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운문사 주지 진광 스님
13. 운문사 주지 진광 스님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6.08.19 19: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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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빛으로 학인들 곁 밝혀 주는 도반같은 스승

▲ 운문사 경내, 진광 스님은 작은 연못가 바위 옆에 자리를 잡았다. '감탄, 감동, 감사'가 생활의 신조라는 스님은 바위 틈에서 피어난 이름 없는 풀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종일수타보 자무반전분(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이라.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헤아려도 나에게는 반푼어치의 이익도 없다.”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아니,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에 날아와 꽂히는 것 같았다. 꽃다운 나이 스무 살, 안정된 직장. 남들 눈엔 부족함 없어 보였지만 ‘이것이 삶의 진정한 가치’라 여겨지지 않는 마음 한 구석엔 늘 허전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빈자리를 간파한 것일까. 무문관 6년 폐문정진을 마친 관응(1910~2004) 스님의 법문은 폭포수처럼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환희가 되어 혈관을 타고 퍼졌다. 망설일 것이 없었다. 출가의 발심이 금강석같이 견고해졌다.

관응 스님 법문에 발심 출가
행자생활조차 신심으로 환희

명성 스님 은사로 교학과 인연
“참선수행 대한 원력 컸지만
경전 공부하면 환희심 일어”
1999년 명성 스님 강맥 이어

벌써 40년 전 일이다. 그날의 법석을 회상하는 운문사 주지 원명진광(圓明眞光) 스님의 얼굴엔 어느새 홍조가 떠오른다.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잠시 잦아들었다. 여름방학에 접어든 운문사승가대학의 한가로운 오후다. 하지만 진광 스님의 일과는 그리 한가롭지 못하다. 지난해 주지 소임을 맡게 된 후로는 방학 중에도 좀처럼 여유가 허락되질 않는다. 오히려 개학 전 마무리해야할 일들로 시간은 더 부족할 뿐이다. 그래도 진광 스님은 종종걸음치지 않는다. 오후나절 잠시 짬을 내어 운문사 주변으로의 포행도 빠뜨리지 않는다. 풀잎 사이로 핀 들꽃과 솔향기 머금은 바람을 만난다.

“요즘 학인들은 낭만이 좀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시골에서 커서 그런지 자연의 소소한 변화를 보고 느끼고, 이런 것들이 참 좋던데. 세상이 바뀌고 젊은 세대의 성장환경도 변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긴 하죠. 학인들을 탓할 게 아니라 승가대학이 그들에게 어떤 공간이 돼야할지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출가자가 감소하며 학인 수가 줄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종단의 교육방식에도 변화가 계속되면서 승가대학도 변화의 바람 앞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무조건 새로운 것을 따라 갈수는 없다. 이곳은 운문사다. 소소한 변화조차 크게 느껴질 만큼 오랜 전통과 역사를 이어온 곳, 운문사가 옮기는 한 걸음은 그만큼 묵직하기 때문이다.

△요즘 학인들을 보면서 세대의 변화를 느끼나.
“시대가 바뀌니 학인들도 바뀌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특히 예전처럼 부족함을 느끼며 자란 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때는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이라며 ‘굶주리고 추울 때 도닦을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제는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니 이런 말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어렵고 부족하지만 내가 여기서 그것을 극복하고 공부하겠다는 간절한 마음, 그것이 좀 부족한 것 같다. 하지만 간절심을 강요할 수는 없다. 시대가 변했고 우리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이 너무 다르다.”
△운문사승가대학의 교육방식에도 변화가 불가피한가.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들이 경험한 세계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런 일이니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소통도 가능하다. 명나라 말기 사상가 이탁오(李卓吾)는 ‘진정한 스승이 되려면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스승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가르치는 입장에 서있지만 학인들과 경을 공부하면서 가르친다기 보다는 함께 경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기에 간경이라고 말한다.”

