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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소식의 예술과 미학-상

기자명 명법 스님

‘문인화’라는 새로운 예술영역 개척하며 중국미학에 큰 영향

▲ 소식 진영.
북송시대 대문호 소식(蘇軾, 1037~1101)의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東坡)인데, 이 호는 폄적(벼슬자리에서 쫓아내고 귀양을 보냄)을 당해 황주에 머물던 소식의 궁색한 생활을 보다 못한 친구 마정경(馬正卿)이 관청에 요청하여 얻었던 자갈땅 ‘동쪽 언덕(東坡)’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이 땅을 손수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동파’라는 호는 고난을 당해서도 굴하지 않는 소식의 낙천적인 성격이 무엇보다 잘 표현하고 있다.

탁월한 예술가 및 이론가로
중국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글과 글씨, 그림에 모두 능통
사상가로도 탁월한 업적 남겨

수차례 벼슬에서 쫓겨나도
끝까지 비판정신 잃지않아

예술 억압했던 주희와 달리
인격 수양 도구로 격상시켜

동파의 업적은 후세에 크게 세 방면으로 평가된다. 첫 번째, 문장가, 예술가로서의 업적이다. 그의 문장은 기세가 웅장하고 자유분방하며 문장이 명확하고 유창하여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호방(豪放)하며 그의 사(詞)는 호방파의 새로운 사풍을 열었으며, 후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행서, 해서에 뛰어났으며 용필이 풍성하며 기름지고 거침이 없어서 황정견, 미불, 채양과 함께 서예에서도 ‘송대 사대가’로 불린다. 또한 대나무와 고목괴석도 잘 그렸는데, 중국문학사와 예술사를 빛냈던 기라성 같은 인물들 중에서도 이처럼 다재다능하면서도 모든 분야에서 탁월했던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소식의 문장은 과거에서 본받아야 할 문장으로 칭송되었는데, 당시 “소식의 문장을 알면 양고기를 먹고 소식의 문장을 알지 못하면 채소국을 먹는다(蘇文熟 吃羊肉 蘇文生 吃菜根)”는 속담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문장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일찍이 소식의 문재(文才)를 알아봤던 구양수(歐陽修, 1007~1072)가 했던 말을 통해서도 소식의 탁월함을 알 수 있는데, 구양수는 소식의 글을 읽고, “부지불식간에 땀이 흘렀다. 통쾌하고 통쾌하다. 늙은이가 마땅히 길을 비켜서 그에게 나아갈 얼마간의 땅을 내주어야겠다. 참으로 기쁘다(不覺汗出. 快哉, 快哉! 老夫當避路, 放他出一斗地也. 可喜, 可喜! ‘與梅聖兪’)”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30년 후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三十年後世上人更不道着我.)라고 칭찬했다고 하는데, 구양수의 예언대로 소식은 구양수의 뒤를 이어 북송문단의 영수로 활약했다.

이 일화를 통해 소식의 재능이 초년부터 빛났음을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인재를 발굴하려는 구양수의 열정과 인재를 알아보는 그의 탁월한 안목에 감탄하게 된다. 북송시대 문(文)의 부흥은 구양수의 인품과 탁월한 안목에 빚지고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탁월한 인재 뒤에는 그를 알아보고 인정하고 키워주는 스승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 시대의 빈곤을 되돌아보게 된다.

소식은 오늘날까지 중국인이 가장 애호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소식에 대한 최근까지의 연구가 그의 예술가 및 예술이론가로서의 삶에 중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적 업적이 가려져 있었지만 소식은 사상가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현재 남아 있는 저술이 몇 편 되지 않지만, 소식은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과 아우 소철(蘇轍)과 함께 촉학(蜀學)을 완성했는데, 그의 출신지 사천의 이름을 딴 이 학풍은 정호·정이 형제의 낙학(洛學)과 북송시대 유가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중요한 사상 내용을 갖는다.

소식 역시도 죽기 전까지 자신을 문사라기보다 사상가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지은 글이 많으나 단지 ‘역(易)’, ‘서(書)’, ‘논어(論語)’ 이 세원을 어루만지며 보면 내가 헛되이 살지는 않았음을 느낀다.”(某凡百如作, 但撫視‘易’,‘書’,‘論語’三書, 卽覺此生不虛過)는 말에서 사상가로서의 업적에 강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아우 소철이 기록하듯이, 정치가로서 소식은 당대 정치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거침없는 비판, 그리고 관리로서의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인물이다. 수차례의 폄적을 거치면서도 그의 비판정신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의 곤경은 마침내 심원하고 걸림없는 인생의 경지로 승화되었다. 유배기간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동파육은 그가 얼마나 따뜻하고 활발하며 걸림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잘 보여준다.

예술과 미학사상에서 그의 업적은 유가, 불교, 도가의 철학과 심미관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과거의 미학사상 가운데 중요한 유파를 한데 모은 것으로부터 시대를 선도했다. 특히 소식을 비롯한 당시의 사상가들이 시·문·화에 대해 보편적 가치 근원인 도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구양수, 소식 등은 시와 회화의 위상을 궁극적인 도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했다. 이들이 가졌던 문도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선종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이 단계의 발전은 송대 발달한 선종의 문자화 경향을 수용하여 문(文)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성숙시킨 것으로, 그 결과 문(文)을 도(道)에 종속된 도구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 행위 그 자체를 도(道)를 추구하는 수행 행위로 격상되었으며 예술 활동은 문인 사대부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수단이자 그들의 인격 수양의 매체로 수용되었다.

