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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완주 안심사 주지 서안일연 스님

배우고 가르치며 교학의 길 담금질한 품 너른 스승

▲ 안심사는 조선시대 간경도감이 설치된 사찰이었다. 강사 일연 스님이 이곳의 주지를 맡아 경판이 보관돼 있던 2층 대웅보전을 복원했다. 어느 하나 예사로 보이지 않는 인연이다.

“존자여,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하였습니까.”

“대왕이여, 실은 나는 어려서 출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나는 궁극적인 목적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들 사문(沙門)은 현자(賢者)이다. 이분들은 나를 공부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에게 배워 지금은 출가하는 목적과 자제(自制)하는 이익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밀린다왕문경’ 중에서.

출가의 목적이 뭔지 몰랐지만
‘맑은 스님 되겠다’ 발원으로
19살에 원담 스님 은사로 출가

동학사강원 학인시절 소임 살며
학문 소중함, 대중살림 기본 배워

동대 졸업 후 동학사사 중강 제안
“부족함 많다” 사양하고 선방행
3년 결사 등 5년간 정진하며
수행자의 목적 무엇인지 깨달아

봉녕사승가대서 9년간 강사로
92년 묘엄 스님께 전강 받고
동학사 주지 겸 학장도 역임

“어디서 어떤 소임 맡게 되던
지향점은 깨달음으로 향해야”

때로는 무모해 보이는 선택이 비교할 수없이 값진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오직 그 결과에 놀라며 ‘전생에 지은 복’이라거나 ‘운이 좋았다’거나, 혹은 ‘조상 덕’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기 일쑤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선택의 순간이 닥쳐왔을 때 당당하게 손 내밀어 선택할 수 있는 이 몇이나 있을까.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이것이 옳다’는 믿음을 갖고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사람, 값진 결과는 그 용기에 대한 보상이다.

완주 대둔산 안심사 주지 서안일연(棲岸一衍) 스님은 출가의 원력을 묻는 질문에 ‘밀린다왕문경’의 한 구절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선비구처럼 스님이 뭔지, 왜 출가하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저 맑고 깨끗한 스님, 그렇게 되고 싶었죠.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공부는 세속의 연장일 뿐이죠. 더 중요한 길이 있다는 것을 후에 알았으니까요.”

▲ 일연(뒷줄 왼쪽 끝) 스님이 대오(앞줄 왼쪽) 노스님, 은사 원담(앞줄 오른쪽) 스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는 ‘용화사에서, 을사(1965)년 사월초파일기념’이라고 적혀 있다. 일연 스님이 출가한 해다.

안심사는 638년 자장율사가 세운 고찰이다. 부처님 진신사리 10과와 치아사리 1과를 봉안한 금강계단(보물 제1434호)이 자리하고 있다. 자장 스님이 기도 중 부처님으로부터 ‘열반성지 안심입명처로 가라’는 말씀을 듣고 이곳 산세가 열반상을 닮았기에 절을 지어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안심사(安心寺)’라 이름 지었다. 절 이름처럼 고르게 잘 가꾸어진 도량이 한 눈에 보아도 편안하니 안심이라는 이름이 썩 잘 어울린다.

하지만 천년을 넘게 이어온 도량에 어찌 부침이 없었으랴. 30여 동 전각과 13개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지만 임진왜란과 6·25한국전쟁을 겪으며 거듭 도량이 소실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웅보전조차 터만 남은 채 50여 년의 세월을 더 흘려보내야 했다. 2003년 일연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은 후 2015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대웅보전이 다시 복원되며 사부대중이 한시름을 놓았으니 결국 ‘안심’을 이룬 것은 지세(地勢)가 아닌 사람이다. 하지만 스님은 묵묵히 고개를 젓는다.

“내가 평생 강의만 하던 사람인데….”