친구 같은 스승이 된다는 것. 참 쉬운 말일지 모르지만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 그런 스승이 되기 위해 진광 스님은 긴 세월을 걸어왔다. 출가 40년. 행자시절부터 지금까지 60평생의 3분의2를 운문사 대중으로 살았다. 지금은 강사이자 주지이지만 인연의 시작은 두 권의 책에서 비롯됐다.

‘구름은 모든 방랑, 탐구, 희망, 향수의 영원한 상징인 것이다. 구름이 천지 사이에 주저하고 동경하면서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정신도 시간과 영원 사이에 주저하고 동경하면서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것이다.’(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 중에서)
가슴이 설렜다. 구름처럼 살고 싶었다. ‘시간과 영원 사이에’ 걸려있는 그 고귀한 정신을 찾고 싶었다. 시간 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들로부터 떠나 영원에 더 가까이 있는 것. 여고생의 가슴 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사유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구름과 시를 좋아했다. 시인이 되고도 싶었다. 어디 커피가 맛있고 어떤 옷이 예쁘다는 친구들의 이야기에는 도통 관심이 가질 없었다. 한번 태어나 그런 감각적인 즐거움만 찾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가? 무엇인가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야지 않을까? 즐거움, 그 후에는 무엇이 있나?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즐거움에 대한 관심은 한줌도 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에 잡힌 또 한 권의 책은 ‘선가귀감’이었다. 선수행과 교학에 대한 옛 선사의 길잡이는 깊어가던 갈증에 감로이자 고민의 해방구가 되었다. 특히 수행은 ‘더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갈구하던 이에게 전혀 다른 세계로의 통로였다. 그토록 좋아하던 소설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는 스님도 없었지만 토요일마다 조계사를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참선이 뭔지도 잘 몰랐다. 무슨 화두를 들었는지, 무슨 마음이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참선수행 외에는 의미가 없어 보였다. 불교공부에도 박차를 가했다. 불교통신대학으로 교리를 공부하고 무진장 스님과 광덕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남산 대원정사에서 관응 스님의 ‘화엄경’ 강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리고 쏟아져 내린 관응 스님의 감로법문에 발심출가의 씨앗은 그 자리서 꽃망울을 터뜨렸다.

△운문사와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나.
“관응 노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날로 출가의 발심을 세웠다. 노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안양 보장사에 바나나 한 상자를 사 들고 찾아갔다. 스님께 ‘출가하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여쭈니 두 말도 않으시고 ‘되지’ 하시며 편지를 한 장 써주셨다. 1970년 운문사에 오신 명성 스님이 그해부터 운문사 주지와 강사를 겸하셨다. 관응 스님이 주신 편지를 들고 얼굴도 모르는 명성 스님을 찾아가 출가했다. 선근이 있었기에 좋은 인연으로 출가했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오신채에 참기름도 못 먹었다. 속가 모친은 나를 보며 ‘절에서는 참기름 많이 먹는다는데 기름 못 먹어서라도 중노릇 못하고 돌아올 거야’고 하셨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더 없이 기뻤다.”
△행자 시절은 어땠나.
“단발머리로 운문사에 온지 일주일 만에 사리암으로 올라갔다. 1978년 사미니계를 받기 전까지 1년여를 사리암서 행자로 지냈는데 그때도 사리암에는 전기가 안 들어왔다. 남포등에 기름등을 켜는 탓에 아침이면 콧구멍이 새카매져 있었다. 물도 길어 와야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 마음속에는 그야말로 신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생활 하나하나가 새롭고 환희로웠다. 문리가 나려면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소리내어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해서 매일같이 큰 소리로 경전을 읽었다. 덕분에 거의 1년을 목이 쉰 상태로 지냈다. 치문을 배울 때가 돼서는 경이 눈앞에 훤히 떠올라 몇 페이지 몇째 줄까지 기억이 날 정도였다. 그저 모든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이곳이 운문사라는 점이었다. 학생 시절 그렇게 좋아하던 구름, 구름처럼 떠돌고 싶다던 꿈을 갖고 있었는데 와 보니 이곳이 ‘구름문’이었다.”

