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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실천 가능한 선정법의 요청

기자명 김정빈

위빠사나 열풍은 필연적 현상

대승불교는 육바라밀을 수행법으로 제시하고 있고, 따라서 대승불교에 수행법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수행법이 누구나 실천 가능하도록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는 지금 낮은 차원의 수행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초기불교는 수행법을 초등학교에서 대학원까지 모두 제시한다. 그에 비해 대승불교는 마지막 단계―박사(석사)를 취득하는 대학원 단계의 수행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팔정도서 선정 이루는 정념
육바라밀엔 정념 강조 없어
구체적 설명없는 선정법으로
구체적인 위빠사나법 떠올라

불교 수행은 깨달음을 목표삼고 있으며, 깨달음은 선정을 통해 성취된다. 따라서 선정은 수행법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가 되며, ‘아함경’‘빨리경’이 제시하는 팔정도는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팔정도의 마지막 여덟 번째 단계는 선정 상태인 정정이고, 일곱 번째 단계는 그 선정을 이루는 방법인 정념이다. 그리고 정념에는 사마타·위빠사나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사마타·위빠사나를 닦으면(7단계) 정정이 이루어지고(8단계), 정정의 상태에서 깨달음이 성취되며(9단계), 깨달음이 성취되면 처음 이론으로만 알던(1, 2단계: 정견·정사)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경험으로 실증하게 되는데, 이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구정도(九正道)’라고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구정도의 단계는 수행자의 마음이 질적인 변화를 이룬 단계―비유적으로 말하면 물이 100도에 이르러 수증기로 변한 상태, 과정으로서의 단계가 아닌 목표에 도달한 단계, 즉 도성제가 아니라 멸성제에 해당된다.

이렇듯 팔정도는 수행의 단계를 모두 반영하고 있지만 육바라밀은 그렇지 않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육바라밀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 등 여섯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이중 반야는 어떤 반야일까 하는 점이다. 반야라는 말의 본뜻은 혜(지혜)이며, 이는 팔정도의 정견·정사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대승불교의 반야는 이론적인 반야가 아닌 실증된 반야, 즉 팔정도로 보면 아홉 번째의 반야, 사성제로 보면 멸성제에 해당되는 반야이다.

따라서 육바라밀에서의 반야는 과정으로서의 수행법이 아니다. 육바라밀의 여섯 덕목 중 정말로 수행법이라 할 만한 것은 다섯 가지뿐인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육바라밀 또한 팔정도처럼 선정을 마지막 단계에 배치한 것이 된다. 육바라밀의 선정은 팔정도의 정정에 해당된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팔정도에는 선정(정정, 8단계)을 이루는 방법으로서의 정념(7단계)이 있는데, 육바라밀에는 이 부분이 없다. 아니, ‘없다’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으므로 제한사를 두어 말하기로 하자. “육바라밀에는 정념 부분이 없거나, 있더라도 구체적이지 않으며, 강조되지 않는다”라고.

대승불교 경전들은 부처님의 수많은 설법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경전들 중 수행법(대학원 과정)이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적다. 대승불교 경전은 무슨무슨 불보살이 무슨무슨 선정에 들었다고 자주 설한다. 그렇지만 그 불보살이 어떤 선정법(명상법)으로, 어떤 정념법으로 그 경지에 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으며, 혹 말하더라도 우리가 그 방법으로 수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지 않다.

그에 비해 초기불교의 사성제는 도성제 부분에서 정념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사마타·위빠사나를 전하고 있고, 이를 기초로 남방불교는 40가지나 되는 사마타법과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위빠사나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수행법이 위빠사나이다. 우리나라에 남방불교(초기불교)의 위빠사나가 소개된 1988년 이후 이 수행법이 불이 번지듯 번지고 있는데(이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에는 대승불교가 선정법을 실천 가능하도록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해온 데 대한, 또는 선정법을 제시한다고 해도 경전의 수지 독송법, 주력법 등 타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수행법에서 그친 점(불교만의 우수성을 보여주지 못한 점), 그 대안으로 제시된 공안선(公案禪)이 일반인으로서 접근하기 어려운 점에 대한 반발의 측면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55호 / 2016년 8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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