하고 걱정을 해 꿈까지 꿨다. 꿈에 어떤 스님이 나타나 법명을 ‘해암(海巖)’으로 바꾸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맘에 안 들었다. 고통의 바다에 갇힌 바위니 이건 정말 꼼짝도 못하겠다 싶었다. 그때는 그런 분별이 있었다. 은사스님에게는 왜 법명을 이렇게 지었는지 물어본 적 없다. 행자살이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지금도 법명이 마음에 안 드는가. ‘수미’라는 법호도 특이하다.
“아니다. 지금은 다르다. ‘화엄경’의 ‘일체유심조’ 구절을 풀기 위해 동국대에 왔다. 이 문제를 교학적으로 먼저 풀고 선방 가서 마음공부 해야겠다는 생각이 꽉 차 있었다. 그런데 박사 논문 준비하며 ‘화엄경’을 다시 보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화엄경’에도 팔만사천 해탈문이 다 있었다. 경에서도 다 펼쳐 보인 그 가르침을 보지 않고 멀리 있는 마음공부 도량만 찾고 있었다. 법명 탓하듯 자리 탓을 한 셈이다. 어디서든, 무엇을 통해서라도 마음공부를 할 수 있음이다. 법명에 대한 해석도 달라졌다. 고통의 바다만 바다인가. 부처님의 가르침도 바다다. 해인삼매의 화엄바다이기도 하다. 고해가 아닌 화엄대해에 머무는 것이다. 호는 꿈에서 노스님에게 들은 해암에서 가져왔다. 작은 바위만 바위인가. 수미산도 바위다. 수미산 꼭대기가 화엄경에서 ‘초발심시변정각’ 자리이다. 바다에 솟아 있는 수미산, 그래서 수미해주가 됐다. 부처님 가르침의 바다에 머물며 화엄을 가르치고 정각을 이루라고 주어진 법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바다가 고통바다여도 좋고 화엄대해라도 상관없다. 생사고통바다가 그대로 깨달음의 바다이다. 사바가 극락이고, 극락이 사바고, 정토가 예토고, 예토가 정토 아닌가. 화엄경의 무착불은 세간에 안주하시면서 정각을 이루신다고 한다. 세간의 생사에도 정각의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으면서 중생과 더불어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육조단경’ 구절에 ‘마음’ 끌려
생사가 마음에 달려있음 느끼고
스무살에 운문사로 찾아가 출가

‘일체유심조’ 만나 경전에 눈떠
“부처님 가르침이 여기 다 있다”
선방 미련 떨치고 동국대 진학
석·박사논문서 ‘마음’ 다루며
깨달음 길 교학적으로 증명

장맛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날, 세상은 바다에 잠긴 듯 물결 뒤에서 출렁이었다. 북악산 중턱, 수미정사까지 짊어지고 온 수많은 질문이 여기서 끝났다. 나머지는 부언이다. 오래된 낡은 선풍기만 삐걱거리며 두 사람 사이서 바쁘게 추임새를 넣었다.
중학교 때 책을 좋아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육조단경’의 한 구절을 만났다. ‘깃발이 움직이는가, 마음이 움직이는가.’ 무슨 책인지도 몰랐지만 그 짧은 내용이 머릿속에 각인됐다. ‘스님들은 어떻게 마음이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까.’ 특별한 세계라고 느껴졌다. 동경이 싹트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스님이 되고 싶었다.
그 후로 ‘마음’이 자꾸 걸렸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사실이 눈엣가시처럼 어른거렸다. 사춘기 학생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었다. 그래서 성적순은 마음대로 오갔다.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퀴리부인 같은 과학자도 되고 싶었고 의사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도사 따라 산에 가서 도인되어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더 커져갔다.
인연의 꽃망울은 어느 날 툭 터졌다. 노환으로 입원한 이모님 병간호 차 드나들던 병원에서 자살하려다 실려 온 청년을 보았다. 과학은 우리가 사는 동안 도움을 주고 편하게 해주는 것인데 ‘죽고 사는 것이 마음에 달렸구나.’ 그 다음날 바로 집을 나섰다. 해질녘 운문사에 도착했다. 1972년 3월, 만 20살이었다.