▲ 북송 때 화가 교중상(喬仲常)이 그린 ‘후적벽부’.

북송시대 문도(文道) 관계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통해 문(文)에 대한 좀 더 포괄적 해석이 가능해짐에 따라 문학에서의 변화와 함께 회화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인화의 등장이다. 그 때까지 화공의 활동 영역에 속했던 회화가 문인들에게 적합한 활동으로 인식되었으며, 소식에 의해 시인이면서 화가였던 왕유가 이상화됨에 따라 ‘시화일률(詩畵一律)’의 개념이 출현했다.

문인화(文人畵), 즉 ‘사인화(士人畵)’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소식(蘇軾)이었다.

“사인화를 보는 것은 천하의 말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 의기가 도달하는 바를 취한다. 만약 화공이라면 종종 채찍과 가죽과 털을 취하기만 하여 한 점도 뛰어난 것이 없어서 몇 척을 보면 피곤해진다. 한걸은 진정한 사인화이다(觀士人畵如閱天下馬 取其意氣所到 若乃畵工 往往只取鞭策皮毛槽櫪刍秣 無一点俊拔 看數尺許便倦·····漢杰眞士人畵也).” ‘又跋漢杰畵山’ (‘蘇軾全集’ 권70, p.2194.)

‘문인화’ 개념은 구체적 양식이나 화법이 정립된 장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대부들이 제작한 회화를 가리킨다. 사대부들은 그들이 체득한 서법의 운필을 빌어 간명한 수묵화를 제작하였는데, 소식이 “시로는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넘쳐서 서예가 되었고, 이것이 변하여 그림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시의 여분이다”(詩不能盡 溢而爲書 變而爲畵 此詩之餘, ‘文與可畵墨竹屛風贊’)라고 말했듯이 그것은 제작자의 신분이 사대부였기 때문에 표출해 낼 수 있는 문자향이 강조되었다.

문도관계에 대한 논쟁이 촉발시켰던 문(文)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한 반성이 모든 예술 활동에 영향을 미쳐서 시와 회화는 사대부의 정체성 확립의 수단으로 격상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시와 회화는 모두 주관의 내면성과 정신을 표현하는 매체가 되었다. 이처럼 주관의 내면성이 회화의 관심사가 되면서 주제가 인물에서 산수로 전환되었다. 황정견이 주장하듯이 “고명한 안목과 박대한 식견을 갖추어야 비로소 산을 볼 수 있고 물을 볼 수 있기”(高明博大 始見山見水) 때문이다.

이 변화가 시작된 것은 위진남북조시대였다. 이 시대에 비로소 산수화와 산수시라는 새로운 장르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중국인의 자연관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산수시나 산수화의 제작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경험인 ‘자연을 본다’는 것은 관찰자의 관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예술가의 주관이 작품 제작에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게 된다. 초상의 경우, 예술가의 주관이 작용할 여지가 거의 없으며 예술가는 가급적 자신의 주관을 최소화하여 그것이 정신이든 형상이든 대상에 핍진(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해 가야만 한다. 그러나 산수자연이 회화의 주제가 되면 작가의 시점이 중요해진다. 이 점은 서양의 원근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양의 원근법은 근대적 자아가 확립된 르네상스에 비로소 발명될 수 있었다. 서양 원근법의 작가는 보편적 주관이며 그 보편성은 수학과 기하학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이었던 데 반해, 중국 회화의 작가는 유람하는 자이자 관조하는 자이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주관이다. 이것은 중국 산수화의 전개가 서양의 풍경화와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흥미롭게도 중국에서의 자연산수에 대한 자각 역시 ‘인간의 자각’ 시대였던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루어졌다. 산수화에서 유람하고 관조하는 자로서의 작가의 주관이 중요해졌다는 사실은 산수화의 제작자에게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기를 요구했다. 이러한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존재는 사대부 계층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대부가 산수화의 제작 주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중국 회화의 위상이 격상된 것은 서양에서처럼 회화도 학적인 활동이라는 주장을 통해 어렵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 사대부 계층이 회화 창작에 참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산물이다.

소식 이전에 사대부로서 회화 활동에 종사했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 문인사대부들의 활동은 과거 사대부들의 활동과 전혀 성격이 달랐다. 사대부가 제작한 그림이 화공의 그림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고 ‘사인화’라고 정의했다는 점에서 소식 화론의 의의는 매우 크다. 시와 회화가 사대부들의 문화적 소양과 덕성 수양의 필수불가결한 방편으로 이해되면서 두 장르가 융합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시화일률의 관념으로 이어졌다.

남송 중기 이후부터 사상계의 주류를 형성한, 주희를 대표로 한 성리학 전통이 중국 사대부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으로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서·화에 대해서 적극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에 남송 이후 중국사에서 예술을 억압하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과 달리, 탁월한 예술가요 예술이론가로서의 소식의 지위는 지금까지도 확고하며, 이후 문인화를 비롯한 중국예술과 미학사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식과 주희의 대립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예술과 미학사상에서 명확히 대립되는 사상적 대립의 시발점이 된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57호 / 2016년 8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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