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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괴산 남화사 주지 대우 스님

율장에 뿌리내린 단단한 출가정신으로 선교율 겸수한 수행자의 표상

▲ 율장을 배우기는커녕 율사 만나기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스님은 "오늘날 율장을 학문으로만 대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며 출가자의 기본이 계율서 출발함을 강조했다.

생과 사가 하나로 뒤엉켜 있었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끔찍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아직 도량석도 울리지 않은 새벽녘, 이제는 정말 떠날 때가 되었음이다.

형제자매 없던 14살 행자에게
대중 많은 절집안은 별천지
“너무 좋아 사방 뛰어다녀”

강원 졸업 후 ‘결국엔 마음’
10안거 성만한 선객으로 10년
율장 배울 곳 없는 아쉬움에
묘엄 스님 회상서 강사의 길

율장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
세납 48세에 중국으로 유학 후
봉녕사 금강율원서 연구 매진
“수행자 기본은 계율서 시작”

“여기서 네 해만 더 살자.”

봉녕사승가대학장 묘엄(1931~2011) 스님은 세 번이나 남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생사가 급하니 더 머물 수 없다”는 정지대우(正智大愚) 스님을 묘엄 스님도 더는 잡지 못했다. 1997년 4월. 햇수로 14년 몸담았던 강단에서 대우 스님의 퇴임식이 열렸다. 떠나는 강사 대우 스님을 위해 묘엄 스님이 마련해준 자리였다. 수많은 강사들이 오가는 승가대학에서조차 흔히 볼 수 없는 퇴임식, 더 없이 아름다운 회향이었다.

하지만 회향을 말하기에는 아직 성급하다. 오히려 대우 스님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 남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충북 괴산 남화사를 찾았다.

인적이 끊기는가 싶은 길 끝에 절이 있다. 번듯한 일주문은 없지만 대웅전을 받쳐 모신 석축이 제법 당당하다. 주지 소임을 맡은 지 올해로 꼭 10년째다. 하지만 한눈에 보아도 절 살림은 단출하다. 방 뒤 켠 쪽문을 활짝 여니 탁 트인 뒷마당을 가로질러온 산바람이 한 점 걸림 없이 오간다. 담박한 스님의 살림과 꼭 닮은 꼴이다.

14살에 출가했다. 부친은 재가선수행의 거두 종달 이희익 거사다. 현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 창간의 주역이자 불교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종달 거사는 재가선수행단체인 선도회를 창립, 초대 지도법사로 수많은 재가수행자들을 이끌었다. 고요하고 차분했던 부친은 집안에서도 늘 공부하고 수행하는 모습이었지만 무남독녀 외동딸의 마음은 때때로 알 수 없는 답답함에 휩싸이곤 했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죽을까. 죽는다는 것은 또 뭘까.’ 8살에 모친을 여의고 10살 남짓, 벌써 세속은 그리 미련을 둘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13살에 처음 본 한 스님의 정갈한 모습이었다.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 불교에 관심을 가졌을 듯하다.
“아니다. 집안에서 불교신문을 쉽게 보긴 했지만 옛날 설화나 이야기들을 좋아했을 뿐이지 불교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었고, 스님을 본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14살에 출가하게 된 계기는.
“당시 법주사 주지였던 추담 스님이 부친과 친분이 있어 어느 날 우리 집에 오셔서 저녁 공양을 하셨다. 스님을 가까이서 뵌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다른 반찬은 하나도 안 드시고 오직 간장만 찍어서 공양을 하시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 정말이네, 스님들 고기 안 드신다더니 정말이네’ 하며 놀랐다. 그 모습이 너무 거룩해 보여 나도 출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친은 “네가 어떻게 스님이 되겠냐”며 “어림없다” 했지만 그 말은 오히려 ‘내가 뭐 어때서. 나도 잘할 수 있다’며 발심을 부채질했다. 결국 이듬해 부친은 손수 딸이 출가할만한 사찰을 물색했다. 바로 마포 극락암이었다. 하지만 “스님들 많이 계신 절에서 출가하겠다”는 고집에 인연은 추담 스님의 주선을 통해 법주사 수정암으로 이어졌다. 14살 행자에게 수정암은 별천지였다.