▲ 은사 성관(오른쪽) 스님과 20대의 해주 스님.
은사는 성관 스님, 당시 운문사 주지였던 태구 스님의 손상좌가 되었다. 운문사 행자들은 사리암에서 살았다. 기도객이 많은 사리암에서는 새벽 2시 찰떡 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떡을 쳐 놓고 새벽 3시에 도량석을 마치면 엉덩이를 땅에 붙일 시간이라고는 공양 때밖에 없었다. 밤 9시면 녹초가 돼 잠들었다. 어쩌다 조금 여유가 생길 때면 바람도 쏘일 겸 사리암 뒷산을 올랐다. 그러고 돌아오는 날이면 어른스님들은 모두 ‘망상 피울라’고 걱정을 했다. 그렇게 행자를 마치고 그해 겨울 석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마음공부 하겠다고 당차게 출가했지만 망상 피울 새도, 마음 돌아볼 새도 없었다. 수계 후에는 부산 반야사에서 상노스님을 모시고 시봉하다가 운문사 전문강원(현 운문사 승가대학)에 입학했다.

▲승가대학 졸업을 동학사서 한 이유는?
“선방을 가도 강원을 마치고 가야 한다는 은사스님과 노스님 말씀에 따라 운문사 승가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방학 때가 되면 걸망지고 산문 나가는 도반들이 부러웠다. 출가 본사가 운문사인데다 노스님, 은사스님 다 운문사에 소임을 보고 계시니 산문 나설 일이 없었다. 제일 멀리 나가 본 게 운문사 주차장이었다. 그래서 사집반때 계룡산 문필봉을 핑계로 동학사로 갔다. 동학사에는 문필봉이 있어서 대문장이 난다는 말도 있었다. 그 말에 솔깃했다. 유식학에 밝은 호경 조실스님에게서 사교과와 대교과 공부를 하고 동학사를 졸업했다.”
▲‘도 닦겠다’고 출가한 것이 아니었나.
“사실 강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여러 번 마음이 들썩거렸다. 이렇게 책을 붙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마음공부하러 선방에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서장’을 배우다 말고 선방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가 강원 졸업하고 가라해서 미뤘다. ‘능엄경’, ‘원각경’ 볼 때도 생각을 일으켰다가 일단 강원을 졸업하기로 했다.”
▲동학사전문강원 졸업 후 동국대에 진학 한 이유는.
대교반 때 ‘화엄경’을 배우다가 ‘일체유심조’를 만났다. 또 머리가 띵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경전에서도 이렇게 마음도리를 설하고 있었다. 그 가르침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갑자기 마음도리에 대한 가르침을 교학적으로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 졸업 후 공부를 계속 하는 곳으로 동국대를 택했다.”

“내가 너는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은근 동학사에 남길 바라셨던 호경 조실스님의 서운함을 뒤로한 채 해주스님은 1978년 동국대에 입학했다. ‘화엄경’을 연구하면 마음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석·박사 논문서 모두 마음을 다룬 이유다.
석사 논문은 ‘화엄경의 발보리심에 대한 연구’, 박사 논문은 ‘신라 의상의 화엄교학연구-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서의 성기(性起)사상을 중심으로’였다. 석사에서는 깨닫기 위한 보리심, 박사에서는 깨달은 이의 보리심을 다뤘다. 성기심이란 부처님의 마음이 그대로 일어나 만덕을 구족한 마음이다. 실은 그것이 ‘내 마음’인데 단지 모르고 있을 뿐임을, 그 길이 분명한 깨달음의 길임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밝혔다. 출가 후 놓아본 적 없는 18년 정진의 결실이다.

해주 스님은 “선방에도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고 말한다. 선방이든 학교든 길은 어디나 있었다. 지금 여기서 이 몸으로 바로 부처로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노스님 생각은 처음엔 달랐다.
사리암 행자시절부터 ‘영특한’ 상좌였다. 숨고를 틈 없는 행자생활 중에도 염불을 금방 외웠다. ‘초발심자경문’도 나흘 만에 다 외웠다. 그리고 더 배우고 싶어 ‘다른 것 주십사’ 청했다. “다 했으면 강 바쳐 봐라”는 노스님 말씀에 기다렸다는 듯이 달달 외워댔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말이 빨랐다. 그러고는 된통 야단만 맞았다. “날래 먹는 콩, 똥에 온 콩 나온다(빨리 먹는 콩 다 소화되지 않고 똥에 그대로 나온다.)” 걱정만 듣고 다시 사리암으로 올라와 배운 것 되새기며 또 떡만 쳤다.