스님의 이력은 온통 강단의 자취로 가득하다. 1992년 묘엄 스님으로부터 전강 받고 1994년부터 동학사승가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2011년에는 묘엄 스님으로부터 전계도 받았다. “안심사 주지 소임을 맡은 후 불사할 일을 생각하니 기가 딱 차더라”는 회고도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무모해 보이는 길을 두려움 없이 걸었다. 그 담대함은 어려서부터 엿보였다.

▲ 동학사 강원 시절 강백 호경 스님(가운데)과 학인 스님들이 함께 했다. 우측 끝부터 대우 스님, 지형 스님, 일연 스님이다.

스님의 고향은 강원도 평창이다. 6남매 맏이에게 양친은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며 대학 진학의 길이 보이지 않자 스님은 스스로 길을 찾아야 했다. 당시 집 근처에 있던 포교당 극락사에서 학교 선배와 함께 주지 이장호 스님으로부터 ‘소학’ ‘대학’ 등을 배웠다. 함께 공부하던 선배가 한문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진천 용화사로 떠난다는 소식에 스님도 홀홀단신 진천 행을 결심했다.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지만 평창에서 진천은 무척 먼 거리다.
“부친은 반대하셨다. 가더라도 제발 삭발은 하지 말고 한문공부만 하라고 당부하셨다. 그 시절에는 사법고시생들이 사서삼경을 많이 공부했는데 나도 사법고시의 꿈이 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후원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당시 어머니는 만삭에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해산을 앞둔 어머니의 산바라지를 맡아줄 사람이 없으니, 맏딸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농사지은 팥을 몽땅 내다 팔아 여비를 보태주었다. “연락 주시면 바로 돌아오겠다” 약속하고 집을 나섰다. 얼마 후 태어난 막내 동생은 세연이 길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님은 진천 용화사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고 얼마 후 출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저 우연의 연속이었을까. 아니다. 스님은 출가인연의 밑바탕이 된 세 번의 사건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시절, 꽃을 따러 산에 갔다가 그만 동무들과 헤어져 무덤가에 혼자 남게 됐다. “꽃문둥이(한센병 환자를 일컬음) 나온다”며 마을 사람들조차 얼씬하지 않던 그곳에서 스님은 ‘나도 죽으면 저렇게 되겠지, 죽는다는 것이 뭘까’라는 생각에 골똘히 빠져들었다.

두 번째 인연은 좀 더 철이든 학생 시절, 포교당 극락사에서 열린 사촌언니의 결혼식에서 찾아왔다.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 뒤에 앉아계신 부처님 뒤로 둥글고 밝은 빛이 훤하게 보이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것이 후광인지 광배인지도 모른 채 이 신기한 일이 무엇인지 주지 스님에게 물었다.

“이장호 스님이 ‘그게 너에게도 있는 거란다’라고 대답해주셨는데, 그 때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것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그때부터 화두처럼 남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또 한 번의 인연이 찾아왔다. 친척집에 심부름을 가던 중 극락사에서 저녁예불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소리도 아닌데, 그 목탁소리가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다.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린 시절 그 세 가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아마도 불연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유독 스님의 두루마기자락, 회색 옷이 그렇게 좋아 보이기도 했어요. 모친이 나를 가졌을 때 스님이 염주를 걸고 집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셨다니 분명 출가인연이 있었던 것이겠죠.”

