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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길상천 혹은 락슈미

불교 귀의 전 세속의 번영·풍요 관장하던 힌두 대표 여신

▲ 산치(Sāñcī) 제1탑. 기원전 1세기경. 북쪽 토라나 바깥 면에 새겨진 락슈미 조각. 락슈미 자신뿐 아니라 양옆의 코끼리들도 연꽃에 올라가 물을 뿌리고 있다.

길상천 또는 공덕천(功德天)은 힌두교의 대표적인 여신 가운데 하나인 락슈미를 말한다. 다른 신중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통해 들어왔던 이 여신 신앙이 현재 한국에 정확히 전해지지는 않지만 고려 당시만 해도 널리 유행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과 같은 법석을 통해 가뭄과 전염병과 같은 국가의 재난을 피하고자했던 단서들이 잔존한다. 중국이나 일본은 이 여신과 관련된 도량법이 전해지고 현재 이 신상(神像)도 전해지지만 한국에서는 길상천의 도상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른 많은 신중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전기 이후부터 불교를 기반으로 했던 수많은 신앙의 대상들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이 여신의 숭배는 가장 오래된 불교의 신 가운데 하나였으며 현재까지 인도와 네팔 등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힌두교와 불교, 또는 자이나교의 신이기도 하다.

행운·복·상서로움 뜻하는 ‘슈리’
동아시아서 길상천·공덕천 명명

불교 유입될 때 업설과 화해 필요
불교선 여신 도움이 유용하려면
선한 의도와 행위 전제됨을 설명

길상천은 대지·중생에 삶 부여한
생명력으로서의 물 상징하기도
한국불교선 고려까지 널리 유행

슈리슈리(Śrī) 또는 락슈미(Lakṣmī), 혹은 이 두 단어를 합쳐서 슈리락슈미 등으로 불리는 이 여신은 대표적인 힌두의 여신이다. 동아시아에서 이 여신을 길상천, 공덕천 등으로 부르는 이유는 ‘슈리’라는 뜻에서 온 것이다. 이는 ‘행운’ ‘복’ ‘상서로움’ 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락슈미의 의미도 유사하게 ‘징표’ ‘길상(吉相)’ 등을 뜻한다. 이 여신의 이름 앞에 크다는 뜻의 마하(mahā)를 붙여 마하슈리(Mahāśrī)라고 부르는데 음사하여 마하실리(摩訶室利)라 옮기기도 한다.

이 여신의 등장은 아마도 불교가 등장하기 이전의 베다 문헌인 리그베다 킬라(Rigveda khila: 대략 기원전 5세기경) 속의 한 게송(Śrīsūkta)에 등장하는데 여기서 슈리와 락슈미가 동일한 여신으로 등장하며, 명예와 풍요, 가축과 음식, 재산 등의 번영을 약속하는 여신으로 등장한다. 이 여신과 후대에 자주 연결되는 연꽃과 코끼리의 상징도 이 때 등장한다. 이 여신의 탄생은 잘 알려진 소위 ‘우유의 바다 휘젓기’ 신화 속에 등장한다(본 연재 가운데 ‘간다르바’ 편에 소개한 바가 있다). 데바와 아수라가 협력하여 불사의 감로수를 만들기 위해 바다를 휘젓게 되는데 이 때 바다에서 여러 신적 존재와 보석들, 그리고 최후로 불사의 감로수가 만들어진다. 이들과 함께 바다에서 탄생한 여신이 바로 슈리이다. 이 여신을 비슈누 신이 부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내용은 마하바라따에 잘 그려진다. 많은 도상들 가운데 비슈누의 부인으로 등장하는 락슈미를 가장 많이 만나게 된다.

보통 힌두교 최고의 신인 비슈누의 배우자로 많이 알고 있지만 이 여신은 아마도 초기에 독립적인 여신으로 숭배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장 초기의 도상들은 대부분 특정 남신의 배우자로 등장하기 보다는 독립상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락슈미가 처음 보여주는 신적인 속성은 비슈누가 아니라 아그니 신의 특징들을 더 많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굽타시대부터 이 여신은 비슈누의 온순한 부인으로 신화와 조각 속에 등장한다.

락슈미 신이 불교로 들어올 때 이 여신의 기능적 특징들, 말하자면 신자들에게 재물의 풍요와 번영, 행운을 안겨주는 역할은 거의 변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러한 역할 때문에 초기 불전에는 이 힌두 여신을 받아들일 때 약간의 대립과 긴장, 그리고 화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번영과 풍요, 또는 명예의 획득은 오랫동안 슈리 또는 락슈미 여신이 부여해주던 일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복덕의 근원을 설명하는데 불교의 업설과 일정한 화해가 필요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전생 또는 현생의 업에 의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예를 들면 ‘시리 자타카(SirīJataka)’에 잘 묘사되어 있다. ‘시리 자타카’에서 붓다는 선량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코끼리 조련사가 우연히 왕이 될 수 있었던 예를 들면서, 누구나 부와 행운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락슈미의 도움이 있어야 하지만, 그 여신의 도움이 유용하게 자신에게 작용하기 위해서는 선한 의도와 행위가 전제되어야함을 설명한다.

▲ 본래 락슈미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의 부인이었다. 그림은 6세기 초. 데오가르의 비슈누 사원의 남측 조각 패널. 잠들어 있는 비슈누의 발을 잡고 마사지 하고 있는 락슈미의 모습.

