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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자를 위한 우바새계경 강설] 18. 정삼귀품(淨三歸品)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6.09.12 15:51
  • 수정 2016.09.12 15:52
  • 댓글 0

‘삼귀의’엔 모든 괴로움·번뇌 없애고 즐거움 주는 인연 있다

▲ 안심정사 회주 법안 스님은 “삼귀의야말로 최고 좋은 진언이며 최고 좋은 염불”이라고 강조했다.

불·법·승에 귀의하는 마음이
최고 좋은 진언임을 알아야
법회때마다 하지만 의미 몰라
항상 삼귀의 읊조리는 행위로
진실하고 바른 해탈 구할수있어

이번주에는 ‘우바새계경 제 20품 정삼귀품(淨三歸品)’을 함께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와서 구걸하는 자가 있으면 삼귀의를 먼저 가르쳐서 받게 한 후에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삼귀의를 받으며 어떤 것을 삼귀의라고 하나이까.”

불자라면 ‘삼귀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법회 때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시잖아요? 그런데 삼귀의에 대해 명확하게 아시는 분은 잘 없어요. 오늘 강설을 통해 삼귀의로 받게 되는 인연과 의미를 잘 알고 실천할 수 있길 바랍니다.

삼귀의를 한자로는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 귀의승 중중존(歸依僧 衆中尊)’이라고 표현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가 구걸하러오면 반드시 삼귀의를 하도록 했어요. 빨리어로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이렇게 세 번을 하고 구걸하는 자에게 베풀고 했어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어요. 왜 중요한지가 뒤에 나옵니다.

“선남자여, 삼귀의에는 모든 괴로움을 부수고, 번뇌를 끊어 없애고 위없는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받는 인연이 있습니다.”

‘삼귀의’ 한 번에 여러분들이 갈 지옥이 없어지고, 배고픈 귀신(아귀)이 가는 세계가 없어지고, 축생 세계가 없어집니다. 즉 삼악도가 없어져요. 우리나라 불자들은 ‘삼귀의’를 “그냥 하는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아요. 삼악도를 없애는 데는 삼귀의보다 빠른 게 없어요. 하루 지나면 하루 지난만큼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하고 자꾸 노래 불러야 되요.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이렇게 하잖아요. 삼귀의야말로 최고 좋은 진언이며 최고 좋은 염불이지요.

어느 분이 인터넷에 ‘아내 구함’이라고 광고를 냈데요. 300통의 이메일이 온 거예요. 전부 똑같은 내용으로 왔어요. “우리 마누라를 데려가시오.” 무슨 뜻인가 잘 이해가 안되지요? 강설이 끝나면 이해가 될 거예요.

우리가 늘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 또는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자꾸자꾸 하다보면 괴로움이 다 부서져 없어지고 번뇌를 끊어 없앨 수 있어요.
얼마 전 서울 약왕선원에 한 불자가 오셨어요. 젊은 나이에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데, 아랫 사람들은 목을 팍 비틀면 말을 듣겠지 했는데 안 듣더래요. 고민을 하다가 제 책 ‘걱정말고 기도하라’를 보고는 ‘자비를 베풀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늘 ‘자비가 뭐지’하고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는데 참 쉽게 풀이한 부분들이 있더라는 거예요.

자비는 ‘친, 아, 배, 사’입니다. 친절과 아량, 배려, 사랑 나누기죠. 이것을 400명 넘는 직원들한테 써먹어 보니까 갑자기 사무실이 극락이 되더라고 합니다. “아, 자비라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거구나”하고 생각이 들더래요. 우리 불교는 이렇듯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 함께 있습니다.

삼귀의도 마찬가지예요. 번뇌를 끊고 괴로움을 아무리 부수어 내도 현실에는 괴로운 일이 많이 있지요. 이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8가지로 정리해요. 먼저 생로병사(生老病死). 육체적으로 괴로운 4가지입니다. 심리적·정신적으로 괴로운 네 가지가 더 있어요. 첫 번째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애별리고(愛別離苦)’입니다. 틀림없이 괴로움이에요. 두 번째는 ‘원증회고(怨憎會苦)’ 원수와 딱 마주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은 사람은 없겠지요. 오죽했으면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마주친다’고 그럴까요.