그러던 손주가 대학 간다니 마땅치 않았지만 보냈다. 그런데 이번엔 대학원을 간다니 ‘요란스럽다’ 소리가 먼저 나왔다.
“속인들 버글거리는 서울서 뭐하고 있노. 빨리 내려와라.”
“중노릇 거꾸로 한다. 대학원은 무슨 대학원이고? 요란스럽게 하는 것이 다 신통찮은 증거다.”
찾아 뵐 때마다 노스님, 은사스님 걱정을 한 보따리씩 짊어지고 돌아왔다. 교수가 된 후에도 노스님에게 찾아뵙고 고했다가 걱정만 실컷 들었다.
“교수는 무슨 교수고. 빨리 내려와서 참선해라.”
스무 살 앳된 여학생이 출가한다고 찾아오기 며칠 전 노스님은 호랑이가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내색은 안했지만 노스님의 기대도 컸을 것이다. 그랬기에 더 엄하게 가르친 것이라 해주 스님은 생각한다.
선방에 와 정진하길 간절히 바랐던 노스님의 그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좋아하는 해주 스님이다. 그러니 교수가 된 후에도 ‘해주가 누꼬?’하며 타박한 것은 노스님의 서운함이 그만큼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대중들에게 “쟈가요, 동국대 교수라요”하시며 핀잔 같은 자랑을 넌지시 늘어놓으셨다. “이제 노스님 뜻대로 교수 그만 하겠다”고 말씀드리니, “마, 한길이나 제대로 가소.” 하며 격려해주셨다.
그 힘이었을 터다. 쉽게 칭찬 안 해주니 더 열심히 했고, 잘했다 부추기지 않으니 더 몸을 낮췄다. 어른들이 그렇게 엄하니 자만하고 느슨해질 틈이 없었다. 가풍이 그러니 해주 스님도 제자들에게 엄하다.

“난 너희들을 보리 밟듯이 꾹꾹 밟아줄 것이다. 그래야 웃자라지 않는다.”
겨울 보리처럼 단단히 다지며 맺은 석·박사 제자들이 150명이 넘는다. 박사 학위 받은 제자가 22명, 석사 학위를 받은 제자는 70명이 웃돈다. 그런 제자들 덕분에 ‘동국우수교원상’도 받았다. 학부학생들 덕분에 ‘우수교수상’도 받았다. 20대에 동국대와 처음 인연을 맺은 후 연구년 외에는 학교를 떠나 본적 없이 매진한 결과다.

▲ “정년퇴임 전에 정리 좀 하느라 어수선하다”며 연구실 책상 앞에 앉은 해주 스님.

비구니 최초 대학 교수 임용
여성학과 불교의 만남 이끌어
“여성신학 필수인 타종교 비해
불교여성학 연구 미진 아쉬워“

“잘못 지적해야 좋은 연구 나와”
엄한 스승 석·박사 제자 150여명
“교수의 역할은 교육·연구·봉사
퇴임 후엔 경학도량 열고 싶다”

1990년에 화엄학 전공으로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되었다. 한국 불교 역사상 첫 비구니교수였다. 대학 강단에 강사로 처음 선 것은 그보다 4년 전, 첫 강좌는 ‘불교여성학’이었다. 학계에서는 신학대학의 ‘여성신학’과 아울러 여성학이 급부상하고 있었다. 한국여성학회에 참여하며 시대의 흐름을 읽었다. 때마침 불교학과에 새로운 강좌 개설이 논의됐다. ‘불교여성학’을 제안하고 강의까지 맡았다. 불모지에 발을 들였다. 두 시간 강의를 위해 일주일씩 수업준비를 했다.
수강생 중에는 비구스님들과 재가자들도 많았다. 수업에 대한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남녀평등을 부처님의 평등정신에 입각해 접근하는 것에 대한 호응이 높았다. 비구스님들조차도 부당에게 차별받았던 여성문제를 돌아보는 기회로 여기기도 했다.