깊은 선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송광사 효봉 스님의 사제 향봉(1901~1983) 스님이 속가 인연으로는 당숙이었다. 한학을 하셨던 부친은 어려서부터 딸을 데리고 서당엘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고향인 전남 보성을 떠나 서울로 왔지만 서울은 늘 낯선 이방의 도시였다. 그런 스님에게 사리암에서의 행자시절, 그리고 이어진 운문사에서의 대중생활은 그리운 고향으로의 회귀와도 같았다.
운문사, 그리고 명성 스님과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교학의 길로 이어졌다. 운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했다. 명성 스님도 공부하겠다는 상좌의 뜻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참선수행보다 교학에 더 집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숙세의 인연인가 싶다. 출가 할 때만 해도 참선수행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는데 지금까지 경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경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았다. 보면 쉽게 알아지는 것도 좋고 신기했다. 처음 배운 한문도 힘들기는커녕 즐거웠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대교과를 졸업할 때 학인들 99%가 선방에 가겠다고 했는데 나는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 동국대에서 불교를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관응 스님에게 유식사상을 별도로 수강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학 졸업할 즈음이 돼서도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서울에 계속 머물며 대학원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졸업식도 하기 전 관응 노스님이 계시던 중암으로 갔다.노스님에게 ‘유식30송’을 배우며 불교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1년 정도 수학했는데 지금 돌아보아도 더 없이 행복한 시절이었다.”
△관응 스님의 공부 방식은 어땠나.
“다방면에 박학다식하시고 뛰어난 법사이자 선사셨다. 노스님의 강의를 들으면 마음속이 시원했다. 유교, 노장, 불교를 종횡무진 오가며 설명하시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유식을 선의 관점에서 해석하셨다. 그때의 배움이 내 정신의 자양분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경을 보는데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1년 만에 수업이 마무리된 이유는.
“1년 동안 유식을 배웠는데 운문사에 강사가 필요하니 들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사실 나는 유식을 배우며 이제 진짜 선방 가서 참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사스님의 말씀이셨기 때문에 관응 스님에게 사집을 다시 배우고 운문사로 돌아와 사집반을 맡았다.”

▲ 1990년대 중암에서 명성 스님과 관응 스님(왼쪽부터)을 모시고 자리를 함께 했다.
선방에 대한 미련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운문사 승가대학 중강으로 4년을 착실히 보낸 스님은 전남 고흥면 봉래사 주지를 거쳐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휴스턴 사우스웨스트 선 아카데미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일까. 진광 스님을 찾는 은사스님의 연락에 다시 강단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단에 다시 서는 것을 주저한 이유는.
“출가 20년이었다. 내가 출가해서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고 싶었다. 미국에서 부산 안국선원을 소개받아 귀국 후 그곳에서 한 달 정도 수행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돌아봐야 했다. 발심해서 출가했지만 지금까지 무엇을 했던가. 나태한 적도 없었고 곁눈질을 한 것도 아닌데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이 힘들었다. 출가 후 20여년을 열심히 살았으면 뭔가 얻어지는 것이 있을 것 같고, 당당하고 걸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내가 도대체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더 커졌다. 간절했다. 이런 의문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학인들 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그 간절함이 재발심의 기회가 됐다.”
△답을 찾았나.
“나름의 해답을 찾았다. 덕분에 마음의 평안도 구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후 계속해서 정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수행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상 자체가 수행이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가운데 수행 아닌 것이 없었다. 다만 부처님 당시처럼 오직 수행에만 정진할 인연을 아직 만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었을 뿐이다.”