세 번째는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입니다. 마지막으로 ‘오음성고(五陰盛苦)’가 있습니다. 오음, 즉 오온(五蘊)의 작용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오온개공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색, 수, 상, 행, 식에 집착하면 온갖 고통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 괴로움에 대해서 우리가 “몸과 마음, 생각 모든 것이 괴로움 아닌 게 없다”고 단정지어 버리면 불교가 염세주의가 됩니다. 이를 벗어나는 ‘적멸의 즐거움’, 모든 것이 다 해결된 즐거움을 받는 인연을 만들기 위해 ‘삼귀의’가 있습니다. 괴로움이 있음을 알고 아니까 없앨 수 있는 거예요. 불교가 참 명쾌하지 않습니까?

또 유식에서 공부하는 단계가 5단계가 있는데 자량위, 가행위, 견도위, 수도위, 성불위가 있어요. 첫 번째 자량위(資糧位)는 영양분을 계속 섭취하며 복을 짓는 단계 즉, 깨달음을 얻는 데 자량이 될 지혜의 수행을 쌓는 단계입니다. 그 단계를 지나면 가행위(加行位)라 해서 이 행위가 더해지는 겁니다. 처음에는 9시간만 용맹정진 기도를 하려고 했는데 기도하면서 재미가 붙으니 밤새도록 철야기도를 하고 있어요. 마지못해서 하던 기도가 발등에 불 떨어지니까 “막상 하니 잘 되네” 싶으니 점점 더 기도에 매진하게 되고 더욱 복을 짓는 게 되는 것이죠.

그다음은 견도위(見道位)입니다. 도를 보는 단계, 명심견성을 했다던가 화두를 타파하고 수다원향, 수다원과를 증득하는 단계가 된단 말이에요. 이 상태를 견도위라고 표현해요. 그 직전의 단계를 ‘우바새계경’에서는 난법의 단계라고 해요. 무르익어 견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견도위에서는 자동차 엑셀을 밟듯이 더욱 본격적으로 복을 지어야 되요. “나는 이제 무르익었으니 지혜나 더 연마해야지 복은 지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천행에 소홀하면 외도로 빠져버리는 거예요. 아라한이 백번 돼도, 보살되기 힘들어요. ‘우바새계경’에 육바라밀품이 나오는 이유예요. 첫 번째가 보시바리밀이에요. 무조건 보시를 행하는 것이 복의 가장 기본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바새계경’에 보면 스승이 제자들에게 4가지를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첫 번째가 신심을 자꾸 길러주는 거예요. 이 신심은 아무리 길러 주려고 해도 다음의 세 가지가 받쳐주지 않으면 썩어 버립니다. 두 번째는 계율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계율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을 구속하거나 귀찮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여러분들이 괴로움을 벗어나서 즐거움의 세계로 나가도록 하는 겁니다. 세 번째는 보시를 행하도록 권유 하는 것, 네 번째는 많이 듣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우선 내가 권유를 하고 가르치려면 지행합일이 되어야 하는데, 신도들과 술도 먹고 고기도 먹으면서 계율 지키라고 하면 누가 듣겠어요? 속으로 “너나 잘하라”고 하겠지요. 신심을 갖도록 가르치고 계율을 지키도록 가르치고 보시를 하도록 하고 많이 듣도록 하는 것은 스님들이나 성직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인데 쉽게 말을 하기는 어렵지요. 특히 “보시하라고 하면 돈 내라는 소리로 알아들으니까”하고 생각해서 아예 보시를 권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자들이 복 지을 기회를 원천적으로 잘라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에 좋지 않아요.

다시 ‘우바새계경’으로 돌아가서 번뇌라는 것은 탐심이 많고 그다음에 화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교만한 마음 의심 많은 마음이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 하나 없애면 ‘적멸의 즐거움’을 받는 인연이 있습니다 했죠. 제일 좋은 즐거움이 뭐냐면 적멸의 즐거움, 열반의 즐거움이거든요.

