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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창살 안 재소자 업장 녹이는 순박한 호남 농사꾼

재소자에 부처님 전하는 김인수 포교사

▲ 빛 몇 줌 허락되지 않는 창살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김인수 포교사는 “무명 속에서 지은 죄가 미울 뿐”이라고 말한다. 무각사 불이문 앞에 그의 미소가 불이법문을 한다.

점심공양이 회덮밥이었다. 법복 입은 머리 희끗희끗한 보살과 하얀 상의와 법복 바지 입은 거사는 합장부터 했다. 보살이 먹기 좋게 발라져 나온 생선의 살을 빈 접시에 덜었다. 초장만 섞어 비벼 숟가락으로 밥과 야채를 떠 입에 담았다. 빛고을 광주 인심이 후했다. 주 메뉴인 회덮밥 외에도 딸려 나온 반찬이 적지 않았다. 시래기 된장국과 갖가지 김치, 계란말이, 미역줄기볶음, 잡채, 멸치볶음, 도토리묵무침이 상에 올랐다. 보살과 거사는 젓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밥그릇과 반찬그릇이 동났다. 보살과 거사는 다시 합장했다. 물수건과 포장지, 입 닦은 휴지를 손으로 말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통을 찾아 버리자 점심공양이 끝났다. 자연스러웠다. 식당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았던 보살과 거사는 기자를 태우고 광주 무각사로 향했다.

신심 돈독한 아내 덕에 귀의
그늘진 곳서 무주상보시 발원

1999년부터 광주교도소 교화
포교사 합격 뒤 곧바로 활동
불교분과 사무국장으로 봉사
무연고 재소자에 영치금 보시

일꾼 자처하며 지역단장 소임
행사 뒤 뒤처리하며 솔선수범
광주지역불교 재가불자 ‘표상’
팔재계법회서 총무원장상 수상

무각사 불교회관에는 포교사단 광주전남지역단, 신도단체, 교계 언론사 사무실이 모여 있었다. 각 사무실에서 나온 실무자들이 반갑게 합장하며 거사와 보살을 맞이했다. 어색하지 않았다. 김인수(72, 심우) 포교사와 아내 전봉자(62, 보현심)씨다. 사실 포교사단 제14차 팔재계수계대법회 총무원장 수상자 인터뷰로 만났다. 뜻밖에 아내와 함께였다. 두 사람은 점심공양 때부터 내내 “우리 보살님” “우리 거사님”을 입에 달고 있었다.

▲ 같은 길을 걷는 김인수 거사와 전봉자 보살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다 우리 보살님 덕분이에요. 제 뒷바라지만 하다 허리가 안 좋아져서 마음 아픕니다. 포교사로서 부처님 제자로 사는 모든 순간이 우리 보살님 덕입니다.”

아내의 굽은 등이 눈에 띄었다. 남편 말에 환한 주름살이 잡힌다. 아내의 신심은 깊었다. 큰아들이 44살, 그 아들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에 업고 절에 갔다. 하도 어려서 옆에 앉혀 놓지 못하고 업은 채로 절했다. 아들이 수차례 미끄러져 떨어질 정도였다. 그때 남편의 신앙은 기복이었다. 절에서 기도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생업으로 바빠 아내와 동행하기 힘들었다.

“우리 거사님이 왜 그렇게 좋은 종교와 스승을 혼자 갖고 사느냐면서 ‘나도 한 번 가져보겠다’고 하시고 호남불교대학을 다녔어요. 우리 집이 장사를 했는데, 저녁 드시고 7시부터 9시까지 꼬박 2시간을 공부하고 오곤 했습니다. 집에 오면 10시쯤인데, 얼굴이 그렇게 밝았어요.”

▲ 부부는 행동 하나하나 신심이 묻어났다.

초발심이고 환희심이었다. 생업에 지친 남편은 부처님 가르침 배우려고 앉은 좌복이 그렇게 편안했다. 곰곰이 사유하는 시간도 늘었다. 살아오는 길이 허상만 좇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좋은 옷, 구두, 집, 차 등등. 무거운 짐 싣고 내리는 장사를 하며 생긴 흉한 무좀으로 썩어갔던 열 손가락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본래 진면목을 찾고 싶었다. 아내의 적극적인 권유로 포교사 시험을 준비했다. 아내 말마따나 고3 수험생처럼 공부했다. 1999년 포교사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2000년, 조계종 포교사단이 서울 조계사에서 공식출범한 법석에 환희심 안고 참석했다.

“가족을 전법하고 싶었어요. 아들과 딸 그리고 일가친척 모두요. 저보다 수승한 우리 보살님은 빼고요. 하하하. 보살님 영향 아래 그 빛으로 여기까지 왔네요.”

