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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12 보관(普觀)

연꽃잎 열려 오백 가지 빛 비추고
눈을 뜨면 허공에 부처·보살 가득

“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희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일을 보았을 때는 마땅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중간에 ( )속에 말을 보충한 것은 생각을 하고 마음을 짓는 행위의 목적어가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데, 그것이 길어서입니다. 또 ‘생각을 하고 마음을 일으키다’로 번역한 것은, 판본에 따라서는 그저 ‘스스로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로만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동안 극락세계 관찰해왔다면
이번엔 스스로의 왕생 떠올려
극락 연꽃 위에 앉아 바라보면
물·나무·숲이 올바른 법 연설

그렇다면 그 기상작심(起想作心)의 목적어는 무엇일까요? “스스로 서방의 극락세계에 태어나서 연꽃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극락세계와 극락세계에 계신 아미타 삼존을 관찰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 보관(普觀)에 이르러서는 우리 스스로가 극락에 왕생하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왜 하필 우리가 태어나야 할 극락이 ‘서방’에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책 ‘나무아미타불’에서 가장 빼어난 해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방에 극락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극락이 있는 곳이 곧 서방이라는 것입니다. 서방은 동방에 대립하는 서방이 아니라, 동방이나 서방의 대립을 넘어서 곳을 서방이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방은 사실은 중방(中方)이고 정방(正房)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극락의 연꽃 위에 앉아서는 “연꽃잎이 닫히는 모습을 생각하기도 하고, 연꽃잎이 열리는 모습을 생각하기도 한다. 연꽃잎이 열릴 때는 오백 가지 빛깔이 (우리) 몸을 비추는 생각을 한다. 눈을 뜨는 모습을 생각하면 부처님과 보살님이 허공에 가득함을 볼 수 있다. 물, 새, 나무, 숲, 그리고 모든 부처님이 내시는 소리는 다 올바른 법을 연설하고 있는데, (그 말씀은) 십이부경(十二部經)의 내용과 합치된다.”

오백 가지 빛깔이 우리 몸을 비춘다는 것은 부처님의 무량광(無量光)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의 형식에 따라서 분류하면 열두 가지가 되므로 ‘십이부경’이라 말합니다. 특히, 십이부경은 초기불교 당시에 경전을 분류하는 방식입니다. 이 ‘관경’과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내용상으로 모순되지 않음을 선언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연꽃 위의 관상으로부터) 나오더라도 (관상한 내용을) 굳게 지녀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다 보게 되면, ‘무량수불의 극락세계를 본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것이 보관(普觀)으로서 열두 번째 관찰이라 말한다.”

열두 번째 보관은 곧 왕생관(往生觀)입니다. 앞에서 ‘서방’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서방’이라느니 ‘극락세계’라느니 ‘왕생’이라느니 하는 일을 지금 현대인들은 쉽게 믿지 못합니다. 종래 정토불교를 이행도(易行道)라고 하고 하근기(下根機)를 위한 가르침이라 말해왔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여섯 글자를 외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니 어찌 쉬운 길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고 마음속으로 극락세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기까지가 너무 어렵습니다. 가히 난행도(難行道) 중의 난행도라 해야 할 것입니다. 현세의 일이 아니고, 세상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토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어쩌면 상근기(上根機)라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역설적이지만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무량수불의 화신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은 언제나 이렇게 (극락세계를 관찰하는) 수행을 행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오신다.” 이는 내영(來迎)으로 오시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빛으로 오시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타 삼존과 우리는 1 vs 1로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은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관찰이라 말하며, 이와 다르게 관찰하는 것은 삿된 관찰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55호 / 2016년 8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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