해주 스님은 지도교수였던 홍정식 교수님의 고희기념으로 발간된 ‘한국불교학(한국불교학회 刊, 1986년)’에 ‘비구니교단의 성립에 대한 고찰-비구니 팔경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비구니 팔경계가 불멸 후 500년경 교단의 약화를 염려한 부파 교단의 보수적 세력들에 의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산사에서는 별반 느끼지 못했던 문제들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는 현실로 부딪쳤다. 무엇보다 비구와 비구니에 대한 차별은 부처님의 평등정신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결과였다.

▲특별히 여성 문제에 관심이 있었나.
“동국대에 있다 보니 비구·비구니, 출·재가, 교학·수행의 문제 등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출가자로서 비구니로서 정체성에 대한 성찰도 없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문제를 화엄의 입장에서 재해석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전국비구니회의 일원으로서 비구니 직능대표로 제11대, 12대 종회의원이었을 때는 전국비구니의 참종권 문제로 중지를 모아 관철시키려 노력해 보기도 하였다.”
▲강좌가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승가학과에서 선학과로 바뀌며 불교여성학 강좌가 없어졌다. 지금은 교양분야에 다른 이름으로 개설돼 있다. 당시 전국의 신학대학에는 여성신학이 필수과목으로 개설되었는데, 우리는 필요 없다고 없애버렸던 것이다. 아직까지 남녀문제, 비구·비구니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분야의 연구가 지속됐다면 지금쯤 깊이 있는 연구 성과들이 도출됐을 것이다.”
▲1980년대는 유독 여성불교운동이 활발했다.
“1985년 당시 이화여대 총장을 학회장으로 한국여성학회가 발족했다. 그 세미나의 첫 주제가 ‘종교의 여성관’이었다. 여성학이라는 분야가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법학, 신학, 사회학 등 각 분야 전공자들이 여성학을 접목하는 시기였다. 불교계에도 이런 분위기가 전해졌다.”
▲2006년 발표한 ‘한국 근현대 비구니의 수행’에서 ‘화엄경’이 한국 비구니스님들의 이상과 수행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했다. 유독 ‘화엄경’을 지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화엄경’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아니다. 비구니스님들이 그 내용에 더욱 크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소외되거나 차별된 이들, 응당 자신들이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한 이들에게 화엄의 평등정신은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같은 양의 비가 내려도 가물었던 땅에 내린 비가 더 감로수처럼 여겨지는 이치다.”

여성, 비구니의 목소리를 대변하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80년대 비구니계가 보여준 변혁의 움직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해주 스님 법명도 빠지지 않는다. 불교여성학이 더욱 깊이 발전하지 못한 부분은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여성문제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평생 화엄의 외길을 걸어왔다. 그 과정에서 불교학 발전을 위한 노력도 남달랐다.

2000년 창립한 불교학연구회에는 매 발표회 때마다 200여명이 모였다. 발표회장에서는 매번 격론이 벌어졌다. 해주 스님은 “각 주제마다 긴장 속에서도 활기찬 토론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그런 발표회가 1년에 열 번씩이나 열렸다. 불교핵심용어에 대한 공유와 함께 젊은 학자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전국의 교수들이 학회에 참여 하게 되면 지도제자들도 한둘 이상 학회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철저한 준비과정과 치열한 토론,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는 더 없는 공부였다.

그 힘과 열기가 원동력이 되어 한국불교학결집대회로 이어져다. 제1차, 2차 결집대회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각 학회의 개성, 다양성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대회가 되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그때 함께 했던 교수, 간사, 제자들, 도와준 어른 스님 등 많은 분들의 고생이 너무 많았다”며 그들에 대한 고마움은 꼭 전해달라 당부한다. 묵직한 진심이 묻어난다.

