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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종 종정 혜초 스님 하안거 해제법어

  • 교계
  • 입력 2016.08.1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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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마음은 항상 두루 비추고 있다”

어느덧 병신년 하안거를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안거동안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증득하여 자기 스스로 깨침의 철학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해제가 되면 “본분사(本來事)를 무사히 해결하였는가?”고 묻곤 합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도 적공(積功)의 노력으로 윤회(輪廻)의 문제를 해결하여 생사해탈의 경지를 얻게 된 것입니다. 불교는 윤회의 주체로서 영속하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데(無我緣起), ‘잡아함경’의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 이것을 “업과 과보는 있지만, 업을 짓는 그 놈은 없다(有業報而無作者)”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윤회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업의 요소인 만물만상(萬物萬象)의 근원을 공(空)으로 지각하는 것처럼, 과학에서는 이 업을 에너지로 인지하고 있는데, 물리학자 프랑크는 우주 에너지인 극미입자(極微粒子)를 수량적으로 표시하여(常數 ℎ), 현대과학으로 불교의 공(空)을 실증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과학 없는 종교는 맹인이요,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고 하였는데, 절대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와 가상·증강현실(假想·增强現實)에서 나아가 혼합현실의 세계로까지 접근한 현대과학은 시간·공간 등 모든 물리법칙이 붕괴되어 내재성(內在性)의 혼연일체가 일어나는 특이점(特異點)에서는 그 어떤 인과적(因果的)인 상관관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하안거 해제 대중은 의식과 이성에 의지하는 언어·과학적 사고와 언어도단(言語道斷)과 무의식인 아뢰야식에 의지하는 불교적 사고를 모두 다 내려놓고, 실체가 없는 그 놈이 무엇인가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쉼 없는 정진으로 조용히 돌이켜 살펴보기만(廻光返照) 하기를 바랍니다.
此本源淸淨心(차본원청정심) 근본바탕인 청정한 마음은
常自圓明編照(상자원명편조) 항상 스스로 둥글고 밝아서 두루 비추고 있는데,
世人不悟袛認(세인불오저인)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見聞覺知爲心(견문각지위심) 보고 듣고 분별하고 아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서
見聞覺知所覆(견문각지소복) 그 것으로 덮어 씌워 있기 때문에
不視精明本體(불시정명본체) 밝고 오롯한 본체를 보지 못하는 도다.

[1356호 / 2016년 8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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