남편은 포교사단 광주전남지역단 북부 교정교화팀에 속해 있다. 1999년 포교사 시험에 합격한 뒤부터 광주교도소 교정교화활동을 한다. 삼중 스님 책에 소개된 수많은 일화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지 않는, 그늘지고 꺼리는 곳에 전법 하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무주상보시, 부처님 제자로 살고 싶었다. “나누고 베풀면 다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이라 여겼다. 남편은 빛 몇 줌 허락되지 않는 창살 안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남편은 광주교도소 교정협의회 종교분과 중 불교분과 사무국장으로 일한다. 법회 준비 등 불교행사는 남편 손을 거쳐야 했다. 2003년부터 무연고 재소자에게만 매달 영치금을 보시하는 연꽃자매회 주축 멤버다. 사실 광주교도소보다 고룡산업정보학교(광주소년원)를 먼저 찾았다. 부처님 품 안에서 만난 이재언 광주전남지역단 부단장과 인연이 연결고리였다. 포교사도 아니었지만 1996년부터 학교 법회를 도왔다. 나이 들고 아이들과 세대 차가 커지고, 학생 숫자도 줄어들면서 부처님오신날, 여름과 겨울수련회, 일요일 법회만 나가지만 인연은 놓지 않고 있다.

“죄가 밉지 사람은 밉지 않아요. 누구나 불성을 갖고 있어요. 무명 속에서 지은 죄가 미울 뿐입니다. 잠깐 실수해서 처지가 조금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시인 정호승은 ‘걸인’에서 ‘사사불공(事事佛供) 처처불상(處處佛像)’을 노래했다.

▲ 서로 바라보며 웃는 부부.

“나는 그대의 불전함/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배고픈 불전함/ 동전 한닢 떨어지는 소리가 천년이 걸린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 내 손이 먼저 무량수전 마룻바닥을 기어가듯/ 천년을 기어가/ 그대에게 적선의 손을 내미나니/ 뿌리치지 마시라 부디/ 무량수전이 어디 부석사에만 있었던가// 우리가 흔들리며 타고 가는 지하철/ 여기가 바로 무량수전 아니던가/ 나는 그대의 불전함/ 다 닳은 타이어 조각을 대고 꿈틀꿈틀 무릎도 없이/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가난한 불전함/ 동전 한닢 떨어지는 소리가/ 또 천년이 걸린다.”

어쩌면 남편은 재소자들의 불전함이었다. ‘사람’이 뒤집어쓴 죄라는 껍데기를 벗는데 천 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들이 머무는 교도소가 남편에겐 무량수전이다. 아니, 오히려 재소자들이 남편의 불전함이다. 어떤 이는 편지로 ‘신심명’의 “호리유차 천지현격(毫釐有差 天地懸隔), 욕득현전 막존순역(欲得現前 莫存順逆)” 문구를 적어 보냈다. 다른 이는 부채를 만들어 적선(積善)의 이로움을 가르쳤다. 

돌이켜보면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이 ‘신심명-몰록 깨달음의 노래’(모과나무, 2015)에서 풀이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래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는 경책이지만 재소자는 그냥 조건 없이 나누는 남편의 마음을 고마워했다. 혜국 스님도 이렇게 설명했다.

“순역심이란 거슬리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과 따라주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생각에 놀아나지 말라는 당부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은 그 빛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비춘다.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 하는 순역심이 없다. 똑같이 준다는 생각 자체도 없다. 그냥 조건 없이 주고 있다. 어찌 너나 나니 거슬림이니 따름이니 하는 순역심이 있겠는가.”

땅에 기대 사는 농사꾼이기 때문일까. 남편은 순박하고 솔직했다.

“우리 보살님과 달리 전 수행이 덜 익었어요. 그분들에게 여여하지 못한 마음을 실토하곤 합니다. 이해관계 안에서 제게 안 좋은 행동을 한 사람들이 밉더라고요. 왜 그렇게 마음이 순식간에 바뀌는지.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 과거도 지금도 계속 여여한 마음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곤 하며 교감합니다. 그들 보면서 저를 반성하고 잘못을 고쳐나갑니다.”

남편은 하심이 몸에 뱄다. 3대 포교사단 광주전남지역단장 소임을 맡을 때도 그랬다. 행사가 끝나면 항상 손수 뒤처리를 했다. 법회를 주선하고 교육을 만들고 매달 발행하는 회보를 곳곳에 배달했다.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지라, 광주 지역불교에선 재가불자의 표상이라 불린다. 부창부수다. 건물 세입자들 관리비 부담을 덜고자 10년째 부부 스스로 화장실, 복도, 건물 앞 인도, 주차장을 청소하고 있다. 운동 삼아 한다지만 아내는 “우리 행동이 그네들 표정을 밝게 한다”며 웃고 만다. 식당서 쓰레기 주워 버리는 장면이 겹쳤다. 오래됐다는 증거다. 남편의 총무원장 수상 소감도 겸손하다.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많은 데 상을 받으니 부끄럽습니다. 여태 방일하게 살아온 나를 참회하는 경책이라고 생각해요. 늘 하심하면 살겠습니다.”

남편의 법명은 ‘심우(尋牛)’다. 찾을 심(尋), 소 우(牛)를 쓴다. 호남불교대학 졸업할 때 당시 관음사 주지 진우 스님이 내렸다. 하심으로 불성[牛] 길들이는 목동으로 살면서 창살 안 재소자들 업장을 줄이는 데 진력하고 있다.

사진 촬영차 무각사 불이문을 지났다. 남편과 아내가 대웅전 부처님과 불이문 호법신장을 지나칠 때마다 합장했다. 세월보다 두꺼운 신심으로 등이 굽었다. 무각사 풍경소리가 불전함에 떨어지는 ‘동전 한닢’ 소리다. 

광주=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1360호 / 2016년 9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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