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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불자답게

기자명 성원 스님

“저는 불자이기 때문에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부럽습니다. 먼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북단 노천카페에서 강한 아라비아 음악을 들으면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가 손에 잡힐 듯 생생히 전해 옵니다.

불자가 지켜야 할 의무와 지침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 않기에
누구나 쉽게 불자다움 외면해
일상적 오계실천이 불자의 삶

예전에 보았던 영화 카사블랑카의 여주인공 역을 맞은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아름다운 여인들과 검정색 히잡을 둘러쓴 아랍 여인들의 사무치는듯한 갈망의 깊은 눈빛, 그들이 속삭이는 알아듣지 못할 이방인들의 언어 속에서 서로 불필요한 감정들을 드러낼 필요도 없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여정 잘 즐기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랍의 도시를 배회하다보면 가끔 들려오는 강한 사원의 예배소리가 싱그럽게 들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늘 그들의 생활 속에 가득 배어있는 신앙이 그 내용을 떠나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북경에서 공부할 때 아랍에서 온 급우들이 있어 모든 모임을 금요일에는 할 수가 없었고, 음식도 돼지기름이 묻은 음식, 또는 볶은 채소조차 주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급우들이 매우 불편해 하였지만 금세 모두가 현실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물색하고 친해졌습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우리 불교도들도 현실적으로 지키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계목들을 현실에 맞도록 수정하던가 아니면 매달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재일(齋日)에는 재계(齋戒)의 마음으로 철저히 계를 지키는 원칙을 강하게 적용하여 불자들이 스스로 불자임을 항상 각성할 수 있는 가운데 종교생활을 영위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늘날 단순히 ‘재일은 절에 가서 불공하는 날’로 인식하고 열심히 신행생활을 하는 불자들도 많지만 현실적으로 재일이라고 해서 시간을 내어 사찰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록 재일에 사찰에 가지 못하더라도 계율로 자신의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일상을 불교의 규범에 맞추어 생활하는 생활불교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대만에서는 범망경 보살계를 받은 사람이면 승려나 일반 불자나 모두 육식과 오신채를 먹지 않습니다. 내용적으로 그러해야 마땅합니다만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불교도들도 이러한 수준의 지계생활을 해야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첫걸음으로 수계불자들은 재일에 비린음식을 삼가고, 말을 조심하고, 음주를 하지 아니하고, 마음에 오직 불보살을 예경하는 정성 가득 담고 경건히 하루를 엮어가는 재일준수 운동이라도 펼치면 좋겠습니다. 옛날부터 지고한 신행을 유지하시던 어머니들처럼 말입니다.

너무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는 말아야겠지만 그래도 ‘저는 불자이기 때문에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작은 규범들이 우리 불자들에게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원칙이 타인을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들이 사회에 모범이 되는 원칙을 가지고 지켜나가는 운동을 펼칠 때 우리 불교가 이 사회에 더 분명한 모습으로 자리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언제보아도 불편해 보이는 아랍여성들의 히잡을 보면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그런 불편스러움을 조금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의 종교생활에 많은 관심이 갑니다.

현재 우리 실정은 불자가되면 어떠한 일을 삼가야하고 어떠한 의무를 져야한다는 지침이 불명확하고, 아니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기에 누구나 쉽게 불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너무나 쉽게 자신의 종교였던 불교를 져버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그냥 불자’라고 하는 말도 듣곤 한답니다.

불자와 비불자 (물론 타종교인과는 분명 구분하지만) 사이의 경계가 거의 없다시피 되어버린 현실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불교가 우리의 일상과 문화와 역사에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편하게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요즘 사회를 바라보다보면 스님들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듯합니다. 너무 엄격히 계율을 해석하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아무런 규범이 없는듯한 불자들의 생활은 분명 많은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름이라서 짧은 옷에 혹은 양말을 신지 않고 법당에 들어왔다고 작은 소란이 있었습니다. 법당에 신심 넘치는 보살님들이 많아서 참배객을 힐난하다가 벌어진 일입니다.

그날 법당보살들을 달래면서 ‘TV에 올림픽 중계를 보면 수영선수들은 물론이고 리듬체조뿐만 아니라 여자 육상선수들이 삼각팬티를 입고 수천 관중들 앞에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참배 온 불자들에게 뭘 그리 짜증을 내느냐’고. ‘그러지 말라’고 하며 달래긴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느 날에는 절에까지 와서 법당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배회하는 참배객에게 ‘왜 들어가 참배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뜻밖에도 ‘양말을 신고오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웃으면서 ‘부처님도 양말을 신으시지 않으셨으니 괜찮다’고 하며 참배하도록 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작은 일상에서도 우리는 어떠한 범주가 없으니 시시비비가 많아지고 서로 오해의 소리가 잦아지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남방사원에 갔더니 입구에서 일회용 양말을 주고 입장하게 하고, 입구에 사진촬영금지, 짧은 소매, 핫팬츠 차림으로 입장하지 말라는 안내 그림을 부착해 두었더군요. 우리들도 우리만의 알맞은 규정을 정하고 생활하면 오히려 편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불자들의 일상 어느 곳에서나 불교의 사상이 가득 스며나는 일상이 펼쳐지면 좋겠습니다. 세상 먼 곳을 여행할 때 굳이 드러내지 않더라도 부처님의 자비가 넘쳐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배려라는 말이 화두인 것 같습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이것이야 말로 불교의 자비 아니겠습니까? 자비라는 우리 불교의 말보다 배려라는 사회언어가 더 우리주변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세상에 부처님의 자비가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가 우리를 물들이려하고 있는 현실이 마음 아픕니다.

저도 일상을 떠나 이방의 언어와 이질적인 가락의 노래 소리에 묻혀 잠시 엉클어져버린 나도 잊은 채 깊은 휴식이라도 취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이토록 일상에 쫓기듯 바빠도 되는 건가? 떠나기 못내 싫어하는 폭염! 오랜 밤 함께 지새워도 친해지지 못하는 열대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의 가련한 수인(囚人)으로부터.

성원 스님 sw0808@yahoo.com
 


[1357호 / 2016년 8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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