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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한 머릿결의 은둔 수행자, 도심포교당 아침 여는 기수가 되다

김해 바라밀선원 새벽 천일정진, 백정자 보살

▲ 바라밀선원의 새벽을 밝히는 백정자 보살은 3년 전 스님과 더불어 단 세 사람으로 시작된 새벽예불 천일기도의 첫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새벽 이 시간 이 자리에 항상 있어 왔다. 선원 입구 반가사유부처님도 그런 백 보살의 뒷모습을 부드럽게 감싸며 격려의 미소를 보내는 듯하다.

새벽 5시. 산사라면 이미 예불을 마친 시간이겠지만 도심의 거리는 깊은 잠 속이다. 경남 김해의 신도시인 내동 거리 역시 아직 적막하다. 밤과 아침 사이, 달은 희미해지고 해는 뜨기 전, 늦여름의 어둠을 몰아내는 여명이 이제 조금씩 공기 중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이때에 맑은 청수 공양을 올리고 불단의 촛불을 밝히는 도심포교당이 있다. 바라밀선원(주지 인해 스님)이다.

20대 때 새벽예불 100일 기도 계기
남편 사업위기 새벽기도로 시련극복
통도사부산포교원 차 공양 9년 회향

남편 간병하다 김해바라밀선원 방문
천일기도 첫날 인연 불자 세명 불과
회향 땐 12명으로 확장…2차도 동참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새벽예불 발원

소리 없이 한 사람 두 사람 법당에 들어서더니 어느새 잿빛 법복을 정갈하게 입은 12명의 불자들이 반듯하게 좌복을 펼치고 자리에 앉았다. 정성스러운 108배에 이어 묵직한 종성이 울리고 스님의 목탁소리에 따라 칠정례가 봉행됐다. 공성은 마치 잔잔한 아카펠라 노래처럼 소리가 일정하고 운율이 매끄러웠다. 마지막 순서인 좌선을 마칠 즈음에는 성큼 날이 밝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은 어느새 어둠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바라밀선원의 새벽을 밝히는 불자들 중에는 머리카락이 은발로 물들기 시작한 백정자(문수혜, 72) 보살이 있다. 스님과 더불어 단 세 사람으로 시작된 새벽예불 천일기도의 첫날부터 1차 기도를 회향하고 2차 기도가 봉행 중인 지금까지 그는 매일 새벽 이 시간 이 자리에 항상 있어 왔다. 전국의 도심 포교당에서 새벽예불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 요즘, 오히려 새벽예불을 신행 프로그램으로 단단히 묶는 역할을 백 보살이 한 셈이다.

하안거 해제 다음 날인 8월18일, 재가안거 수행도량 중 한 곳이기도 한 바라밀선원에서 해제 이후에도 여전히 새벽을 열고 있는 그를 만났다. 마침 30~40대 주부 불자들이 주위에 둘러않아 “새벽마다 일어날 수 있는 비결이 뭔가. 졸음을 어떻게 극복하나. 매일 절에 오면 무엇이 좋은가”를 연신 물으며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미안하고 부끄럽다”며 연신 말을 아끼는 그에게 답을 재청하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 바라밀선원의 새벽예불에는 법복을 정갈하게 입은 12명 이상의 불자들이 함께한다.

“누구나 자기 수행을 하나씩 가지면 좋아요. 삶의 활력이 되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힘이 된다고 할까요. 저는 평소에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습니다. 마침 선원은 새벽 5시에 예불을 보니 제게 맞는 수행을 만난 것이지요. 그렇다고 새벽만이 중요한 건 아닐 겁니다.”

겸손한 표현 속에서도 새벽예불에 대한 그의 남다른 소신이 묻어났다. 사실 백 보살에 따르면 그의 새벽예불 수행은 꽤 오래전 시작됐다. 23살 꽃다운 시절 동래 청송암에서 새벽예불을 통해 100일 기도를 올린 것이 계기였다. 결혼 초기 삶은 늘 혼돈 속이었다. 의기양양하게 시작된 남편의 사업은 기울기만 했고 빚은 늘어만 갔다. 불안과 쫓김으로 살았지만 기도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새벽예불이 더 편했다. 어떻게든 하루를 버티겠다고 마음을 모으는 새벽이 없었다면 백 보살은 삶을 견디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폭풍 같던 매일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38살 때였다.

“모아 둔 재산으로 마련한 부동산이 넘어가고 셋방살이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길에 내몰릴 상황이었어요. 당시 남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화재보험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 직장 동료가 뜻밖의 큰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불과 사고 며칠 전 남편을 통해 가입한 보험 덕분에 엄청난 손해를 면하게 되었어요. 그 동료는 거듭 고마워하며 주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남편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가피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요. 저는 그 감사함을 어떻게든 불가에 회향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통도사부산포교원과 인연이 닿았고 그곳에서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차 공양을 올리는 봉사를 했어요. 건강이 악화된 남편을 돌보기 위해 김해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횟수로는 9년 동안 봉사하며 정말 바쁘게 돌아다녔지요. 그 활동도 두 눈 딱 감고 회향했습니다.”