▲승가대학은 수행자, 선지식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말을 한다. 상대적으로 대학은 출가자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종종 평가절하 되기도 한다.
“학인들에게 ‘요처(譊處) 공부가 정처(靜處) 공부보다 더 수승하다’고 말한다. 승가대학은 수행자의 기본을 가르친다. 거기서 기본기를 익히고 더 공부할 뜻이 있다면 대학이나 대학원에 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지방승가대학이나 중앙승가대학, 동국대 등이 다 같은 기본교육기관으로 규정돼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든 같은 기본기를 익히도록 해줘야 한다. 게다가 요처에서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굳이 대학을 선택한 보람이 있도록 더 많은 것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논문이다. 특히 대학원에 진학했을 경우 논문 작성을 통해서 더 깊이 있게 글을 보는 안목을 일찍부터 기를 수 있다는 것이 대학의 이점이다. 재가자들과 어울려 공부하면서 다양한 입장, 출가·재가자들의 견해 차이를 일찍 접해서 조화롭고 화합하는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기도 하다. 비구·비구니, 남녀, 출가재가, 세간출세간의 문제가 결국은 화엄바다에서 전부 한 짠맛이다.”

동국대, 중앙승가대학, 자방승가대학의 강단에 모두 섰다. 나름의 장단점도 느껴보았다. 학인시절을 지나 동학사승가대학 학장으로, 중앙승가대 사감으로, 동국대 교수로 학생들과 살아온 세월이 40여년이다. 오는 8월 그 긴 여정에 쉼표를 하나 찍는다. 정년퇴임이다.

▲ 해주 스님은 2007년 지관(오른쪽) 스님에게 전강받았다. 그 강맥을 잇는 것이 스님에게 남은 또 하나의 과제다.
퇴임 후에도 경학을 통한 수행과 석·박사 과정에 남아있는 제자들에 대한 논문 지도는 계속 남아있는 소임이다. 오래도록 품어왔던 경학도량 설립 원력도 있다. 경학자가 평생 경을 공부하며 수행으로 삼을 수 있는 경학도량을 만드는 것이다. 2008년 동학사승가대학장 소임을 맡아서는 학림을 만드는 정도로 끝을 맺었지만, 퇴임 후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평생경학도량을 구상할 계획이다. 반드시 내가 아니어도 된다. 누군가 원력을 이어가도 좋다. 그동안 돌아보지 못한 상좌들하고도 시간을 보내야겠고, 수미정사 불사로 맺은 인연들과도 자주 만나려고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숙제는 2007년 지관 스님으로부터 받은 강맥을 잇는 전강이다. 무척이나 늦은 전강이었다. 동국대 재학 중에 법보강원에서 지관 스님에게 강원교재를 재독했다. 졸업장을 주시며 지관 스님이 물었다. “해주는 호경 노스님에게 전강 받을 거지?” 전강제자 삼고 싶다는 속뜻을 반대로 꺼내 보인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해주 스님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선방에 갈 생각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1987년 호경 스님 원적 이후 오래도록 전강은 잊고 지냈다. 하지만 2007년 동학사승가대학장 소임을 맡으며 지관 스님에게서 전강을 받았다. 그날 조계종 총무원장실에서 손수 쓰신 전강송을 주시며 환하게 웃던 지관 스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스스로는 어떤 교수였다고 생각하나.
“교수의 역할은 교육·연구·봉사라고 생각한다. 세 가지 다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삼세 인연으로 만난 학생들을 아끼고 학생들과 더불어 공부하며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했다고 생각한다. 학문과 공적인 부분에서는 엄격하게 지도했다. 예로 아파서 병원에 간 환자에게 의사는 잘못된 점, 아픈 곳을 살핀다. 배가 아파 병원에 갔는데 ‘팔은 괜찮다’라고 할 필요가 없다. 칭찬보다 더 보완해야 할 점을 많이 요청한 것 같다. 칭찬할 만한 게 없어서가 결코 아니다. 그런가하면 지도교수가 방목한다는 말들도 한다. 방임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억지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후학들이 더욱 힘써 주길 바라는 연구 분야가 있다면.
“부처님 근본정신에 맞는다면 어떤 부분이라도 좋지만 불교사나 사상사를 여성의 입장에서 재조명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화엄학과 마음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실천수행과 병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전하다.”
▲여성의 눈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여성의 관점이라는 것이 남성 관점과의 대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부처님의 평등 정신, 그리고 소외된 계층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여성, 소외된 계층의 눈으로 부당한 것은 없는지, 편견은 없는지를 살펴보자는 의미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부처님의 평등정신, 모든 사회 계층을 깨달음으로 이끌어주었던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이다. 여성의 눈은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모든 존재의 눈을 내 눈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곧 관세음보살의 천안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곧 화엄의 눈이다.”
▲그것이 한국불교와 현대사회에서 화엄의 역할인가.
“현대사회에서 화엄의 가장 큰 역할은 갈등의 화해라고 본다. 남녀, 노소 문제를 포함해서 사회 문제의 해결은 각자 알맞은 역할의 증대에서 찾아야 한다. 대승의 수행은 공덕을 증장시켜 가는 것이다. 화엄세계에서 모두가 예부터 부처이다. 내 몸과 마음이 법신 그 자체임을 본다면, 스스로 지극히 자중하는 삶이 될 수 있다. ‘일체유심조’이다. 모든 것은 부처님 마음인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 법 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듯 처음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 어디라도 상관없지요. 내 본래 모습 그대로, 부처님 마음 그대로 살면 되니까요. 더 이상 특별한 것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다만 할 일을 할 뿐이죠.”
책 속에서 만난 그 ‘경이로운 마음’을 찾느라 먼 길을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경학을 통한 수행의 길, 누군가는 ‘없는 길’이라 했고 누군가는 ‘옳지 않은 길’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은 것은 그 길에 언제나 부처님이 동행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정표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흔들리지도, 두리번거리지도 않는다. 고통바다인줄 알았는데 화엄대해였다. 작은 바위인줄 알았는데 수미산이었다. 지금 있는 이곳이다. 먼 길 떠난 선재동자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다. 화엄의 바다에 솟은 수미산이다.

