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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제13 잡상관(雜想觀)

범부는 무량수불 헤아리기 힘드나
48원 힘으로 생각하면 성취 가능

지난 한 주는 참으로 마음속이 따스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에 갔기 때문입니다. 그 고향은 “꽃피는 산골”만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었던 것은 그 “꽃피는 산골”에 “그 속에서 놀던 때”의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12 보관이 바로 그러한 세계였습니다.

불상만 생각해도 한량없는 복
부처님 관찰하면 더 큰 공덕
아미타불이 나툰 크고 작은 몸
한꺼번에 관찰하는 게 잡상관

오늘은 제13 잡상관(雜想觀)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지극한 마음으로 서방(정토)에 태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마땅히 (극락의 보배) 연못 물 위에 떠있는 1장 6척이나 되는 불상(佛像)을 관찰해야 한다.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무량수불의 몸은 끝이 없으므로 범부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저 여래께서 과거세에 세운 원의 힘으로 인하여 생각하는(億想)하는 자는 반드시 (극락왕생을) 성취할 수 있다.”

‘저 여래께서 과거세에 세운 원’은 바로 ‘무량수경’에서 법장(法藏)보살이 말씀하신 48원입니다. 48원이야말로 극락을 낳은 어머니입니다. 48원이 없었더라면, 아미타부처님의 성불도, 우리 자신의 왕생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토교는 본원교(本願敎)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량수경’의 저 48원, 그 중에서도 ‘왕본원(王本願)’이라는 제18원에서는 열 번 염하거나(十念), 아니 단 한 번(一念)이라도 저 부처님(의 이름)을 염하면 왕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에 반하여, 여기서는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자로 말하면 염(念)과 억(億), 그리고 상(想) 모두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 차이는 문맥에 따라서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13관에서의 ‘억상’은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에 떠올려 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에 반하여, ‘무량수경’의 ‘염’은 소리 내어서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다만 저 불상만을 생각하더라도 한량없는 복을 얻을 수 있을진대, 하물며 부처님의 원만한 모습을 다 갖추고 계신 것을 관찰하는 것이겠느냐.”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공덕은 한량없는데, 참으로 부처님을 관찰한다면 그 공덕이 더욱 더 크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미타불께서 마음대로 신통을 행하여서 자유롭게 온누리에 화현하는데, 어떤 때에는 허공을 가득 채울 만큼 큰 몸을 나투시고, 또 어떨 때에는 1장 6척 정도의 작은 몸을 나투신다. 그렇게 나투신 몸들은 다 진짜 금빛이 나고, 원광(圓光), 화불(化佛) 그리고 보배 연꽃은 다 앞에서 말한 그대로이다.” 불상, 진짜 부처님, 큰 몸, 작은 몸의 관찰을 한꺼번에 다 행하고 있기 때문에 잡상관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잡’의 의미는 종합의 의미일 뿐, 순수하지 못하고 잡스럽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미타불만 그렇게 화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제도가 화현의 목적인만큼, 아미타불을 모시는 두 분 보살 역시 화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정 아미타불을 모시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역시 모든 곳에서 (화현하는데, 그) 몸을 (나투는 것이 아미타불의 경우와) 같다.” 큰 몸으로 나투기도 하고, 작은 몸으로 나투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이 그렇게 하시는지, 아니면 두 분의 보처(補處)보살님이 그렇게 하시는지는 알 수 없을 지경입니다. 어느 보살님이 어느 보살님인지 혼돈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는 “중생들은 다만 머리 모양(首相)을 살펴보아서, ‘이 분이 관세음보살이고, 이 분은 대세지보살이다’라고 알면 된다. 이러한 두 보살은 아미타불을 도와서 널리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 머리 모양을 보면, 관세음보살은 화불을 모시고 있고 대세지보살은 보병(寶甁)을 모시고 있으므로 아미타불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잡상관이니 제13관이라 말한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관찰이라 말하고, 이와 달리 관찰하는 것은 삿된 관찰이라 말한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56호 / 2016년 8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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