운문사로 돌아온 진광 스님은 1999년 명성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관응 노스님이 진광 스님에게로의 전강을 명성 스님에게 직접 부촉해주셨다. 관응 스님은 ‘위로부터 전해오는 강맥을 오늘 진광에게 부촉하니 ‘법향(法香)’으로써 호를 삼아 이를 전함에 다함이 없기를 바란다’는 전강서를 명성 스님에게 보내셨다. 다만 은사스님의 호가 ‘법계’였기에 호를 원명(圓明)으로 바꾸어 명성 스님으로부터 비구니강맥을 이었다. 재발심과 전강은 스님에게 새로운 힘이 되었다. 어쩌면 그리움처럼 남아있던 참선에 대한 아쉬움, 그 집착을 놓아버렸기에 새로운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여백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변화에 대한 직관과 미래에 대한 준비였다.

대학원서 미술사·철학 전공
다양한 문화·학문 섭렵하며
안목 넓히고 불교 역할 고민
학인들과의 거리 좁히는 토대
“학인·행자 모두 목적지는 깨달음
출발엔 선후 있어도 모두가 도반”

△대학을 졸업한 지 10여년이 지나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이유는.
“우리 문화유산의 70% 이상이 불교문화유산이고 스님들은 그 문화유산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불교문화는 교리의 투영이고 예배의 대상인데 어느 경전에 의거한 사상인지, 어떤 원력과 신심이 담겨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사과정에서는 철학을 선택해 감산덕청 스님에 대해 연구했다. 전공을 다시 바꾼 이유는.
“당시 영남대에는 미술사학 박사과정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철학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뿐이다. 우연히 읽게 된 감산덕청 스님의 자서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감산덕청 스님은 삼교합일 사상의 정점에 서있는 인물이었다. 유심식관을 통해 노장과 불교, 유교를 합일시킨 인물이었다. ‘기신론’ ‘화엄경’ ‘능엄경’의 해석도 매우 감동적이었다.”
△2008년엔 시낭송집 ‘구름 나그네’도 발매했다.
“워낙 시를 좋아한다. 아마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부처님오신날이면 운문사 경내에 봉축방송을 하면서 직접 시낭송도 했다. 지금도 좋은 시를 만나면 학인들에게 낭송 해주기도 한다. 시낭송을 좋아해서 한 번 해본 것이지 판매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목적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보였지만 목적은 늘 하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였다. 내가 공부한 것들이 대중들에게 불교를 전하고 학인들에게 수행과 전법의 길을 제시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강사는 학인들에게 다양한 안목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학문을 한다고 해서 학자가 될 것도 아니고 교수를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학자보다는 강사에 무게를 두는 것인가.
“강사와 학자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강사는 학인들에게 경만 가르치는 이가 아니다. 학인들과 같이 발우 피고 예불하고 공부하고 울력하면서 모범이 될 수 있어야 강사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운문사승가대학에서 강사의 위치는 학인들과 같이 어울려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또 학인들이 세간으로 나가서 수행, 전법할 때 필요한 다양한 안목과 지식도 준비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강사들 또한 다양한 지식과 교양을 두루 갖춰야 한다.”

다양한 학문과 문화에 대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불교를 전하는 방법을 넓혀주었다.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오늘날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대중에게 어떻게 불교가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길도 제시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체험이 큰 발판이자 자산이 되었다. 눈높이를 학인들에게 맞추고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강사’라는 이름이 마치 몸에 꼭 맞는 옷처럼 더욱 편안하고 소중해진 것도 이런 까닭이었을지 모른다. 바늘 꽂을 틈 없어 보이는 승가대학의 학사일정도 더 이상 버겁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0년 1년 간의 휴식년을 얻은 진광 스님은 미얀마로 달려갔다.