‘흥진비래(興盡悲來)’. 즐거움이 다하면 울다가 끝나지요. 인간의 즐거움은 그런 겁니다. 아무리 좋은 노래도 세 번 부르면 질리잖아요. 그런데 열반의 즐거움은 끝이 없습니다. 끝없는 즐거움을 받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삼귀의’가 중요한 거예요.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대사가 한 말씀이 참 감명 깊어요. “하루 살면 살수록 부처님과 부처님 말씀과 승가에 의지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 얼마나 감동적인가요?

“그대가 묻는 삼귀의란, 선남자여, 불, 법, 승을 말합니다. 불(佛)이란 번뇌를 부수는 원인과 바른 해탈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법(法)이란 곧 이 번뇌를 부수는 원인과 진실한 해탈이며, 승(僧)이란 번뇌를 부수는 원인과 바른 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세속생활 다 포기하고 오직 도를 닦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대가 사는 곳에서 생활에 충실하라는 겁니다. 세속생활 포기하고 도인으로 사는 분들 찾아가보면 주위 가족들은 고개를 내둘러요. 본인만 유유자적하게 도인 행세하는 것은 세속말로 “지 앞가림도 못하고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 그건 아니에요. 절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에요.

또 처음 불교 입문한 사람에게 참회부터 하라고 하지요? 무턱대고 참회하라고 하면 되나요? “내가 뭘 잘못했지요?”하면 “니가 전생에 뭔가 잘못했을거여” 그러잖아요. “그럼 일러주세요.”하면 “모르지만 잘못했을거여” 이래요.

설득력도 없고 신심도 안나요. “니가 어느 때 어느 잘못을 해서 지금 이렇게 안좋다”고 찝어주면 효율적으로 참회할 수가 있잖아요. 참회는 초보불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당히 높은 단계에까지 올라가서 공부하고 기도하다보면 그때부터 참회가 되는 거예요.

“누군가는 ‘그렇다면 이것은 일귀(一歸)이다’고 말하나, 그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바른 법은 항상 있어서 분별함이 없지만, 여래가 나오시고서 곧 분별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따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입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바른 법은 항상 있어도 받는 자가 없지만, 부처님의 제자들이 받기 때문에 응당 따로 승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귀의를 왜 하는지 자세한 이유들이 이렇게 명쾌하지요? 재가불자들은 ‘우바새계경’만 평생해도 좋아요. 바른 법이 있어도 받는 자가 없으면 안되는데 바로 여러분들이 말법시대에 부처님 법을 받는 것이지요.

“바른 길로 해탈하는 것을 법이라 하고, 스승이 없이 홀로 깨달은 이를 부처라 하며, 법대로 받는 자를 승가라 하니, 삼귀의가 없다면 어떻게 네 가지 무너지지 않는 믿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네 가지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사불괴신(四不壞信)이라 합니다. 불(佛) 법(法) 승(僧) 계(戒)를 향한 믿음을 말하지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믿음이죠. 여러분들은 불법승계를 지니고 하루 하루 좀 더 확보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삼귀의를 얻는 자에게는 구족함이 있거나 구족하지 않음이 있습니다. 구족함이라 하는 것은 이른바 불, 법, 승에 귀의함이고 구족하지 않음이란 이른바 여래가 법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삼귀의를 얻는 자는 구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계와 같습니다.”

“선남자여, 모든 선법은 하고자 함(欲)이 근본입니다. 이 하고자 하는 인연으로 삼보리와 해탈의 과보를 얻고 출가법에 들어가서 큰 악업과 모든 존재의 업을 부수며 계를 수지하고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하고 일체를 버리어 구걸하는 자에게 주며 정성을 짓고 악한 과보를 부수며 대악죄를 멸하고 결정취를 얻으며 세가지 장애를 여의고 번뇌를 부수는 길을 닦습니다. 이 하고자 하는 인연으로 삼귀의를 받고 삼귀의로 인하여 계를 받고 나면 견도와 수도를 행하여 성문보다 뛰어나게 됩니다.”

삼귀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거구나”하는 깨달음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정삼귀품’이예요. 꼭 실천하셔서 행복한 불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359호 / 2016년 9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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