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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소식의 예술과 미학-하

기자명 명법 스님

회화는 시의 여분…문인화는 기능 산물 아닌 정신적 활동

▲ 송나라 소식의 ‘고목괴석도(枯木怪石圖)’.

소식은 왕유의 시와 그림을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라며 높이 상찬하였다. 앞의 연재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미지가 풍부한 왕유의 시를 읽으면 소식의 평가가 절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시’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화공은 외형 묘사하지만
심원한 내용은 전달 못해

회화가 추구해야 할 바는
보편자로서 도(道)·이(理)

소식 말한 도(道)·이(理)는
선악을 넘어선 무심의 경지

빈 마음으로 사물 관조할 때
경계는 장애 아닌 사물 본질

고대부터 중국에서는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그림은 격이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모양의 닮음(形似)’보다 ‘정신의 닮음(神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산혜원의 추종자였던 고개지가 주장한 ‘전신론(傳神論)’은 그림의 중요한 기능이 정신성의 전달에 있다고 보았는데, 특히 고개지와 그의 시대 그림이 주로 인물화에 한정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때 ‘정신성’은 인물화 주인공의 인격이나 개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이 산수를 묘사하는 기량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듯 보인다. 따라서 산수의 정신, 즉 사물의 내면성을 포착하는 것은 사물의 외형을 파악하는 힘이 길러진 이후에나 말할 수 있는 이론이며, 그것은 소식이 평가한 것처럼 왕유의 그림에서 최초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왕유의 진작이 전해지지 않아 그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왕유 이후로 문화예술의 비약적 발전에 따라 송대에 이르면 곽희의 그림에서 보듯 산수의 외형을 그리는 화가들의 능력은 충분히 개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식이 “시로는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넘쳐서 서예가 되었고, 이것이 변하여 그림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시의 여분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회화가 이처럼 내면성을 담을 수 있는 형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래 글은 선진시대와 송대에 회화 품평 기준이 얼마나 변화했는지 잘 보여준다.

“손님 중에 제나라 왕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제나라 왕이) 그에게 무엇을 그리는 것이 어려운가 하고 묻자, ‘그는 개와 말이 가장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엇이 가장 쉬운가?’ 하고 물으니, 그는 ‘귀신이 가장 쉽습니다. 개와 말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앞에 보이므로 실물과 꼭 닮게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귀신은 형태가 없습니다. 형태가 없는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쉽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客有爲齊王畵者 齊王問曰 畵孰最難者 曰犬馬最難 孰最易者 曰鬼魅最易 夫犬馬 人所知也 旦暮于前 不可類之 故難 鬼魅無形者 不罄于前 故易之也. (韓非子, ‘外儲說左上’ ‘韓非’)

“그림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귀신이 그리기 쉽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림은 형사가 어려운데 귀신은 사람이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음산한 위엄이 어두침침하고 변화가 무쌍하며 기이함을 다하고 괴이함을 지극히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보자마자 곧 깜짝 놀라게 하고 또한 천천히 머물러 보면 곧 천 가지 만 가지 모습이 붓을 간단하지만 뜻이 족한 데 이르러서는 이 또한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善言畵者 多云鬼神易爲工 以謂畵以形似爲難 鬼神人不見也 然至其陰威慘憺 化超騰 而窮奇極怪 使人見輒驚絶 及徐而定視 則千狀萬態 筆簡而意足 是不亦爲難哉. (歐陽修, 題薛公期畵, ‘居士外集’)

▲ 당나라 화가 한간의 그림. 조야백(照夜白).

구양수가 밝히고 있듯이 일정한 형태가 없어서 볼 수 없는 귀신을 그리는 것이 쉬운 듯하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변화와 기이함을 묘사하고 그 기운을 전달하려면 단지 사물의 외관만 파악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원리에 대한 파악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귀신 그림’이 그리기 어려운지 쉬운지에 대하여 한비자와 구양수의 주장이 어긋나고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 그 시대의 변화와 회화가 지향했던 가치의 변화를 보여준다.

송대에 이르면 이처럼 분명하게 회화 역시 내면화의 길로 나아감을 알 수 있다. 구양수의 글은 회화에서 비평의 기준이 ‘형사’에서 점차 벗어나 정신의 내면성을 표현하는 데로 나아감을 잘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내면성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화공은 사물의 외형을 묘사할 수 있지만 심원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