진천 용화사에서는 ‘초발심자경문’을 공부했다. ‘소학’ ‘대학’을 다 보아도 ‘초발심자경문’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용화사를 찾아온 한 비구니스님을 보며 출가의 결심을 확고히 세웠다. 1965년, 해송 스님의 주선으로 계룡산 용화사에서 원담 스님을 은사로 마침내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어떤 스님이 되고 싶었나.
“출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진천 용화사에서 봤던 비구니스님처럼 깨끗하고 맑은 스님이 되고 싶었다. 스님들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계룡산 용화사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하숙생을 둬야 할 정도였다. 일연 스님도 땔감을 구하기 위해 계룡산 자락을 넘어 다니며 솔방울을 주워 모았다. 그 부지런한 발걸음이 어느 날 산 너머 동학사로 스님을 이끌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동학사 큰 지붕 아래 댓돌에는 벗어놓은 신발이 조르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신발 위로 책 읽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빨려 들어가듯 동학사로 내려간 스님은 땔감 찾는 것도 잊은 채 해가 기울도록 처마 밑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고향 평창에서 들었던 목탁소리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번엔 마음도 떨어지질 않았다. 그곳이 스님들이 공부하는 ‘강원’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용화사로 돌아와 은사스님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이 지난 얼마 후 마침내 동학사강원의 학인이 되었다. 19살에 출가 해 3년째 되던 해였다.

 ▲ 동국대 졸업식. 우측은 함께 학교를 다닌 지형 스님이다.

▲은사 원담 스님은 어떤 분인가.
“어려서 궁에 계셔서 음식이며 바느질이며 솜씨가 남달랐다. 인물도 좋으셨지만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반듯하고 품격이 있으셨다. 성품 또한 온화하셔서 누구에게나 자비롭게 대하셨고 입적하시는 날까지 손수건 하나 빗뚫게 놓는 법이 없으셨다. 나는 덜렁거리는 성격이었는데도  언제나 믿어주셨다. 절에 하숙생을 두어야 할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 학비며 책값도 늘 부족하지 않게 해주셨다. 은사스님은 안타깝게도 본래 허약한 체질에 건강이 안 좋으셔서 내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입적하셨다.”

▲일찍 한문공부를 했던 것이 강원 공부에 큰 도움이 됐을 듯.
“강원에 가서 경전을 보니 어려서부터 익혔던 글자들이 많아보여 신심이 났다. 하루 종일 책을 볼 수 있으니 여기가 극락인가 싶었다. 그렇게 좋으니 안 외울 수가 있겠나. 기억력도 좋은 편이어서 그 날 배운건 반드시 외우고야 말았다. 자리에 앉아 책을 보기 시작하면 방석이 썩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앉아서도 읽고 서서도 읽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강원의 발우공양은 짠 무 반찬에 국 한가지뿐이었다. 공부하다 배가 고프면 어른스님 몰래 도반들과 동치미도 꺼내 먹고 감자도 몰래 캐먹었다. 어쩌다 대중공양이 있어 큰 두부가 올라오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배고팠던 기억은 없다. 대중과 함께 소임살고 공부하는 환희, 부처님 법 만났다는 감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동학사 형편이 한창 어려울 때 아니었나.
“형편이 좋지 않아 학인들이 소임을 맡았다. 학인 때 원주, 노전, 큰방부전, 재무, 교무, 서기 등 어지간한 소임을 다 살아 보았다. 그때 같은 학인이었던 대우, 지형, 상덕 스님이 후에 다 걸출한 강사가 되고 도량을 이끌었다. 사중살림은 어려웠지만 어려운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자는 마음이 있었다. 그때 경험한 바탕이 후일 대중을 이끄는 뼈대가 되었다. 그런 시절, 그런 대중이 있었기에 지금의 동학사가 있다.”

승가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은사스님을 시봉했다. 하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은 세연을 접었다. 채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은사를 잃은 일연 스님은 스스로를 더욱 다잡아 맸다. 지형 스님과 함께 동국대 승가학과에 입학해 학문의 고삐를 조였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덕일까. 1980년 동국대를 졸업할 즈음 동학사 주지 봉민 스님으로부터 “중강을 맡아 달라”는 연락이 왔다. 동학사승가대학 학인시절부터 스님을 눈여겨보았던 대강백 호경기환(1904~1987) 스님의 추천이었다.

▲어떻게 대답했나.
“봉민 스님에게 ‘난 나이도 어리고 이제 겨우 동국 대 졸업하고 수행도 부족한데 은사스님도 안 계시니 내가 가서 잘못하면 책임져줄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말 그대로다. 누군가를 가르칠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생각했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지도력이 있어야 되는데 아직은 그릇이 안 된다 고 생각했다.”