▲낯선 곳에서의 행자 생활이 어렵지 않았나.
“어려운 게 다 뭔가. 정말로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수정암에는 스님들이 30여명 넘게 계셨는데 ‘여기가 천상이구나’ 싶었다. 마침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 김부각, 감자부각 같은 별식들을 했는데 전부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사과 한 쪽, 배 한 쪽, 밤 한 톨씩 똑같은 찬합에 담아 스님들 앞에 놓고 차담 하시는 모습도 이 세상 광경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스님들이 어린아이인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 주셨다. 당시 쾌유(1907~1974) 노스님이 모기장 안에서 나를 데리고 주무셨다. 그때는 그 스님이 어떤 어른인줄도 모르고 노스님 주무신다 싶으면 몰래 빠져나와 다른 스님들 방에 놀러가곤 했다. 형제자매도 없이 부친과 둘만 외롭게 지내다 절에 오니 사람이 많은 것도 좋았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은 스님들도 계셨으니 그야말로 신이 나서 사방천지로 뛰어다닌 게다.”

쾌활하고 당찬 천성이 외로움에 메말라있다 비로소 물을 만난 셈이었다. 천지사방 둘러봐도 아무도 없던 속가와는 달리 어디로 가든 ‘예쁘다’ 봐주시는 스님들이 있었다. 보는것 마다 새롭고 환희로웠다. 그렇게 한 달여 만에 ‘귀여운 어린 행자’는 ‘감당 안 되는 아이’가 돼 버렸다.

덕분에 엄한 은사를 만났다. 호관 스님이었다. 부친이 처음 점찍어준 마포 극락암의 은사가 바로 호관 스님이었다. 대우 스님이 수정암에서 ‘뛰어다니던’ 한 달 여 사이에 호관 스님은 가섭사 주지 소임을 맡았고 법주사 말사 등록을 위해 수정암에 들른 참이었다. 때마침 수정암에서 ‘감당 안 되는 아이’에 대한 대중 스님들의 호소를 들은 추담 스님이 호관 스님을 은사로 정해 주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인연이 한 걸음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은사스님은 어떤 분이었나.
“추담 스님이 나를 불러 ‘이 스님 따라가라’ 하시기에 두 말도 않고 따라나서 극락암에서 삭발하고 가섭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은사스님은 시은을 무겁게 여기고 사상이 반듯하셨다. 그러니 너무 나대는 내 성품을 좀 다스려야겠다 싶어 더 엄하게 가르치셨을 것이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은사 아래서 나 같은 덜렁이가 행자를 살았으니 은사스님도 얼마나 속을 끓였겠나. 하지만 나도 행자살이가 너무 힘들어 도망간 적도 있다. 서울 승가사로 가서 ‘공양주라도 살겠다’니 스님들이 ‘새 스님이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며 받아주질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딜 가도 안받아주겠다 싶어 다시 가섭사로 돌아왔다. 은사스님은 별말씀 없이 얼마 후 강원에 보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은사스님의 은혜가 끝이 없다.”

하지만 엄한 은사 만났다고 쉽게 눌릴 기운도 아니었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던가. 대우 스님에게 출가는 숨길 수 없는 사랑과도 같은 기쁨이었다. 18살, 동학사승가대학에 입학한 후 그 환희는 고스란히 경전으로 이어졌다. 부처님의 말씀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경이로운 세계였다. 지형, 상덕, 일연 스님 등 평생의 도반들도 승가대학에서 만났다. 무엇보다 당대의 대강백 호경기환 스님이 동학사승가대학에 오신 후 “책도 없이 칠판에 판서하시며 강의하는 모습이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학인들이 눈을 떼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대우 스님의 공부도 그야말로 날개를 달은 듯 막힘이 없었다. 호경 스님도 대우 스님의 총명함을 눈여겨봤다. “내 밑에서 3년만 재강을 하면 전강을 해주마”하며 대우 스님이 강원에 남길 권했다. 일초 스님과 함께 3년을 철썩같이 약속하고 재강을 시작했지만 초등학교에서 멈춰 선 배움에 대한 미련이 또 고개를 들었다. “대학 가서 공부를 더 하자”는 지형 스님, 일연 스님의 말에 재강 1년 여 만에 보따리를 싸들고 은사스님의 허락을 받으러갔다. 하지만 “스님 됐으면 참선해야지 무슨 대학.” 은사스님은 꿈쩍도 안했다. 은사스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말문을 닫고 방에 틀어 앉아 책만 들여다봤다. 무언의 시위였다. 그렇게 5~6개월이 지나가 은사스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 맘대로 해라. 학교를 가든, 선방을 가든, 유학을 가든.”