“쓸쓸하고 담박한 것. 이는 그리기 어려운 뜻이다. 그리는 사람이 이를 얻어도 보는 사람이 반드시 아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날고 달리고 느리고 빠른 것과 같은 뜻이 얕은 것은 쉽게 볼 수 있지만, 한가롭고 온화하고 엄격하고 고요한 것과 같은 뜻이 심원한 마음은 그리기 어렵다. 높고 낮고, 향하고, 등지고, 멀고, 가깝고, 중복된 것 같은 것, 이는 화공의 기예일 뿐 자세하고 깊이 있는 감상가의 일이 아니다.” 蕭條淡泊 此難畵之意 畵者得之 覽者未必識也 故飛走遲速 意淺之物易見 而閑和嚴靜 趣遠之心難形 若乃高下向背 遠近重複 此畵工之藝爾 非靜鑑之事也. (歐陽修, ‘鑑畵’, ‘試筆’)

소식은 외면성과 내면성의 차이를 ‘상리(常理)’와 ‘상형(常形)’으로 설명했다. 화공의 그림은 사물의 외관인 ‘상형’을 그리지만 문인들의 그림은 사물의 본질인 ‘상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문인화는 단순한 기능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적 활동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그림을 논한 적이 있다. 사람들과 짐승, 궁실, 기용은 모두 일정한 상형이 있고, 산석, 죽목, 수파, 연운 따위는 상형은 없으나 상리가 있다.…상형의 잘못은 부분적인 잘못에 그치고 말지만, 만약 상리가 잘못 되었을 때에는 그림을 망치고 만다.…속세에서 공교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간혹 그 형상은 곡진하게 묘사할지 모르나, 그 이(理)에 있어서는 고인일사(高人逸士)가 아니고서는 결코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려내고 있는 죽석과 행목의 그림은 진정 그 이(理)를 터득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吾嘗論畵 以爲人禽宮室器用皆有常形 至于山石竹木水波烟雲 雖無常形而有常理…常形之失 止于所失 而不能病其全 若常理之不當 則擧廢之矣…世之工人 或能曲盡其形 而至于其理 非高人逸才不能辨 與可之于竹石枯木 眞可謂得其理者矣 (‘淨因院畵記’, ‘蘇軾全集’)

그런데 촉학(蜀學)의 대표자인 소식이 이해한 ‘상리(常理)’는 당시 또 하나의 일가를 이루고 있던 낙학(洛學)의 대표자인 정이(程頤, 1033~1107)가 말한 도덕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근거로서의 ‘이(理)’와 다르다. 정이가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목적),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법칙)으로서의 ‘이(理)’를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원리이면서 도덕적 가치의 근거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소식은 ‘도’는 무규정적이며 선악의 가치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것은 법칙적으로 파악되는 것도 아니며 그 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작위적 태도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도는 무관심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모든 사념의 작용을 배제하고 그것과의 일체화를 통해 얻게 된다고 보았다.

불교와 노장사상까지 광범위하게 흡수했던 소식은 도(道)를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 또는 실천적 체험을 통해 증득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도는 도학자들이 주장했던 보편적이고 법칙적인 ‘이일(理一)’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그것도 무목적적 의식의 상태, 즉 수동적인 의식의 상태에 현현하는 것이다. 

“마음에 주인 노릇 하는 것이 있음을 ‘한결같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에 주인이 있으면 사물이 다가 올 때 반응할 수 있게 되는데, 사물이 다가올 때 반응할 수 있다면 날로 새로워진다. 마음에 주인이 없다면 사물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희노애락은 모두 대상이니 무엇이 그것을 새롭게 하겠는가?” 中有主之,謂一.中有主,則物至而應,物至而應,則日新矣.中無主,則物爲宰.凡喜怒哀樂皆物也,而誰使新之. ‘書傳: 7권 咸有一德’
소식은 허정한 마음의 상태에서 만사만물을 관조하면 사물의 본질, 즉 도(道)를 획득할 수 있으며 또 그 때 언어나 형상은 그 마음의 경계를 표현하는 데 장애가 아니라 마음의 외화 형식이라고 보았다.

“시어를 묘하게 하려면 텅 빔과 고요함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 고요하면 모든 움직임을 분명히 알 수 있고 텅 비었기 때문에 만 가지 경계를 받아들인다.……시와 불법은 서로 방해가 되지 않으니 이 말은 더욱 유념해야 한다.” 欲令詩語妙 無厭空且靜 靜故了群動 空故納萬境……詩法不相妨 此語當更請, ‘送參寥師’ (‘蘇軾全集’권17, p.212.)

소식은 회화가 추구해야 할 바는 보편자로서의 ‘도(道)’ 또는 ‘이(理)’라고 보았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이치’지만 ‘변화하는’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을 통해 현현된다. 즉 이(理)와 사(事)가 원융하기 때문에 보편성은 구체성을 떠나지 않고 드러난다. 문인의 그림이 지향한 것은 보편자인 ‘이(理)’의 표현이지만 그것은 개별자의 구체적 사(事)로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59호 / 2016년 9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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