▲중강을 사양하고 선방으로 간 이유는.
“대우 스님(괴산 남화사 주지)의 영향이 컸다. 당시 대우 스님이 선방수좌로 정진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선방수행조차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지도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자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학인 시절 범어사 대성암에서 한 철 정진했는데 그때 이후로 줄곧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곧바로 선방으로 향했다. 석남사, 내원사를 거쳐 다시 석남사에서 3년 결사에 들었다. 꼬박 5년을 수좌로 정진했다. 3년 결사 동안은 21일간 눕지 않는 용맹정진을 두 번 했다. 하지만  선방에서 우연히 접한 ‘선가귀감’이 또다시 교학의 인연을 열어주었다. 이전에 봤던 그 글이 아니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였다. 옛 스님들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다. ‘선사의 말씀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구나.’ 3년 결사 해제 후 다시 ‘선가귀감’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발심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함께 정진하던 법용 스님의 주선으로 봉녕사 강원 중강을 맡게 되었다. ‘묘엄 스님(1931~2011)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었던’ 일연 스님에게 꿈같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일연 스님은 호경 스님에게 ‘유식’을 재강하며 1년간 다시 공부를 점검한 후 마침내 봉녕사승가대학 강단에 섰다.

▲선방에서 무엇을 구했나.
“성철 스님의 법문을 만났다. 그때는 직접 법문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으니 선방에 ‘노트법문’이라는 것이 전해졌다. 성철 스님의 법문을 받아 적은 일종의 녹취록인데, 그 노트법문을 어떤 스님이 읽는 것을 녹음해 놓은 것을 수좌들이 함께 들으며 공부했다. 그 법문을 듣는 순간 환희심, 신심이 일었다. ‘영원한 자유’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이었다. 그 법문이 내 선방 공부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한번 사양했던 중강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와 관련이 있나.
“선방정진 후 강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문자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됐다. 강사로서 말을 잘 못하고 해석이 서툰 것은 물미가 나지(익숙하지) 않아서일 뿐, 근본은 마음공부라는 기준이 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학인들에게 조사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한다면 그 말씀의 진수를 전부는 모르더라도 선방 가서 앉아보고, 몸 조복이라도 해 보아야지 않겠는가. 만약 봉민 스님이 동학사승가대학 중강을 제안했을 때 바로 강단에 섰다면 그런 고민을 해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선방에 앉아본적도 없는 채로 학인들에게 ‘도서’ ‘서장’ ‘선요’ 등을 가르칠 수 없다 여겼던 일연 스님은 “평생을 수좌로 정진한 스님들에 비하면 5년간의 정진이 뭐 대단하겠는가”라고 덧붙이면서도 “적어도 학인들 앞에 부끄럽지는 않았다”며 그때의 선택이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평가한다. 선방정진은 경전을 깊고 넓게 보는 안목을 열어 주었다. 경을 보는 이유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에 더 활발발하게 경을 파고들어갈 수 있었다.

▲봉녕사승가대학에서 처음으로 강단에 섰다.
“중강 첫 해에 2학년을 맡아 ‘서장’을 가르쳤다. 공부를 하며 가르치는 것이 너무 즐겁고 좋았다. 환희심이 나고 신심이 났다. 선배로서 후학들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철없는 시절이었다. 묘엄 스님이 바로 옆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는데 그 옆에서 뭘 안다고 그렇게 떠들고 가르쳤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다.”

