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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의대와 병실에서의 설법

기자명 김정빈

수행 함께 하려는 마음의 종교 ‘불교’

지난주에 대승 경전들이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법(도성제)보다는 수행의 결과 도달하게 되는 열반의 경지(멸성제)를 설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말했는데, 이와는 달리 집성제에 집중하는 대승 경전(학설)들도 있다.

밝은 불교 지향하기 위해선
마음분석과 수행법 함께해야
미래위해선 사성제 기준으로
대승경전 위대한 부분 모아야

집성제는 중생의 마음을 분석하여 중생이 왜 번뇌에 휩싸이는지를 밝히는 부분이며, 이 부분에서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보다 매우 심오한 유식학(唯識學)을 내놓았다. 그런데 유식학에도 문제는 있다. 유식학은 마음을 분석하는 집성제 부분에서는 매우 탁월했다. 그렇지만 그 탁월함을 도성제로 전환하는 데에는 소홀했다. 유식학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마음을 닦으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는다. 분석하고 또 분석할 뿐이다. 유식학에 따르면 우리가 수행하여 부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3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한다.

중생의 마음을 분석하기만 하고 수행법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의사가 병자를 진찰만 하고 치료는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3아승지겁이 걸린다는 이야기는 병자가 환자에게 “당신의 병은 금생에는 나을 수 없을 것 같소”라고 말함으로써 환자를 절망케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래불교는 이런 암담함을 거부한다. 미래불교는 밝은 불교를 지향한다.

그 밝은 불교를 지향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멸성제를 설하는 경전, 집성제에 치중하는 학설을 모두 폐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렇지 않다. 멸성제를 설하는 대승 경전과 집성제에 치중하는 대승 학설은 모두 위대하고, 또한 소중하다. 문제는 그 위대함이 ‘흩어져’ 있다는 점, 그 위대함에 도성제 부분이 취약하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

이로부터 미래불교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도출된다. 미래불교는 대승 경전의 위대함을 ‘모아야’ 한다. 어떻게? 무엇을 기준으로? 그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다. 모든 것은 ‘사성제의 틀’에 담겨야 한다. 미래불교라는 이름의 사성제의 틀에서 대승불교는 멸성제와 집성제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성제는(고성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논의하기로 하겠다)? 그 담당자는 대승불교가 아니라 초기불교(삼학, 팔정도, 사마타와 위빠싸나)가 될 것이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불교가 마음의 종교라고 할 때, 그 말에 가장 딱 들어맞도록 연구에 연구를 집중한 분야가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초기불교의 육식설(六識說)을 팔식설(八識說)로 확장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무의식이라 불리는 마음의 심층을 프로이트와 융에 앞서 발견해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만이었다.

수행법에 관심이 적었던 것은 유식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불교의 현황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유로 말해보자. 의과대학에서는 의사가 될 학생들을 상대로 ‘병리학’을 가르치고, 병원에서는 병자를 상대로 질병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한다.

이 비유에서 앞의 예는 스님이나 법사 등 불교 지도자가 될 분들을 위한 설법에 해당하고, 뒤의 예는 일반 신자를 위한 설법에 해당한다. 한국 불교에서는 이 구별이 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일반 신자를 대상으로 전문 불교인을 위하는 수준의 설법이 행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일반 신자가 필요한 것은 당장에 내 눈앞에서 떨어져 있는 문제를 다루는 설법이다. “지금 내 몸이 아프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아픔이 나을까요?”하고 그들은 묻는다. 이런 이들을 상대로 불교 스승들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리학을 강의하기 시작한다.

그분들의 유식학과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이라는 이름의 병리학 강의는 언제 끝날까. 짧아도 일 년, 길면 수년이 걸릴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신자는 의사인 스승으로부터 자신의 병에 대한 치료를 받지 못한다. 이런 일이 실제 병원에서 일어난다면 병자는 항의할 것이다. “지금 당장 치료부터 해주세요. 나는 의사가 되려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병리학 지식은 나만 알면 족할 뿐 신자까지 알 필요는 없다”는 입장에서 치료부터 시작하는(치료해가면서 병리학을 강의하는, 병리학 강의를 치료법 도출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스승은 드물다.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57호 / 2016년 8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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