▲선방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막상 은사스님이 ‘네 마음대로 해라’ 하시니 며칠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지금 대학을 가서 끝까지 공부를 한다면 박사가 되는 것인데, 박사가 되면 무엇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호경 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한번은 호경 스님이 대선사이신 전강(1898~1975) 스님과 나누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나도 일찌감치 (전강) 노스님처럼 참선 했으면’하며 후회하시는 말씀이었다. 당대의 대강백도 이런 후회를 하는데, 마음을 깨닫는 것과 경을 본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는 것은 선방이구나 싶었다. 선방으로 향했다.”

꼬박 10년을 선객으로 살았다. 내원사를 시작으로 전국의 선방에서 10안거를 성만했다. 내원사에서는 3년 결사에 들어 산문 출입을 끊고 정진하기도 했다. “출가 후 바로 선방으로 향해 누더기 한 벌로 정진하는 스님들을 보니 강원에서 공부한 것이 그저 알음알이 하나 더 짊어지고 온 것 같아 부끄러웠다”는 스님은 늦어진 세월을 보상이라도하려는 듯 더욱 열심히 정진했다. 하지만 급하게 먹는 밥에 어찌 탈이 없으랴. 성급한 마음은 상기를 불렀고 스님은 공양주 소임을 자청하고 묵언하며 하루 2000배의 절을 하며 스스로를 다스리기도 했다.

▲10년 넘게 선객으로 살았는데 84년 강단에 서게 된 이유는.
“참선하는 사람이 다 놓아야 하는데 오가며 책이 보이면 꼭 들춰보고야 말았다. 이건 무슨 책인가 싶어 지나치질 못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깨치겠다고 화두를 잡으면서도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출가자가 되어서 경전에 해박하지도 못하고 배울 것을 다 배우지도 못했다는 미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스님이라면 부처님 말씀을 잘 알아야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경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특히 계율에 대한 갈증은 점점 더 깊어갔다. 스님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기본은 계율을 잘 알고 지키는 것이었다. 선방 정진을 하면서도 해제철만 되면 계율을 배우러 다녔다. 동학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비구니계를 수지한 후에도 수계산림이 열린다고 하면 찾아가 계율에 관한 법문을 듣기도 했다. 때마침 진관사에서는 제1회 계율특강이 열렸다. 전국의 승가대학 졸업생 가운데 중강급 스님들을 대상으로 마련된 연수교육이었다. 도반인 지형 스님이 선방에서 안거 중이던 대우 스님의 이름으로 신청서를 접수했다. “지금도 지형 스님에게 가장 고마운 점”이라는 대우 스님은 진관사를 시작으로 운문사와 봉녕사로 이어진 2, 3차 계율특강을 모두 찾아다니며 율장에 대한 목마름을 풀어나갔다.

▲ 봉녕사승가대학장 묘엄 스님(사진 오른쪽)은 스님이 가장 존경하는 일생의 스승이다. 사진출처=‘한국비구니수행담록’

▲율장을 배우기가 그렇게 힘들었나.
“지금은 비구니 율원도 있지만 그때는 비구니 율사를 만나기도 어려웠다. 진관사 계율특강 후에 뜻이 맞는 스님들 여섯 명이 모여서 일타 스님에게서 율장을 배우고 싶다고 청해 허락을 받았다. 76권 되는 율장집도 잔뜩 사놓고 해인사 인근에 거처로 쓸 암자까지 다 알아봐 놓고는 가을 즈음에 배우러 갈 일만 남았었다. 그런데 일타 스님 건강이 않 좋아지셔서 시작도 못해봤다. 비구 스님에게 율장을 배우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싶었다.”