유사한 ‘자타카’ 속에서 여신 락슈미는 기원정사의 보시행으로 유명한 수달장자(須達)에게 나타난다. 수달장자의 집 꼭대기에 살고 있던 락슈미는 수달장자의 부와 명예를 보존해주고 있었다. 수달장자는 그 재물들을 통해 늘 불보살과 스님들을 위해 아낌없이 보시하곤 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 집을 지나갈 때마다 집 꼭대기에서 내려와 인사를 해야 했던 락슈미는 수달장자가 부처님에게 공양하지 못하도록 아예 그를 가난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면 보시를 더 이상 못할 것이고 자기는 집 꼭대기에서 내려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달장자는 부처님에게 공양할 것이 죽 한 그릇 밖에 남지 않았어도 그에 대한 믿음과 보시행을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 락슈미는 수달장자에게 불평했다. 붓다에 대한 믿음과 공양을 포기할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곧장 부자로 만들어주겠노라고 설득하려했다. 그의 믿음은 확고했으므로 오히려 수달장자는 자신의 집에서 그 여신을 쫓아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자신의 거주처를 잃어버릴 것을 염려한 여신은 오히려 장자에게 용서를 빌며 오히려 돈벼락을 내려서 그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이후 수달장자는 여신을 부처님에게 인도하여 불교에 귀의토록하고, 여신은 계속 그 집에 머물며 장자의 부와 행운을 지키는 역할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설화는 불교 속에서 힌두 신이 들어와 조복되면서 그 본래의 기능이 불교적으로 융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의 위상이 바뀌기는 했어도 그 고유의 역할을 바꾸지 않은 채로 불교신자들의 관습적인 신앙 속에 계속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 재물과 행운의 여신에 대한 신앙은 불교 속에 들어와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길상천에 대한 구체적인 주술적 신앙방법이 담겨있는 ‘금광명경(金光明經)’ 등과 같은 대승경전의 유포와 함께 코탄(Khotan) 등지에서 특히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이 경전의 여러 판본들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매우 독특한 길상천의 조각도 발견되었다. 코탄에서는 이 길상천을 샨드라마타(Śandrāmatā)로 불렀는데 이는 땅의 여신을 뜻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는 불멸의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더구나 코탄의 길상천은 여러 경전 속에서 빈번하게 비사문천(毘沙門天)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비사문천은 지난 연재에서 다루었다). 특히 비사문천의 발밑에서 가슴 위쪽의 상반신만을 드러낸 채 땅에서 솟구쳐 나오는 듯한 조각상은 이 길상천이 땅의 여신으로 기능했음을 더 분명하게 말해준다. 비사문천은 하늘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길상천은 땅의 여신으로, 두 신은 짝을 이루어 대표적인 코탄국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상천이 땅의 여신으로 변모했다는 것은 그렇지만 크나큰 변화라 할 수 없다. 호탄국의 창건자가 이 여신의 지유(地乳)를 먹고 자랐다는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력’의 부여자로서의 길상천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길상천은 통상 물질적인 행운과 풍요, 세속적인 영예의 신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 여신이 보여주는 특성을 그의 도상 속에서 살피면 그보다는 좀 더 폭넓게 해석된다.

▲ 엘로라(Ellora)의 쉬바 신전인 카일라사나타 사원의 출입구 안쪽 벽면 조각. 마치 연꽃이 가득한 연못 속에 있는 듯하다. 8세기 후반경.

길상천의 흔적은 처음 기원전 2∼3세기경 바르후트 탑이나 산치 탑 등에서 나타난다. 유사한 시기의 동전 속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때의 모습은 어떤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즉 앉아있거나 서있는 길상천 양 옆으로 두 마리의 코끼리가 물 단지를 거꾸로 길상천의 머리 위로 들어서 물을 뿌리고 있는 모습이거나 코끼리 코로 물을 뿜고 있는 모습이다. 이 형태는 통상 가자-락슈미(Gaja-Lakṣmī)로 불리는데 불교와 힌두교 또는 다른 종교 내에서 함께 공유하고 있는 공동의 종교유산이다. 이 형태는 불교 내 조각 속에서 빈번할 뿐만 아니라 힌두교 사원 조각 속에도 많이 나타난다. 이 조각이 의미하는 바는 물과 그로 인한 풍요로움을 뜻한다. 물론 마치 왕권의례에서 보는 것과 같은 관정(灌頂)을 연상시키므로 신성한 권위의 표현으로 고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력을 부여하고자 하는 물의 이미지는 여기서 너무 강력하다. 조각 속에 등장하는 코끼리는 상징적으로 구름을 의미하는데, 옛 인도 신화에 따르면, 코끼리는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동물이었고 원하는 곳으로 가서 비를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성자(聖者)의 저주를 받아 날개를 잃은 채 떠돌아다니는 동물이 된 것이다. 이 덩치 큰 동물의 무리와 그들이 내는 소리는 폭우를 쏟아내기 직전의 천둥소리와 검은 구름떼를 연상시킨다. 각설하고, 길상천 또는 락슈미의 상징은 행운과 풍요를 넘어, 대지와 중생들에게 삶을 부여하는 생명력으로서의 물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이 여신과 떨어뜨릴 수 없는 상징물은 바로 연꽃이다. 코끼리가 함께 하지 않을 때도 길상천은 거의 대부분 연꽃 위에 서 있거나 앉아있으며 또는 연꽃을 들고 있다. 때로는 연꽃 가득한 연못에 모습을 드러낸다. 인도의 천상은 주기적으로 이 연못으로부터 비를 내린다. 코끼리와 연꽃 모두 이 여신이 보여주는 생명력의 상징을 보여준다. 

심재관 상지대 교양과 외래교수  phaidrus@empas.com


[1357호 / 2016년 8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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