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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이 눈부신 통찰의 무대가 되다

  • 불서
  • 입력 2016.08.29 13:44
  • 수정 2016.08.2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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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의 법문’ / 중현 스님 지음 / 아름다운 인연

▲ ‘길고양이의 법문’
아침저녁이면 길고양이가 찾아든다. 한적한 절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꼬마손님이다. 그러면 스님은 준비해둔 사료를 건넨다. 고양이는 늦게 준다 싶을 땐 몸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린다. 때로는 특유의 애처로운 눈빛으로 올려도 본다. 그래도 밥을 주지 않으면 한정 없이 기다리며 털을 핥거나 어딘가를 응시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목적을 달성해 다 먹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쩍 가버린다.

평범한 절 생활들 얘기지만
스님의 깊은 사유 거치면서
울림 크고 여운도 한층 깊어

스님은 그런 고양이를 보며 한번은 괘씸하다는 생각을 했다. 돈 들여 사료를 사고 매일 시간 맞춰 먹을 것을 챙겨주는 데다가 심하게 아플 땐 병원에도 데려갔다. 그런데 고양이는 늘 당당했다. 전혀 고마워하거나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에 대한 기분 나쁜 생각이 짙어지려는 순간 문득 고양이에게조차 옹졸해지는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기껏 사료를 조금 베풀면서 고양이에게 한껏 고마움을 기대했던 것이다.

스님은 다시 고양이가 나타났을 때 유심히 관찰했다. 조용히 마당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뒷모습은 스님에게 베풂, 기대감, 고독에 대해 사유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혜는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것이며, 지혜를 닦는 수행은 오로지 고독 속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던가. 고양이는 자신의 내면에 뚫린 구멍은 오직 자신만이 채울 수 있음을 각인시켜주었다. 홀로 사랑을 행할 때 우리를 지혜의 길로 인도하는 고독을 직시할 수 있으며, 지혜로써 자신을 정화한 자만이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비를 행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길고양이는 스님의 눈을 열어 준 스승이었다.

▲ 저자인 중현 스님은 ‘지혜로써 자신을 정화한 자만이 형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비를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인연 제공

이 책은 전남 화순 용암사 주지로 있으며, 월간 ‘송광사’ 편집장을 겸하고 있는 중현 스님이 일상에서 부딪히고 사유하고 몸소 터득한 얘기들로 엮여있다.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행정학과에 입학한 스님은 20대를 거리에서 보냈다. 반민주와 반인권의 혹독한 시대가 대학생들을 길거리로 내몰았고, 스님도 1980년대를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보내야 했다. 군부독재가 막을 내린 뒤 스님은 프로그래머로 변신해 고려대장경 전산화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송광사로 출가한 스님은 열심히 수행하며 사는 것을 당연한 삶으로 받아들였다. 강원을 졸업하고 봉암사, 화엄사, 석종사 등 제방선방에서 부지런히 정진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단의 논리를 자기 생각으로 착각하며 열변을 토하는 자신과 도반을 보며, 과거 운동권 시절이 머릿속에 겹쳐졌다. 소재가 다를 뿐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집단 논리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또 지독한 매너리즘을 겪으며 당위적인 원칙들을 하나둘 내려놓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스님은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정중선정무위난(靜中禪定無爲難)이요, 대경부동시위난(對境不動是爲難)’이라는 말이 있다. 고요한 가운데 선정에 들기는 어렵지 않으나, 경계에 부딪혀 마음이 동하지 않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아무리 시끄럽더라도 마음이 고요하면 그곳은 고요한 곳이다. 반대로 아무리 고요하더라도 마음이 시끄러우면 그곳은 시끄러운 곳일 따름이다. 스님은 더 이상 대상에 끌려 다니지 않기로 다짐했다. 끌려다니지 않아야 고요할 수 있고, 그럴 때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소소한 일상이 눈부신 통찰의 무대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무심한 길고양이에게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의 의미를 배우는가 하면 뒤늦게 사랑을 일깨워준 강아지 ‘보리’에게서는 “사랑이란 나를 떠나 우리에게로 가는 여정이며, 나를 키우는 사랑은 집착이 되고 나를 지우는 사랑은 자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이효리씨의 채식 실천을 높이 평가하며 ‘문명 한가운데 사는 인간들은 대부분 돼지가 아니라 삼겹살을 먹고, 소와 낙지가 아니라 불고기와 낙지볶음을 먹고 있지만 그 시각, 자연과 대치하고 있는 문명의 최전선에서는 (동물에 대한) 엄청난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또 팽목항에 다녀와선 ‘그 분노와 슬픔을 잘 갈무리하고 다듬어서 변화를 향한 지속적인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성과 자기성찰이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와 슬픔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 성찰과 그것이 선물하는 값진 인내’임을 강조한다.

현대사회에 대한 통찰 외에 불교계에 대한 비판도 날카롭다. 오늘날 불교가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적응하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한국 승단은 종교적 권위가 사라진 현대에 적응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임을 역설한다. 또 매일 세 차례 반복하는 축원과 관련해 지금까지 개인의 이기적인 소원이 불교적 지혜, 깨달음, 중생 제도, 자비심 등과 무관하며 극복해야 할 과제로 간주해왔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이젠 개개인의 소원 성취 없는 깨달음과 중생제도는 공허하고 관념적인 유희에 불과하며, 개개인의 이기적인 소원성취가 곧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불법의 실천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음을 밝힌다.

▲ 아침저녁마다 절을 찾는 스님의 도반 길고양이. 아름다운 인연 제공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즐겨듣고 바흐의 첼로 연주곡을 사랑하는 스님. 그러면서도 새벽 네 시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도량석을 돌고 대종을 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세 번 절에서 예불하고 기도한다. 그렇기에 스님의 일상은 평범하지만 스님의 사유를 거쳐 나온 글들은 울림이 크고 여운도 깊다. 그런 점에서 ‘수행자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역할은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스님의 지론에도 딱 들어맞는다. 스님은 참말로 길고양이를 도반으로 둔 ‘수행자’다. 1만5000원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357호 / 2016년 8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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