하지만 묘엄 스님 계셨기에 막히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가 여쭐 수 있었다. 그날그날 가르칠 내용을 미리 준비해 묘엄 스님에게 문강했다. “위로 배우고 아래로 가르치며” 일연 스님은 강사의 길을 단단히 다져나갔다.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 더구나 승가대학의 강사에는 단순한 ‘글 선생’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모든 행동이 학인들의 모범이 돼야 했다. 학인들과 함께 울력하고 고민이 있으면 상담하고 함께 고민해야 했다. 위 아랫반 사이의 문제들을 조율하고 학인들과 사중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도 해야 했다. 그 모든 것이 강사의 길이었다. 늘 시간이 부족했지만 그 시간을 쪼개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틈틈이 월운 스님, 각성 스님 같은 대강백을 찾아가 특강도 들었다. 경전을 강의 할 땐  자정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고 하루 3시간도 정도 자는 날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7년을 담금질한 스님은 1992년 묘엄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그리고 2년 후 동학사 주지 겸 승가대학장이라는 막중한 소임이 맡겨졌다. 동학사승가대학을 졸업한 후 22년 만에 일연 스님은 주지이자 학장으로 다시 학인들 앞에 섰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감회보다는 빚을 갚으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인 시절 원주소임을 살았는데 동치미를 담그려고 무를 절여 항아리에 넣어놓고는 사흘 후 소금물 붓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렇게 놓아 둔 채 대성암 선방에 한 철 정진하러 가 버렸으니 항아리 속 무가 어찌됐겠는가. 내가 선방에 있는 동안 학인들이 동치미를 먹으려고 항아리를 열어보니 무가 폭삭 상해서 한 바탕 소동이 벌어졌음을 해제 후 동학사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 일이 얼마나 죄스러웠던지, 내가 대중에게 지은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동학사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스님은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이자가 붙은 동치미 값’은 만만치 않았다. 그 값을 치르기 위해 숨고를 새 없이 도량을 오갔다. 동학사 앞 계곡으로 흘러들어가던 하수도를 막아 오폐수 정화시설을 만들고 등산로를 따라 어지럽게 늘어져있던 전선도 모두 지중화해 정비했다. 특히 전선을 묻기 위해 땅을 팔 때는 혹여 주변의 바위가 상할까 포클레인 톱날에 일일이 고무커버를 덮어씌우기도 했다. 무엇보다 남매 탑 주변 정비는 헬리콥터를 이용해 자재를 실어 올려야하는 대 불사였다. 일주문을 세워 도량 턱 밑까지 들어와 있던 상가와 음식점도 일주문 밖으로 이주시켰다. 그렇게 8년 동안 교육도량 동학사의 환경을 차근차근 정비해 나갔다.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
“일은 하나도 힘들 것이 없었다. 대중을 위한 원력만 있다면 안 되는 일이 없구나 싶었다. 하지만 ‘어른’으로서 많은 대중을 이끌고 통솔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최선을 다 할 뿐이었다.”

돌아보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무엇 하나 뜻한 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 없다는 점은 더욱 신기하다. ‘다시는 불사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곧이어 이곳 안심사와 인연이 닿았다. 갚아야할 ‘동치미 빚’이 아직도 남았을까.

하지만 스님은 서두르지 않는다. 어디에 머무르든, 어떤 소임을 맡든 그저 모습이 다를 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든, 강사든, 일꾼이든 수행자의 길은 오직 하나, 마음 깨닫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향한 신심만 있다면 무엇을 하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 믿음의 원동력은 바로 수행에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스님은 진심어린 당부도 아끼지 않는다.

▲ 묘엄 스님(가운데)을 모시고.

▲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선어록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전등록’ ‘인천보감’ ‘법원주림’ ‘죽창수필’ 등 옛날 스님들의 기록은 모두 그분들이 살았던 행적이다. 그 속에서는 수행자가 가야 될 여러 가지 길이 담겨있다. 그 것이 부처님을 닮아가는 길이다. 스님들 간 문답도 많다. 큰스님을 찾아다니며 직접 법 거량을 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지만 점점 그런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부처님이 안계시면 누구에게 묻겠는가. 부처님이 남기신 말씀이 경전이듯 조사들이 남긴 유훈이 어록이다. 성불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 앞으로 승가대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승가대학에서 많은 과목을 가르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소화를 못하면 소용이 없다. 각 강원에서 학인들을 지도하는 강주스님들의 사상과 학풍, 각 강원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했으면 좋겠다.”

