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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중국과 대만 양안 왕래기-상

“빈승은 대만사람인가? 중국사람인가? 저는 지구인입니다”

▲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4년 중국공산당 총서기 신분으로 롄잔(連戰) 대만 국민당 명예주석 일행과 베이징 국빈관에서 회담을 가졌다. 시 주석은 회담에 참석한 성운대사에게 “대사가 내게 준 책을 전부 다 읽었다”고 말했다.    대만 불광산 제공

“대만 사람들은 저를 ‘본토사람’이라고 하고 중국대륙 고향에서 친척들을 만났는데 헤어진 지 수십 년이 된 고향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대만에서 온 스님”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디 사람일까요? 할 수 없이 빈승은 스스로를 조소하듯 “저는 ‘지구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빈부란 단지 금전과 물질적으로 따지는 계산이 아닙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이바지에 대해서도 마음을 내야 합니다.

빈승이 어린이였을 때로 기억하는데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너는 어디 사는 아이니?”라고 물으면 저는 “만복신촌입니다”라고 대답했었는데 부모님께서 사시던 집이 ‘만복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양주에 있을 때 “어디 출신이세요?”라고 누군가 물으면 저는 “선녀진(鎭 : 읍에 해당. 역자 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출가한 이후 빈승이 남경에 있을 때에는 “어디 사람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자주 있었는데 “저는 양주 강도(江都)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다른 지역에 갈 인연이 있을 때 사람들이 빈승에게 “어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마다 “저는 강소성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40~50년 전 빈승이 세계를 다니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한국인 혹은 일본인으로 여기고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라고 물으면 저는 “제 조국은 중국입니다. 중국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빈승이 60년 넘게 대만에서 살았지만 대만 사람들은 저를 ‘본토사람’이라고 하고 중국대륙 고향에서 친척들을 만났는데 헤어진 지 수십 년이 된 고향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대만에서 온 스님”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디 사람일까요? 할 수 없이 빈승은 스스로를 조소하듯 “저는 ‘지구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빈승이 ‘지구인’을 자처하고 나서부터 세계를 여행할 때 해외로 이민을 온 수많은 중국인들이 “자신은 어디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신세를 한탄하다가 이후에는 저를 따라서 그들도 “지구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인연이 있는 친구는 서로 간에 경계가 없습니다. 중국대륙과 대만 간에 왕래를 시작한 이후 약간의 오해로 인해 빈승은 약 10년 정도 중국을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이후 전국정협 이서환(李瑞環) 주석과 중국불교협회 조박초 회장 등 두 분께서 저의 오해를 풀어주어 저는 다시 중국대륙에서 친지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일에 대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중국 본토와 대만 양쪽을 마음대로 왕래하면서 양쪽의 민중과 불자들을 만나고 있는데 서로의 언어, 음식, 문화에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정당에서는 제가 대만에 불광산을 세웠으니 저를 국민당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후에는 제가 대만 남부에 절을 세웠고 여진월영(余陳月瑛 : 민진당 소속 정치인, 가오슝계 좌장으로 가오슝현 현장을 역임. 역자 주) 계파와 양추흥(楊秋興 : 국민당 소속 정치인으로 가오슝 현장을 역임했고 진국과의 가오슝 시장 경선에서 패배. 역자 주), 진국(陳菊 : 민진당 소속 정치인으로 현 가오슝 시장. 역자 주) 등 지역 정치인들과도 사이가 좋으니 그들은 또 저를 민진당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현재 빈승이 대륙을 자주 다니니까 많은 사람들이 또 저를 공산당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 알거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좋아하는 친한 친구라고 빈승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빈승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지역 관념도 없고 무슨 종족의 구분도 없으며 다 같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사람으로서 누구나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인데 따지고 구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빈승이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지 않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설사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대만에서는 빈승이 일체의 돈을 중국대륙으로 가져간다고 대만 사람들은 말하곤 합니다. 중국본토에 가면 그곳 사람들은 저를 대륙사람이 아닌 대만사람으로 봅니다. 심지어 제가 일체의 돈을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져가거나 일본으로 가져간다고 의심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진심으로 말씀 드리면 빈승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돈이 없습니다. 빈승은 일생동안 돈을 저축하지 않아 통장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무슨 돈을 어디로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본토화를 주장하는데 땅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에 재물이 생겨나며 재물은 지구상의 어느 곳으로든 흩어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두루 좋은 인연을 맺는다면 돈이 없을까 걱정할 일이 있을까 되묻곤 합니다.