3차 계율특강이 1984년 봉녕사에 열렸다. 회향을 하루 전날 밤 9시가 다 된 늦은 시간에 묘엄 스님이 대우 스님을 찾았다. 봉녕사승가대학에서 중강을 맡아보라는 권유였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릴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묘엄 스님에게 율장을 배우고 싶었지만 강원 졸업한 지 10년이 넘어 다시 봉녕사승가대학에 입학할 수도 없고, 묘엄 스님과는 별다른 인연도 없으니 무턱대고 부탁할 수도 없어 말도 꺼내보지 못했던 터”였다. ‘중강을 살 수 있겠냐’는 말씀에 대우 스님은 이런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묘엄 스님은 “내가 율장을 가르쳐 줄 테니 중강을 맡으라”고 재차 권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선객으로 산 세월이 벌써 10년이었다. 강사 생각을 해본 적도 없으니 준비가 돼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묘엄 스님은 “좋은 사상으로만 가르쳐라”며 재차 신뢰를 보이셨다. 그 믿음에 보답하고자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을 새웠다.

처음 맡은 치문반부터 녹록치 않았다. ‘치문’은 초심자가 배우는 과목이지만 그 내용은 온갖 경전서 인용된 경구와 조사 스님들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다. 원전과 출처를 찾다 보면 날이 밝도록 팔만대장경 속을 파헤치고 다니기 일쑤였다. 새벽예불부터 시작해 강의와 학인스님 상담 등 빽빽한 하루일과를 마치고 나면 저녁공양 후인 7시 반이 넘어서야 비로소 개인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면 탁상시계를 뒤집어 놓고 “지금은 오전 10시다” 생각하면서 다음날 강의 준비하며 밤을 밝혔다. 그렇게 꼬박 1년을 살았다.

▲승가대학 졸업 후 호경 스님에게 재강도 했는데 치문반 지도가 그렇게 어려웠나.
“배우는 것은 대충 배워도 되지만 가르치는 것은 정확해야 한다. 더구나 선방으로 가며 다 버린 것이었다. 버렸던 것을 다시 하려니 더욱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하루살이 품팔이나 다름없었다. 경험 많은 강사한테 배웠으면 한 마디만 해도 척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경험 없는 내게 배우느라 당시 학인들이 고생 많았다.”

치문반만 다섯 번을 반복해 맡았다. “이것이 완벽하지 못하다면 윗 반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대우 스님이 스스로에게 펼치는 재강이었다. 그렇게 4년을 넘긴 후에야 비로소 사집, 사교, 대교반을 차례로 지도했다. 그리고 1992년엔 묘엄 스님으로부터 전강받았다. 10안거를 성만한 수좌이자 강맥을 이은 강사가 되었다.

▲당초 바람이었던 율장은 배웠는가.
“그게 참 아이러니다. 내가 강사로 있는 동안 묘엄 스님이 어찌나 바쁘신지 율장은 펴보지도 못했다. 이거만 끝나면 하자, 이거만 마치면 하자 한 것이 훌쩍 시간이 지나버렸다. 비록 율장은 배우지 못했지만 묘엄 스님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님이었다. 인품이며 학문 모두가 우러러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학장 스님 그늘에서 초발심의 순수한 열정이 살아있는 학인들과 함께 공부하던 그 시절이 더 없이 좋았다.”

1997년 그토록 존경하던 묘엄 스님의 만류를 뒤로하고 떠나는 대우 스님의 발걸음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짐을 싸다가도 눈물이 흘렀지만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리에서 더 이상 남의 소리만 할 수는 없다”는 대우 스님의 결심은 확고했다.