△휴식년을 미얀마에서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
“수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경을 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의 환희로움은 크다. 몰입해 경을 보는 것도 수행이다. 하지만 부처님처럼 수행하고 싶었다. 선방에 가서 공부하기에는 당시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 걸림 없이, 모든 직함과 소임을 다 내려놓고 수행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얀마를 택하게 됐다. 미얀마에서 초기불교의 수행을 접하게 됐다. 파욱에서 호흡을 관찰하는 아나파나사티 수행을 7개월간 했다. 수행처의 환경은 열악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수행 중에는 묵언을 했는데 대중을 떠나 말을 하지 않고 수행한다는 것이 낯선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텅 빈 충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파욱에서의 안거가 끝나고 바로 쉐우민으로 옮겨 위파사나 수행을 4개월 더 했다. 휴식년 한 해를 온전히 수행으로 보냈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에 대한 경험이 후에 학인들을 지도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됐다.”
△수행을 끝낸 후에도 다시 경에 집중할 수 있었나.
“나는 지금도 선정과 지혜가 함께 가는 최상승의 힘이 화두참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을 보는 것은 지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회향해야할 자리는 대중이다. 이것은 출가로 얻은 맑은 행복에 대한 빚을 갚는 길이다. 하지만 이것이 남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수많은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계정혜 삼학이라고 생각한다. 계는 몸을 깨끗이 해주는 방패이고 몸과 마음이 깨끗한 선정 속에 지혜의 달이 떠오를 수 있듯이 계정혜 삼학을 떠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길이 경에 있고 대중과 함께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 대중과 함께 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뜻인가.
“물론이다. 대중과 있거나 혼자 있거나 늘 여여하면 좋겠지만 대중에게서 배우는 것이 더욱 많다. 그러니 모든 대중이 나의 스승이다. 단순한 학인이 아니다. 이곳이 아니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스승, 선지식을 만날 수 있겠는가. 학인이든 행자든 우리는 한 목표를 향해서 한 길을 가는 도반이다. 다만 조금 먼저 출발한 사람이 있고 조금 늦게 출발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누가 먼저 목적지에 도달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정한 스승이 되려면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스승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옛 가르침을 언급한 참뜻이 여기에 있었다. 진광 스님에게 대중은 스승과 다를 바 없다. 진광 스님이 걸으며 공부해온 많은 것들 또한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더 넓은 시야로 미래를 전망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출가수행자가 줄어들고 승가대학의 교육방식 또한 변화가 불가피한 시점에서 진광 스님은 변화의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에 법의 향기를 실어 올렸다. 하늘과 대지 사이에 떠 있는 헤르만 헤세의 구름처럼 영원과 시간 사이, 전통과 미래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운문사승가대학에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이 더 없이 부드럽게 여겨지는 이유다.

▲ 명성 스님(왼쪽)의 상좌들은 은사의 따뜻한 관심을 늘 학인대중과 나눠야 했다. 진광 스님은 "살뜰하게 상좌를 챙기는 도반들의 은사가 부러웠던 적도 있지만 지금 돌아보면 명성 스님은 진정 현명한 큰 어른임"을 느낀다.
△비구니총림이 언급될 때마다 운문사가 거론된다.
“오래 전부터 비구니총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운문사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꾸준히 노력한다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전 세계적으로 비구니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특히 외국에서는 비구니계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한국을 비구니의 종주국처럼 여긴다. 현재 비구니스님들은 각계각층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근대 종단 발전에서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비구 총림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비구니총림의 탄생은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의 상생이자 종단과 불교 발전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전통을 이어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기에 역사는 이어져 왔다. 전통은 결국 머무름이 아니다. 변화, 발전을 이끄는 열린 마음과 안목 속에서 전통은 더욱 성장하고 빛난다. 하지만 진광 스님은 그 과정에서 빛나는 주연이 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어떤 수행자가 되고 싶은가
“진광불휘 진수무향(眞光不煇 眞水無香)이라 했다. 진짜 빛은 화려하게 빛나지 않고 진짜 물은 향이 없다. 드러나지 않지만 은은하게 비추는 참 빛으로 누군가를 그렇게 비춰주고 싶다. 주연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고요하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별빛 같은 수행자가 되고 싶다.”