빈승의 고향은 강소성 강도 ‘만복신촌’으로, 1989년 고향을 방문해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들 저를 보고 금의환향했다고 하지만 계산해보니 실제로는 가족들에게 미화 3000달러를 주어 살고 있는 집을 수리하게 해 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와 별도로 강도농아학교를 짓도록 인민폐 500만 위안을 기증하도록 불광회 자용 스님을 격려하였고 선녀묘(仙女廟)를 복원하도록 소벽하를 격려해 지역 정부에 미화 10만 달러를 내놓게 했는데 지금껏 선녀묘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후 저 자신도 인민폐 100만 위안을 모교라고 할 수 있는 서하산에 기증해 그 옛날 이곳에서 공부하였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했습니다.

2003년 같은 고향 출신이신 감진(鑑眞) 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신 1225년 기념 행사에 빈승이 참석했습니다. 이전에 국제적인 불교대학을 짓자고 중국불교협회 조박초 회장께서 제안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현대적인 도서관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당시 회의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감진 대사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빈승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고향에 감진도서관을 지어 기증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005년 정초공사를 시작으로 불광산에서 파견한 자혜 스님이 중국 대륙을 10여 차례나 다니면서 지금의 감진도서관이 지어졌는데 2008년 완공된 이후 양주의 문화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이 도서관에서는 2주에 한번씩 ‘양주강단’을 거행하고 있는데 처음 시작하여 7~8년 이래로 끊긴 적이 없었습니다. 역중천(易中天), 마서방(馬瑞芳), 고희균(高希均), 우단(于丹), 전문충(錢文忠), 임청현(林清玄), 여추우(余秋雨), 염숭년(閻崇年), 막언(莫言), 여광중(余光中) 등 양안 인사들을 초빙해 강연을 했고 매번 1000명 이상의 청중이 모이고 있습니다. 현재 이 도서관은 20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서기 사정의, 시장 주민양 등 많은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빈승에게는 고향색이 많지 않았지만 이러한 인연으로 흔히들 말하는 고향 어르신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드리는 것이고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수십 년 이래로 출가하고 나서 양안이 분리되면서 빈승은 노모에 대해 효도하고 봉양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이후 모친 양육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미화 5만 달러를 들여 남경에 거처를 한군데 사서 ‘우화정사(雨花精舍)’라고 이름하고 모친이 그곳에서 지내실 수 있도록 사람을 시켜서 돌봐드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모친은 당신을 찾아뵙는 심평, 자혜, 자장, 자용 등 스님들에게 항상 “이곳은 불광산 남경포교당’이니 주지나 소임자를 파견하도록 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친께서 95세 고령으로 미국에서 돌아가신 후 ‘우화정사’는 정말 불광산의 중국에 있는 말사가 되었고 많은 제자들이 남경을 거쳐 가면 다들 그 곳에서 머물렀는데 현재 묘림(妙霖) 스님이 돌보고 있습니다. 남경의 각계 인사와 성장과 서기, 시장을 포함한 일부 당정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져 주어서 그 조그만 정사에서 같이 국수를 끓여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와 고향의 좋은 인연인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남경대학의 요청으로 여러 번 강연을 했었고 총장, 교수, 서기 등 모두가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후 분교를 세운다고 하기에 각계 인사들의 찬조를 받고 저도 수희 동참해 ‘불광’이라는 이름의 건물을 한 채 지어서 기증했습니다. 중국대륙에도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 빈승의 의도입니다.

몇 년 전 홍콩불교협회 진한빈(陳漢斌) 회장 부부가 상해에 사두었던 집 두채를 불광산에 기증하였습니다. 빈승이 상해에 있으면 일부 정치계 친구들은 종교와 왕래를 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까 우려해 우리들을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2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가 오래 알고 지내게 되자 종교국장, 대만 업무주임 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작은 집에 모여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피차간의 수많은 오해와 거리를 없앴습니다.

현재 이런 작은 집들이 제자들과 현지 신도들의 발심으로 확장해 이미 하나의 건물이 되었고 불광산의 문화교육센터가 되고 저의 공익 기금회 상해사무처로서 만련(滿蓮) 스님이 주지로 있습니다. 빈승은 비록 자주 가지는 않지만 그 곳의 신도 대중들이 불법 속에서 인간불교의 법락을 누리고 있다는 찬탄과 소식을 들으면 빈승에게 많은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상해와 동시에 최근 북경 통주(通州)에도 ‘광중(光中)문화관’을 설립하였는데 친자교육, 예술문화전시, 중화문화 선양으로써 많은 인연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현재는 혜관(慧寬), 혜득(慧得) 스님이 그곳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53호 / 2016년 7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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