김해에서 그는 칩거 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대부분의 모임과 외부 활동을 접고 접었다. 대신 매일 아침 집에서 차 한 잔을 다려 공양을 올리고 자신만의 기도를 했다. 그 시간 동안 가슴속에서는 늘 ‘회향’을 되뇌었다. 

‘회향’의 기회는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찾아왔다. 3년 전 남편의 건강이 갑자기 위독해지면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였다. 마침 그 병원은 바라밀선원과 바로 이웃 건물이었고 선원은 백 보살에게 낯선 절만은 아니었다. 절친한 도반의 청으로 개원법회에 동참했던 도량이기 때문이었다. 병실에서 밤을 지새운 그는 기도라도 할 겸 선원을 찾았다. 마침 새벽 5시였다.

“예불 시간도 모르고 갔어요. 문이 열려 있으면 기도를 하고 닫혔으면 내려올 생각이었습니다. 스님 한 분과 불자님 두 분이 108배를 하기에 따라했고 예불까지 참여했습니다. 끝나고 두 보살님께서 새벽기도를 같이하자고 제안하셨어요. 그날이 천일기도 입재라고 하시더군요.”

‘남편이 입원하는 동안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되겠다’라는 생각으로 시작된 새벽예불 천일기도는 하루하루가 거듭되면서 ‘천일 원만 회향’이라는 발원으로 바뀌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하루도 빠질 수 없었다. ‘내일은 쉴까’라는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주지 스님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단 한 명이라도 더 함께해야지’라는 말을 스스로 주문처럼 되새겼다.

▲ 인도성지마다 직접 덖은 김해 장군차 공양을 올렸다.

기도가 끊어질 위기도 있었다. 천일기도를 시작한 지 499일째 되는 날, 눈앞을 분간하기 힘들만큼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그날도 예불을 위해 도반 한 사람을 차에 태우고 선원을 향하던 길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선원에 있던 불자들이 소리를 듣고 쫓아 내려와 사고 수습을 도와야 할 만큼 큰 사고였다.

“그날은 선원을 바로 코앞에 두고 길에서 마음으로 예불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사고 여파로 몸이 성치 않아 입원이 필요했고 일부러 선원 바로 옆 병원을 갔어요. 다치긴 했어도 걸을 수는 있었거든요. 다음날부터 새벽마다 병실을 나와서 예불에 들어갔습니다. 안타까운 건 함께 사고를 당한 도반이 결국 사고 이후부터 예불에 동참하지 않게 된 겁니다. 너무 미안했어요. 도반을 대신해서라도 천일기도를 꼭 회향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교통사고 이후에도 몸이 변치 않는 백 보살을 비롯해 2~3명에 불과하던 새벽예불 동참자는 점점 늘어나더니 천일이 가까워지면서 10명을 넘겼다. 2차 천일기도에는 12명이 꾸준히 참석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백 보살은 “이제 더 이상 스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죄송스럽지 않다. 열심히 수행하며 새벽을 밝히는 도반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천일기도 회향을 앞두고 다녀온 인도성지순례도 잊을 수 없다. 백 보살은 룸비니부터 쿠시나가라까지의 인도성지순례를 위해 정성껏 차를 준비해 성지마다 차 공양을 올렸다. 특히 그가 준비한 차는 직접 김해 야생차밭에서 딴 찻잎으로 덖은 ‘장군차’였다. 차 공양을 올릴 때마다 자신이 아닌 바라밀선원 불사의 원만 회향을 발원했다. 실제 천일기도가 봉행되는 동안 바라밀선원은 숙원사업이었던 신축도량 건립 계획을 수립했다. 1차 천일기도가 다시 2차 천일기도로 이어진 것도 대작불사의 길이 열린 덕분이었다. 1차기도 회향 당시 천일의 새벽을 한결같이 밝힌 그의 공로를 기려 바라밀선원에서는 백 보살에게 감사패도 전달했다.

“2차 기도는 쉬려고 했어요. 몇 년 전부터 여행을 계획한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중국을 다녀왔는데 그 뒤부터 다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큰 통증이 따랐고 영영 절을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마침 하안거 결제였고 마음을 추스르며 법당을 향했습니다. 절을 못하면 서서라도 동참하겠다고 생각했더니 언젠가부터 통증이 희미해졌네요.”

봄에 딴 찻잎이 가을에도 향기로운 것처럼 한결같은 수행자로 회향하고 싶다는 백 보살. 매일 새벽 주지 인해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고 기도를 거듭한 그의 정진은 다시 선원의 젊은 불자들에게 신행의 이정표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선원 입구 반가사유부처님도 그런 백 보살의 뒷모습을 부드럽게 감싸며 격려의 미소를 보내는 듯하다. 

김해=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1357호 / 2016년 8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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