 

▲ 지난 5월1일 해주 스님의 제자들 일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교수로서 맞는 해주 스님의 마지막 스승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제자들의 모습에서 스승을 향한 존경심이 엿보이다.

제자 지도엔 엄격…사석에선 다정다감
내가 본 해주 스님

정영근 서울산업대 교수=불교학연구회의 창립부터 지금까지 불교학의 영역에서 함께 일하며 스님의 순수한 열정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진솔함이 불교학연구회의 창립부터 한국불교학결집대회까지 그 험난한 과정을 지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는 리더십도 큰 힘이 됐다. 언제나 상대의 의견을 끝까지 듣고 존중하기 때문에 토론과 타협을 통해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화엄학을 하는 학자의 학문적 깊이 뿐 아니라 그것이 체득된 모습이다. 하지만 옳지 않은 길이라고 판단될 때는 결코 타협하거나 영합하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물론 학자로서의 자부심과 학문에 대한 견해는 누구보다 높고 투철하다. 15년 넘도록 변함없는 모습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

석길암 동국대 교수=논문, 학회 활동, 제자 지도 등 공적인 부분에서는 바늘 끝만큼도 틈이 없다. 하지만 사적인 만남이나 대화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같이 느껴질 정도다. 요즘엔 그런 분명한 구분이 조금은 무뎌진 듯도 하다. 아마 많은 제자들이 스님을 너무 ‘괴롭혔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 죄송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사찰에 찾아가면 무엇이든 챙겨주고 애쓰시는 모습이 마치 시골 고향집 부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스님 스스로의 일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빈틈없이 잘 꾸려나가시니 걱정할 것이 없지만 퇴임 후에는 제자들에게 시달리느라 전념하지 못하셨던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다.

박사과정수료 제자 석도 스님=06학번으로 처음 동국대에 입학한 직후부터 연구실서 조교로 일했다. 많은 사람들이 해주 스님에 대해 엄격하고, 심지어는 무섭다고도 하지만 만약 스님에게 그런 면만 있었다면 그렇게 오래 스님 곁에서 조교로 있을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다정다감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울면서 연구실에 들어왔던 이가 웃으면서 나갈 수 있게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꼼꼼한 성격이지만 털털한 면도 있다. 논문 쓸 때나 학생들을 지도할 때는 무척 꼼꼼하다. 하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는 털털한 편이다. 예의나 격식을 지나치게 따지기 보다는 상대방이 편하도록 많이 배려한다. 조교 공부에 방해될까 싶어 연구실을 비워주기도 한다. “평생 수행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을 논문주제로 삼으라”는 말씀에서는 수행과 공부가 둘이 아닌,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애쓰는 수행자의 면모를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스님께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누가 좀 와달라고 부탁해도 가끔씩은 건강을 생각해서 한 번 쯤은 거절도 하셨으면 좋겠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353호 / 2016년 7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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