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진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등산(無等山)은 명산이다. 빛고을 사람들이라면 ‘한 해 다섯 번은 오른다’는 산. 그렇다고 광주 사람들만의 산은 아니다. 산은 광주, 화순, 담양 세 지역에 걸쳐 있다.
빛고을 무등산은 ‘차별 없는 산’
상서로운 돌들이 꼿꼿하게 줄선
서석대는 한국 주상절리의 대표
서석대서 이어진 돌길 장불재는
서석대·입석대·승천암까지 지나
거침없이 쭉 내려서는 고개마루
평평한 돌에 움푹 파인 돌구멍
옛 암자 떠받친 기둥 있던 흔적
‘삼국사기’에서 무등산은 ‘무진악(武珍岳)’으로 등장한다. 신라의 신문왕은 백제를 평정한 직후(686) 이 땅을 무진주(武珍州)라 했다. 그에 따라 이 산도 큰 산이란 뜻의 ‘악(岳)’을 붙여 ‘무진악’이라 했을 터. 그렇다면 ‘무진’은?
한국어 음성학 연구의 선구자였던 고(故) 김선기 선생에 따르면 ‘무진’은 ‘무돌’의 이두 음으로 쓰였다고 한다. ‘무진(武珍)’이라 쓰고 ‘무돌’로 읽은 것이다. ‘무돌’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고 한다. ‘무진악’을 직역하면 ‘일곱 색깔 무지개 빛을 뿜는 돌이 있는(가득한) 산’이다. 예사롭지 않은 땅 위에 선 범상치 않은 산이다.
‘무진악’은 고려로 넘어오며 ‘무등산’이란 이름을 얻었던 듯싶다. 조선 초에 정리된 고려 시대의 역사서 ‘고려사(高麗史)’ 기록을 보자.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이다. 광주는 전라도에 있는 큰 고을이다. 이 산에 성을 쌓으니 사람들이 의지하여 편안해지자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노래란 ‘무등산가(無等山歌)’를 이른다. 백제, 고구려, 신라 3국의 전쟁이 잦던 삼국시대 백제의 빛고을 백성들은 ‘무등산가’를 부르며 전란의 고통을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무등산이 광주의 아픔을 달래 주기 시작한 건 저 백제 때부터라 하겠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무등산곡(無等山曲)’이 등장한다. 무등산가와 무등산곡이 같은 노래일 가능성이 높은데 아쉽게도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국문학계에서는 무등산가를 백제 노래로 보고 있고, 무등산곡 또한 백제 노래임을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확실하게 밝혀놓고 있다.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전거로 삼는다면 저 큰 산은 무진악 이전에 이미 무등산이라 불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신문왕 이전엔 무등산이요, 신문왕 이후엔 무진악으로 불렸다가 고려로 들어선 후 다시 무등산으로 불렸다는 설이 성립된다.
빛고을 사람들 가슴에 무등산은 ‘차별 없는 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산 이름의 무등(無等)이 ‘반야심경’의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의상봉을 마주하고 있는 원효사를 기점으로 시작된 무등산 옛길 2구간이 끝나는 지점에 한국의 주상절리를 대표하는 서석대(瑞石臺)가 서 있다.
상서로운 돌들은 해발 1100m에서 최고봉인 천왕봉(1187m)을 향해 꼿꼿하게 줄 서 있다. 이 풍광을 본 조선 문인들은 “선비가 홀을 잡고 읍을 하는 듯하고, 조정에 앉아 왕의 명을 받드는 충신의 모습”이라고 했다. 자신 또한 충절의 선비라 자부 했을 터다. 천왕봉 가는 길목 그러니까 지왕봉과 인왕봉에도 상서로운 돌들이 반듯하게 무더기로 서 있다. 그 반대 길, 서석대와 유사한 입석대로 내려오는 길목에도 꼿꼿한 돌들이 산에서 노니는 나그네들을 지켜보고 있다. 무등산이 한 때 서석산(瑞石山)으로도 불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등산 유산기라 할 수 있는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긴 고경명은 이 풍광을 실감나게 풀었다. “가까이 보면 겹겹이 막힌 요새와 철옹성에 무장한 병사 일만 명을 나열한 듯 하다. 세속을 초월한 선비가 군중을 떠나 홀로 가는 듯하다.”
다산 정약용도 이 산을 오르고는 ‘등서석산(登瑞石山)’이란 시를 남겼다.
