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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북송 초 대관산수화의 미학

기자명 명법 스님

밖에서 보고 안에서 보고 안에서 밖을 보는 삼원 통해 자연 체득

▲ 곽희(郭熙) 조춘도(早春圖) 북송(北宋).

‘청명상하도(晴明上河圖)’에 묘사된 북송문화의 생동감 넘치는 기운은 곽희(郭熙, 1020?~1100?)의 ‘조춘도(早春圖)’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은 북송 초의 진취적인 기상이 반영되어 있는데, 꿈틀거리며 용솟음치는 산의 기세와 언 땅을 뚫고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이른 봄 약동하는 생명의 기상과 청명하고 맑은 기운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곽희 ‘조춘도’ 성리학적 해석
역사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

유가적 관점 일부 인정해도
산수구성 방식 ‘장자’에 근거

평원과 고원, 심원의 삼원은
그림 화면을 무한으로 연장

곽희 산수화, 장자사상 구현
북송 후대까지 지속적 영향 

곽희는 자가 순부(淳夫)이며, 관직은 한림대조직장(翰林待詔直長)에 이르렀고 산수화에 뛰어나 오대의 이성(李成, 919~967?)을 스승으로 삼아 대가가 되었으며 북송시대 대표적인 궁정화가로 신종의 총애를 받았다.

곽희의 ‘조춘도’는 범관(范寬)의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 계열을 잇는 대관산수화의 하나로서, 일반적으로 유가적 세계관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된다. 중앙에 우뚝 솟은 주봉과 좌우에 시립한 듯한 군소 봉우리들이 만드는 그림 속의 위계질서는 송대에 확립된 황제의 절대권력과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사대부들의 실제 군신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산수의 경치를 묘사하고 있지만 절대 황권에 대한 찬양이며 ‘충(忠)’이라는 유가적 가치관을 선양하는 정치적 메시지로도 읽히는데, 실제로 곽희가 신종의 총애를 받았던 것을 보면 그러한 해석이 지나치게 비판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비롯한 북송 초의 대관산수화를 송대 신유학적 세계관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단순화라고 생각된다. 송은 신유학이 꽃 피웠던 시대이며 훗날 신유학의 시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신유학이 북송 사상계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북송 말기에 해당하며 훗날 주자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신유학이 사상계의 주류로 떠오르고 과거시험의 표준해석이 된 것은 주희의 활동시기 말기, 그러니까 북송 말에서 남송에 이르던 시기였다. 주자학이 관학으로 확립된 것이 중국 원대라는 점을 상기하면, 북송 초에 그려진 ‘조춘도’를 성리학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보는 관점은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결과이다.

물론 ‘조춘도’에는 유가적 질서가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북송 초 사상계에서 활동한 구양수, 왕안석, 소식 등이 기본적으로 유가 지식인이었으며 북송문화가 당에 비해 강력하게 중국적 전통으로의 복귀, 즉 유가적 가치관으로의 복귀를 추구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유가적 지식만 북송 초 사상계에서 유통된 것은 아니다. 피터 볼(Peter K. Bol)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지적했듯이 북송 초 사상계는 다양한 사조가 허용되고 자신의 안목에 따라 전통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자유가 허용되었던 예외적인 장소였다.

유가를 위주로 하면서도 도가와 불교, 그리고 잡가의 사상들이 모두 국가경영과 지식의 장에서 토의되었던 까닭에 곽희의 그림에서도 유가의 영향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관심을 가졌던 다양한 주제들의 조형적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 조춘도 심원(왼쪽). 조춘도 고원(가운데). 조춘도 평원(오른쪽).

거대한 산을 다양한 시각에 의해 산 밖에서 본 모습(평원)과 안에서 본 모습(고원), 또 안에서 밖을 본 모습(심원)을 총괄하려는 이런 노력은 근본적으로 대상으로서의 산수를 그려내고 그것을 통해 도를 깨닫고 산수에 의탁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화원화가로서 곽희의 회화는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었기 때문에 주봉(主峰)을 중심에 배치하여 직접 주종관계를 나타내고 군주의 위대성을 부각시키는 등 유가적 관념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지만, 자연산수를 구성하는 방식은 오히려 장자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의 삼원법(三遠法)은 시점의 이동을 통해 자연경물을 관찰한 결과를 화면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서 전통적인 산수화 투시법을 총결한 것이다. 곽희가 말하는 삼원(三遠), 즉 평원(平遠), 고원(高遠), 심원(深遠)은 인간이 객체로서 존재하는 자연과 관계 맺는 관점들이다.

예를 들어 산을 그릴 때 먼저 산의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 산과 좀 떨어진 인근 산에 올라 수평적인 시선에서 산의 전체 모습을 바라본다. 산은 대물(大物)이지만 이 관점에서 볼 때 산은 한 눈에 조망되는데 이것이 ‘평원’이다. 그 후 산으로 들어가 산 아래에서 산을 올려다 본 모습이 ‘고원’이다. 산은 높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인간과 상대하여 거대한 대상으로 표상된다. 다시 산의 정상에 오르면 산의 뒷면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 이렇게 산 너머 펼쳐진 전망을 사생하면 ‘심원’이 된다. 심원은 이제까지 하나의 세계로서 절대적인 존재였던 산을 다시 다른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상대화시킨다.