 
▲선방정진 10년, 강사로도 1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렇게 절실했나.
“깨닫지 못한 자리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경전 해석을 잘하고 선사들 말씀을 줄줄 전한다 해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 자리에 있었다. 치문부터 시작해 서장, 도서, 선요, 절요가 모두 일가를 이루신 분들의 말씀이고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이 다 깨치신 분상에서 이야기된 것이다. 그것을 갖고 깨치지 못한 내가 학인들에게 강의를 하려니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런 내가 승가대학에 남아 ‘오래있었다’는 이유로 어른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방부를 들였다. 내원암, 백흥암 등 선방 좌복 위에 스스로를 붙잡아 세웠다. 경을 놓은 자리에 화두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강사스님’이라는 호칭은 보란듯이 선방 문고리를 넘어 들어왔다. 어딜 가나 “강사스님”하고 부르는 제자들이 즐비했다. ‘나는 이미 강사를 떨칠 수 없는 길에 들어와 있구나’ 싶은 생각에 가슴 먹먹하기도 했다. 백흥암 선방에선 심한 기침까지 겹쳐 가까스로 한철을 마칠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다시 방부 들일 엄두도 못 내고 은사스님이 계신 도봉산 금강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금강암에는 76권 율장이 가득 쌓여있었다. 율장을 공부하겠다며 차곡차곡 쌓아 놓았지만 아직까지 한 번 들춰보지 못한 책들도 즐비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번역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한문부터 다시 공부해야 했다. 중국 유학을 결심했다.

▲세납 48살, 늦은 나이의 중국유학이었다.
“내가 저 율장을 펼쳐보지 않으면 내 제자들은 과연 저 책을 열어나 보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강원에서 한문 경전을 가르쳤지만 율장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고대한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천진사범대학과 북경대학교의 어학연수과정을 거쳐 남경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고 기숙사에 방을 얻어 손수 공양을 해결하며 “식당 밥 한 번 안 사먹고” 공부했다. ‘율장을 공부하겠다면서 공양 한 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공부하며 ‘도선율사의 계율 사상’을 주제로 2006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8년간의 유학은 율장을 보는 안목을 열어주었다.

중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우 스님에게 묘엄 스님은 2008년 율맥을 전하고 봉녕사 금강율학승가대학원장의 소임을 맡겼다. 그로부터 4년, 가장 존경하는 대학자이자 스승인 묘엄 스님의 덕화 아래서 율원의 학인들과 밤새워 율장을 연구했다. 대우 스님 방에 불이 꺼지지 않으니 학인들도 같이 밤을 새웠다. 지금도 가끔씩 제자들이 찾아와 “참 열심히 공부했던 시절”이라며 그때를 좋은 기억으로 떠올려주는 것이 더 없이 큰 기쁨이다.

▲율장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계율은 부처님의 행(行)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선(禪)이고, 부처님의 말씀은 교(敎)이며 부처님의 행은 율(律)이다. 출가자가 성불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선교율이 모두 겸수돼야 하지만 계율은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된다. 묘엄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계율을 함부로 여긴 사람 치고 전등록에 올라간 이가 없다’ 하셨다. 계율이 가장 기본이고 그 기본을 잘 지킴으로써 스님이라는 출가자의 정체성도 바르게 선다. 그 속에서 내 마음을 깨치는 것, 염불하는 것, 기도하는 것이 다 하나가 될 수 있다. 내가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스님의 행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율을 잘 알고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율원도 많이 생기고 연구도 많아졌지만 계율이 학문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

▲선사이자, 강사이자, 율사이다. 
“사실은 그것이 하나다. 출가자가 되어 당연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니 강원에서 공부를 했고 마음공부를 해야 하니 선방을 갔다. 여전히 부족했기에 더 배우고자 강단에 섰고 바르게 살려면 율장을 알아야 했기에 율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사실은 그게 전부다. 하지만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은 경을 보든, 염불을 하든, 절을 지키든, 복을 짓든, 복지를 하든 결국은 마음자리 닦는 쪽으로 회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 역시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뜻인가.
“아쉽다기 보다는 조금 젊다면 더 힘써보고 싶은 것들이 있기는 하다. 14살에 스님이 돼서 올해 세납이 68이니 꼭 54년을 수행자로 살았다. 이제는 조금씩 주변을 정리해가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건강도 예전만큼 좋지 않다. 사진이나 상패, 증서 등 이런 것들이 아닌 내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 사상, 내 안의 살림을 더 들여다보아야 할 때다.”

▲후학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다. 다만 학인들이 강원을 졸업하고 나면 바로 율학을 공부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됐으면 좋겠다. 율장은 하고 싶은 사람, 관심 있는 사람만 할 것이 아니다. 율을 바르게 알아야 스님들의 소양이 갖춰질 수 있다. 요즘엔 율장에 관심 있는 분들이 깊이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좋지만 전공자만 배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은 아니다. 율은 출가자의 정체성을 찾고 지키는 기본이다.”

