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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중요한 것은 도성제

기자명 김정빈

도성제에 소극적인 대승경전들

지난주 ‘반야심경’을 ‘틀로서의 사성제’에 담아 고성제·멸성제·집성제라는 각 항목에 배당해 보았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도성제인데, ‘반야심경’의 도성제를 논하기 전에 대승불교 경전이 도성제 문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경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대승 경전 멸성제 중시하고
초기 경전은 도성제 중시해
경전대한 믿음과 수지독송은
취약한 도성제에 대한 대응법

대승불교 경전은 도성제를 제시하는데 있어 소극적이다. 필자의 이 견해를 반박하는 분이 있다면 나는 그분에게 묻고 싶다. “대승불교 경전을 대표하는 3대 경전인 ‘화엄경’ ‘금강경’ ‘법화경’이 설하는 도성제는 무엇인가?”이에 대한 대답을 현재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실제 상황에서 찾아보자. ‘화엄경’은 ‘법계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수행법으로 삼는 이들이 많고 ‘금강경’은 ‘수지독송’을 수행법으로 삼는 이들이 많으며 ‘법화경’은 ‘부처님의 생명이 영원함을 믿는 것’으로써 수행법을 삼는 이들이 많다.

이를 초기불교를 전하는 아함경·팔리경이 전하는 수행법과 비교해봄으로써 우리는 둘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은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 등 일곱 가지로 설해져 있고, 그것을 대표하는 수행법은 팔정도이며,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으로 잘 분별되어 있어서 차근차근 구체적으로 수행하여 완결할 수 있다.

그에 비해 ‘화엄경’이 설하는 ‘법계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는 팔정도의 정견·정사(혜학)에 해당될 뿐이어서 팔정도가 제시하는 나머지 여섯 항목(계학·정학)이 빠져 있다. 이에 대해 대승불교는 본래 육바라밀을 수행법으로 제시하고 있고 ‘화엄경’ 또한 이에 준거하고 있으며, 육바라밀에는 지계(계학)와 선정(정학)이라는 항목이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그것은 그렇다. 그런데 지계와 선정 중 정말로 중요한 항목은 선정이다. 지계는 선정을 얻기 위한 기초로서의 역할을 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화엄경’이 어떤 선정법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해인삼매에 들어 계셨다고 설한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인삼매에 들어가셨는지, 우리가 해인삼매에 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설하지 않는다. ‘화엄경’에서 선재동자는 53선지식을 찾아가 법에 대해 묻는다. 그렇지만 그중 어느 선지식도 선정에 들려면 어떻게 앉아서, 어떻게 수행 주제를 챙길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하지는 않는다.

‘화엄경’은 설법의 대부분을 멸성제에 배당하고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볼 때 법계가 중중무진(重重無盡)하기 그지없다고, 또는 부처님의 경지는 심오하기가 불가사의하다고 설하시는 것이 ‘화엄경’의 주된 내용인 것이다.

이는 ‘금강경’도 마찬가지이다. ‘금강경’ 또한 보살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수행하는지를, 즉 아직 보살이 아닌 보통 사람의 경계가 아니라 공(空)에 통달하여 높은 차원에 도달한 보살의 경계를 설하는 데 거의 모든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그렇지만 보살이 아닌 보통의 불제자에게 중요한 것은 공에 통달한 보살의 마음가짐이 어떠한지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멸성제)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보살처럼 공에 통달할 수 있는지(도성제)를 알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은 이 입장에서 수행법의 핵심으로서 염(念, sati)을 제시한다. 초기불교는 염을 잘 수행하면 정(定, samadhi)이 일어나고, 정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시된 초기불교의 염은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승불교 경전에서 염은 중시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우리나라 불제자들은 나름의 염법(念法)을 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법화경’을 바탕으로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고취함’으로써 ‘금강경’ ‘법화경’행자는 팔정도의 정념에 해당되는 자신 나름의 염법을 수행하는 셈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53호 / 2016년 7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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