“고원의 형세는 우뚝하게 솟아있고(高遠之勢突兀), 심원의 뜻은 겹겹으로 쌓인 것이고(深遠之意重疊), 평원의 뜻은 융화된 장면으로 경쾌하게 펼쳐 있으면서 무한감이 감도는 것이다(平遠之意 冲融而飄飄緲緲).”(곽희의 ‘임천고치’)

삼원은 개별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한 화면에 종합되기도 하는데, 세 가지 관점이 모두 결합한 산수화가 가장 이상적인 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관점은 산수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통해 얻어지겠지만 세 가지 관점이 한 화면에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이 관점들을 종합하는 관념의 소산이라고 해야 한다. 동일한 산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산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는데, 그것은 크다, 작다, 깊다, 얕다 등으로 표상된다.

그런데 이 판단 자체는 주관적이지만 판단의 대상에 귀속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는 객관에 대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산을 다양한 시각에 의해 산 밖에서 본 모습과 안에서 본 모습, 또 안에서 밖을 본 모습을 총괄하려는 이런 노력은 근본적으로 대상으로서의 산수를 그려내고 그것을 통해 도를 깨닫고 산수에 의탁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상대성이 시간의 경과를 통해 지각되기 때문에 산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무한히 변화하는 객체로 표상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관점 변화에 따라 거대한 산이 한 눈에 파악되기도 하고 거대한 크기로 다가오기도 하고 다른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상대화되기도 한다. 곽희의 산수는 여전히 인간의 주관 밖에 존재하는 객체로 존재하지만 그것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변화하는 것인데, 이 변화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대립자들의 상대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삼원은 주관의 시점에 따라 산수를 상대화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위치의 변화와 시간의 경과를 통해 ‘보보이(步步移)’ ‘면면간(面面看)’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화면에 그려진 산수는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담게 된다. 화면 안에서 볼 때 주관의 관점 변화에 따라 대상세계가 보여주는 모습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화면 밖에서 인간은 이 변화하는 자연 전체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또는 변화 밖에 위치함으로써 거대한 자연에 대한 조화를 체득할 수 있으며, 유한한 한계에서 벗어나 무한한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도와 완전한 조화를 통해 더욱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며 도의 초월성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느끼게 된다.

장자는 이러한 노님을 ‘소요유(逍遙遊)’라고 하였다. 소요유는 “구름과 기를 타고(乘雲氣), 비룡을 제어하여(御飛龍), 사해의 밖을 노니는 것(而游乎四海之外)”(‘장자’ 소요유)이며 “아무것도 없는 고장(無何有之鄕)과 광막한 들판(廣漠之野)”(‘장자’ 소요유)을 소요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도를 추구하는 것이며 원(遠)을 추구하는 것인데, ‘원(遠)’이란 ‘근(近)’의 반대어로서, 가까운 세속의 잡사에 구애받지 않고 허광방달(虛曠放達)한 곳에서 마음이 노니는 것을 말한다. 장자사상은 ‘원(遠)’을 통해 무한을 추구하는데, 무한한 연장을 통해 자기 마음과 우주가 하나가 된 가운데 생명의 영원성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장자는 그것이 목적이자 도라고 보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망아와 세속의 초월을 통하여 정신이 유한한 속박으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향하여 비약하는 것이다.

회화에서 ‘원(遠)’의 구도는 산수의 연장을 통해 시각을 회화 밖으로 돌려서 원을 끌어당기고 화면 밖의 무를 끌어들여 화면을 무한으로 연장시킨다. 예술에서 ‘원’의 경계는 평온하면서도 변화무쌍하고 심원하고 아득하다. 또한 그것은 어렴풋하며 정확하지 않으며,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곽희의 ‘근(遠)’이라는 관념과 삼원법이란 투시법은 이러한 정신적 자유를 형상화한 것이다. 곽희의 산수화의 사상적 배경에는 유가의 영향도 있지만, 산수 체험은 근본적으로 장자의 ‘유(遊)’의 체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것을 삼원으로 정리해 낸 점에서 그가 의식하였든 그렇지 않든 곽희의 산수화 구성은 기본적으로 장자사상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곽희가 삼원으로 종합한 화면구성 방식은 회화의 기법에서 괄목할만한 진보였다. 뿐만 아니라 유가적 사유와 장자적 사유를 종합해낸 방식은 북송문화의 회화적 표현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기념비적인 성취이다. 그의 회화풍격은 북송 화원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신종 사후 궁정의 벽을 뒤덮었던 그의 거대한 그림들은 찢겨져 걸레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북송 중반 사대부 사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미적 취미는 대관산수화의 웅변적인 성격과 궁정 취미를 저속한 것으로 취급하고 회화에 새로운 품격을 가져왔다. 그것은 선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으로 이어지는 연재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55호 / 2016년 8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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