전문가가 대접받는 시대다. 출가연령이 늦어지고 교단에도 세속의 흐름이 배어 들어오니 어느 한 분야 깊이 파고든 ‘전문가’가 각광받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 덕일까. 언제부터인가 이 스님은 선사, 그 스님은 강사, 저 스님은 율사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다. 그 분야에 깊은 정진과 배움이 있으니 또한 훌륭하고 존경할 이름이다. 하지만 출가자라면, 스님이라면 누구나 선사여야 하고 강사여야 하며 율사여야 하지 않을까. “스님이 됐으니 계율을 지켜야 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야하고, 마음을 닦아야 하겠기에 선방도 가고 강단도 가고 율장도 접했다”는 대우 스님의 덤덤한 설명이 이상할 것 하나 없음에도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시대에 그런 스승 만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화사 걸림 없는 시원한 바람 아래 그런 스승 앉아있다. 그러니 멀지만 기꺼이 찾아올 일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강단에서 엄한 스승, 사석에선 천진한 웃음

내가 본 대우 스님은

초기불전연구원장 대림 스님=봉녕사승가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치문반을 지도해주셨다. 나도 승가대학 공부가 처음이었지만 스님도 강사로서 우리 반이 첫 제자였다. 첫 스승과 제자였으니 어쩌면 더 특별한 인연일 수 있다. 평생에 두 분의 큰 스승님을 꼽는다면 묘엄 학장스님과 대우 스님이다. 묘엄 학장스님이 입적하신 지금, 대우 스님은 이제 한 분뿐인 스승이나 다를 바 없다. 이제 막 승가대학에 입학한 학인들은 초발심을 잘 일으켜 평생 간직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대우 스님은 그 학인들의 초발심을 견고하게 다듬어 주셨다. 출가자가 지녀 할 신심과 시주물의 지중함에 대해 강조하셨고, 은사스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고마운 것인지를 일깨워주셨다. 개학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학인들로 하여금 은사 스님에 편지를 써 보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강사로서 스님은 엄한 스승이었다. 강단에서는 사사로운 칭찬이나 웃음을 볼 수 없었지만 여담을 하실 때면 굉장히 밝고 천진한 웃음을 보이시곤 했다. 그 모습은 14살 출가할 때의 모습 그대로인듯 했다. 엄한 아버지인 동시에 자애로운 어머니와도 같아 부족한 부분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한 학인을 대할 때면 스님에게 깊은 연민이 있음이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는 과연 저와 같은 연민의 마음으로 후학을 대할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셨고 율장에 관해서는 그만큼 연구에 매진하신 스님도 많지 않다. 하지만 율장은 여전히 연구해야 할 분야가 많이 남아있다. 보다 많은 후학들이 더 배우고 연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하지만 무엇보다 건강을 잘 챙기시는 것이 첫째다.

전국비구니회 문화부장 혜연 스님=동진출가하셨기 때문인지 세속의 습관이나 의식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학인시절 보았던 대우 스님은 오직 절집안의 전통과 엄하지만 반듯한 가풍이 그대로 몸에 배인 강사였다. 덕분에 학인들과의 소통에 조금 어려움을 느끼는 점도 없지 않았다. 마치 옛 사람이 요즘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맞춰가기가 힘든 것처럼 옛 가풍에 익숙한 스님이 이제 막 출가한 학인들에게 느끼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 중에도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것은 제자에 대한 사랑으로 꽉 차 있는 스님의 속마음이었다. 그것을 표현하기가 좀 미숙했을 뿐이다. 겉으로 칭찬하고, 살갑게 대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뿐임을 학인들이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졸업 후 선방 정진 중 우연히 스님을 다시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제자를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그 모습에서 제자에 대한 깊은 사랑이 새삼 느껴지기도 했다. 요즘 전국비구니회의 소임을 맡아 활동하면서 다시 한 번 대우 스님의 공심을 느낀다. 비구니를 위해 무엇이든 힘이 되어주고자 애쓰는 스님의 모습을 볼 때면 후학들을 위해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어주던 앞 세대 어른스님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수행자로서 모범을 보여주고 그 모습을 본받을 수 있다는 것, 그런 어른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1358호 / 2016년 9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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