안심사 주지 소임을 맡은 후 스님은 지금까지 매월 가족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어르신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든 세대가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한 스님의 노력이 14년간 이어지며 신도화합의 중심이 되고 있다. 누구든 찾아올 수 있는 열린 공간, 그것이 고희(古稀)의 고개 위에 서 있는 스님의 새로운 화두다. 생활과 마음 곳곳에 비워놓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그 넉넉함 속에서 더불어 공부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나선비구에게 ‘출가하는 목적과 자제하는 이익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스승들이 있었듯 일연 스님 또한 언제든 그들의 길라잡이기 되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림 한 점 걸지 않은 채 비워 놓은 안심사의 요사채에는 그런 스님의 마음이 스며있다. 곱게 단청 올린 대웅보전 처마 위로 대둔산자락이 살짝 어깨를 기댄다. 그 앞에서 환희 웃는 스님의 모습에서 단단하고 품 넓은 스승의 향기가 배어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인연 맺은 사람 귀히 여겨…꾸미지 않는 천진함도”

내가 본 일연 스님

□ 대운사 주지 주석 스님=동학사승가대학 학인 시절 주지 겸 학장으로 오신 스님을 처음 뵀다. 스님은 학인들의 잘못을 보시면 그 자리서 바로 지적하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치 큰언니가 동생들에게 잔소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근엄하고 냉정하게 야단을 치기 보다는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니’하시면서 야단 반, 걱정 반이었다. 후에야 알게 됐지만 스님께서는 학인들의 사소한 행동에도 관심을 보이고, 오가는 말로 야단과 칭찬을 건네며 학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이다. 그 관심의 뿌리는 학인들을 향한 깊은 애정이었다. 친소(親疏)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의 참된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은 특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의 실수나 부족함조차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는 모습을 볼 때면 순수하고 천진한 수행자의 모습도 엿보인다. 그렇기에 출가자의 일원으로 더욱 스승을 존경하게 된다. 그렇게 존경할 만한 스승이 계시기에 더욱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 전국비구니회 문화국장 자우 스님=동학사승가대학 학인 시절 일연 스님을 모시고 서기 소임을 살았다. 돌려 표현하지 않는 솔직한 성격이시라 도리어 스님을 어려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조금만 가까워지면 스님이 얼마나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다. 곁에서 소임을 살며 주변 사람을 부처님처럼 대하는 법을 배웠다. 늘 공심을 갖고 승가와 대중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셨는데, 특히 학인들이 평생 수행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걱정하는 마음에서는 ‘스승’이란 이름에 담긴 참된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일연 스님은 처음 뵌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적 없는 스승이다.

□ 김창균 동국대 미술학부 교수=2002년 정부대전청사에 공무원불자모임 반야회를 창립하고 경전강의를 부탁드린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해부터 2006년까지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정부청사를 찾아오셔서 불자들을 위해 강의를 해주셨다. 5년 여 동안 강의를 맡아주셨는데 강의비는 고사하고 차비 한 번을 드리지 못했다. 가끔 회비를 모아 조금이라도 강의비를 드리면 기어코 ‘회비에 보태라’며 돌려주시고야 말았다. 오히려 사찰에서 과일이며 떡을 가져다 회원들에게 나눠주시며 공부를 독려해주셨다. 그런 모습에서 포교에 대한 원력과 한번 맺은 인연을 끝까지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안심사 주지 소임을 맡으신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도량을 일신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사람을 귀히 여기는 스님의 마음, 그리고 한 푼의 불사금도 ‘내 것이 아니라’ 여기며 허투로 쓰지 않는 강직함에 있었다. 

 

[1360호 / 2016년 9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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