진광 스님 이메일은 항상 이렇게 끝난다. ‘솔바람 맑은 구름문에서 참빛 두 손 모음’. 그 짧은 인사 한 마디에 차갑고 무표정한 이메일에서는 운문사의 향긋한 바람과 너른 하늘 그리고 학인들 곁에서 은은한 빛이 되어주는 스승의 미소가 베어 나온다. 별빛처럼 빛나는 도반 같은 스승의 향기다. 그 따뜻한 법의 향기가 운문사승가대학을 내일로 이끌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작은 것에 감탄하는 마음 타고난 따뜻한 수행자”

내가 본 진광 스님

행오 스님 동학사승가대학장=정형화된 스님의 모습에서 안주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배우고 또 본인이 배운 것을 남김없이 남들에게 베풀어준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실천하는 데에도 게으름이 없다. 주지소임을 맡아 바쁘고 힘든 일이 많을 텐데 그래도 강의를 계속하는 것은 출가자가 줄어드는 어려움 속에서 한 명이라도 올곧은 수행자를 길러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또한 진광 스님 스스로도 강의를 통해 끊임없이 탁마하는 것 같다. 1989년 진광 스님과 함께 처음 중강을 맡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늘 차분하고 넉넉하게 마음을 쓴다.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하거나 기득권을 내세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다. 근본적으로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음이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어른을 모시는 극진한 마음은 부러울 지경이다. 가깝게 어른을 모시면서 ‘우리스님을 진짜 존경하다’고 말하기가 사실은 쉽지 않다. 그런 어른이 계시고 그런 어른을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은 수행자로서 큰 복이다.

성법 스님 운문사한문불전대학원 재학=운문사승가대학 학인시절 경을 공부하는 기초를 잡아주셨다. 학인들의 눈높이가 천차만별이지만 진광 스님은 언제나 눈높이에 맞춰 강의를 해주셨다. 운문사는 어른스님들이 많고 그래서 모든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 하지만 어려움이나 고민이 있을 때 언제든 찾아가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대화가 잘 통한다고 할까. 스님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먼저 떠오르는데 20여 년 간 한결 같이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그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아마 세상을 바라보는 스님의 시선과도 닮아있는 것 같다. 운문사에 대한 깊은 애정,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한 시선은 스님에게서 느껴지는 소녀 같은 감성의 원천인 것 같다. 덕분에 남들에게 모진 말이나 단호한 거절을 못하기도 한다. 학인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엄격함 속에서도 편안함을 전해 주시는 스님의 모습을 닮고 싶다.

김미경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20대 후반에 처음 진광 스님을 만난 후 지금은 유발상좌로 모시고 있다. 당시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어서 스님과 대화가 잘 통했다. 권위적인 면이 없고 늘 소탈하게 대해 주셨다. 아무래도 재가자가 스님을 대하면 어려운 면이 있기 마련인데 스님에게서는 그럼 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더 편하게 다가간 것 같다. 스님은 어떤 물건이든 같은 것 2개를 다 갖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나머지 하나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나눠줘야 된다. 욕심이 없고 소탈한 성격은 타고나는 것 같다. 자연을 대할 때도 큰 꽃 보다는 그 사이에서 핀 작고 이름 없는 야생화를 보면서 더 감탄한다. 사람을 대할 때도 제도권 안에 있거나 힘이 있는 사람보다는 제도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더 관심을 갖는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돕고자 노력하고 함께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인간관계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힘든 경우가 많은데 스님은 늘 넓은 눈으로 전체의 흐름을 보고 관계게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신다. 그런 말씀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1356호 / 2016년 8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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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법조 2016-09-25 17:28:27
따뜻하고 선재동자 같은 진광스님! 항상 건강하고 하시는 모든 원력이 넘치는 부처님의 가피로 다 잘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