“서석산 뭇사람이 우러러 보매(서석중소앙 瑞石衆所仰)/ 높이 솟은 곳엔 해묵은 눈 덮여 있네(수의유고설 厜㕒有古雪)/ 태고적 모습 고치지 않고 (부개혼돈형 不改渾沌形)/ 본래 쌓인 그대로 우뚝하다 (진적치준찰 眞積致峻巀)/ 산마다 섬세하고 기교한 모양 (제산빙섬교 諸山騁纖巧)/ 깎고 새겨 뼈마디 드러났네 (각삭노골절 刻削露骨節)/ 오를 때는 길 없어 까마득하더니 (장등막무계 將登邈無階)/ 멀리 오자 낮게 느껴지네 (급원지비열 及遠知卑列)……”
서석대나 입석대의 돌기둥 하나하나를 보면 돌과 돌이 위 아래로 만난 듯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다산은 이 서석에서 혼돈(渾沌) 즉 태고(太古)를 보았다. ‘순수의 시대’ ‘진실의 시대’를 갈구했기에 나온 시 한 수가 아닐까?
서석대서 장불재 쉼터로 이어진 길은 거의 돌길인데 ‘장불재’라고 한다. 천왕봉에서 남서쪽으로 서석대와 입석대, 승천암을 지나 거침없이 쭉 내려선 고개마루다. 한자로는 장불령(長佛嶺).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장불치(獐佛峙)로 기록돼 있다. 노루의 목처럼 길게 난 골을 가리킬 때 노루 장(獐)을 쓴다. 산마다 어김없이 있다는 노루목을 연상하면 되겠다. ‘치(峙)’는 고개나 재를 말한다. 노루골과 고개 사이에 ‘부처’가 있다. 장불치! 부처님이 현현한 노루의 목처럼 길게 난 고갯길이라 풀면 될까! 장불재와 장불치가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 길에서 평평한 돌에 둥그렇게 움푹 파인 돌구멍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눈에 보아도 기둥이 서 있던 흔적임이 분명하다. 돌에 판 주근공(柱根孔)이라 해야 할까? 가을이면 억새장관을 빚어내는 이 일대에 작은 암자들이 있었던 듯싶다. 그게 아니더라도 영험 높은 절, 이를테면 장불사(長佛寺) 이름의 사찰 하나라도 서 있었을 게 분명하다. 하늘로 향해 쭉 뻗은 바위 승천암(昇天巖)에 얽힌 전설 한 토막이 있다.
산양 한 마리가 황급히 암자로 뛰어 들었다. 무엇엔가 쫓기고 있던 게 분명하다. 이를 지켜 본 스님은 산양을 숨겨 주었다. 꿈에 이무기가 나타났다. “산양을 먹고 하늘로 올라가야 했는데 스님이 훼방을 놓았습니다. 종소리가 울리지 않는다면 스님을 희생양 삼아 승천할 것입니다.” 꿈 속 이무기의 엄포였지만 마음에 걸렸다. 그 때, 우렁찬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무기는 그 즉시 스님을 풀어주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저 돌구멍에 장불사를 떠받친 기둥이 세워졌던 건 아닐까? 산양이 숨어 들었던 그 암자가 그려진다. 또 하나. 서석대! 불심 깊은 사람들은 상서로운 저 돌기둥 하나하나를 미륵불로 보았더랬다. ‘천지인’으로 이름 한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을 두고도 누군가는 지왕봉을 비로봉으로, 인왕봉을 반야봉으로 부르곤 했다.
차별 없는 산 무등산은 불산(佛山)이다!
장불재 쉼터로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어온다. 청량하기 그지없다. 오던 길 뒤돌아 가면 원효사요, 오른쪽으로 걸음하면 규봉암이고, 왼쪽으로 틀면 증심사다. 저 장불재는 화두를 마주한 선사처럼 꼿꼿하게 앉아 1400년의 역사를 안은 세 절을 잇고 있다.
청량풍 어디서 일었나 살폈더니 비경을 안고 있다는 규봉암 쪽이다. 그 길로 들어서야겠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무등산 국립공원 사무소. 800m 오르막길을 오르면 원효사다. 원효사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가면 군사작전 도로다. 여기서 중봉 갈림길까지는 약 5Km로 경사는 완만하다. 무등산 줄기와 광주 시내를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중봉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여유가 있다면 중봉으로 난 400m 구간의 데크로를 걸어보기를 권한다. 산 속의 깊은 맛을 느끼고 싶다면 원효사 아래서 시작하는 ‘무등산 옛길’구간 길을 택하는 게 좋다. 서석대와 입석대, 장불재로 이어지는 길에서 보는 풍광은 일품이다. 무등산 최고봉인 천왕봉은 군사시설이 있어 오를 수 없다. 원효사서 장불재까지 4시간이면 충분하다.
이것만은 꼭!
[1354호 / 2016년 8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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