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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통교입선(通敎入禪)

기자명 김정빈

화두선과 교학은 대화가 필요

지난주에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인 조계종의 표준 수행법인 화두선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화두선은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최상승 근기를 가진 이들을 위한 수행법이라는 것이었다. 비유로 말하면 화두선은 대학원대학교 과정과 비슷하다. 대학원대학교에 진학하려면 대학교를 마쳐야 하고,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고등학교를,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중학교를,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초등학교를 마쳐야 한다. 불교 수행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화두선은 이중 대학원대학교만을 개설하고 있으므로, 우리 불교는(조계종은) 그 아래 단계에 있는 신자들을 위한 수행법을 따로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교학을 무시, 폄하하는 화두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나가야
교학과 선정이 제자리를 잡아
불교다운 법 체계 완성되어야

그렇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먼저, 화두선을 지도하는 선사님들 대부분이 신자의 근기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오직 화두선만을 권한다. 그가 초등학생이든 중학생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가 다 대학원대학교에 입학해야 한다고 권하는 셈이다.

조계종에 화두선을 수행하는 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화두선을 수행하는 분들은 적고 대부분은 다른 종파와 다름없이 교학을 병행하고 있다. 문제는 교학을 중시하는 불교 지도자 중에는 화두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분이 많다는 점에 있다. 이분들은 화두선이 부처님이 직접 가르치신 수행법도 아니고, 교학 체계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학을 중시하는 분들은 교학이 화두선을 위한 전(前) 단계에 머문다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학이 근기가 낮은 이들을 위한 단계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분들 중에는 화두선은 교학과 맞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진 분들이 많다. 화두선은 불교 안에 갑자기 튀어나온 기이한 어떤 것일 뿐 부처님의 사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심지어는 반대된다는) 견해를 가진 분들이 적지 않다는 의미이다.

지금 시대는 급변하고 있다. 변해도 아주 크게,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고, 이미 변했다. 그 결과로서 종교인의 수가 급감하고 있다는 것은 필자가 이 원고의 첫 부분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출가자의 수는 매년 감소하고 있고, 신자 또한 줄고 있다. 화두선에 대한 관심도 현저하게 줄었다. 이런 흐름은 시대적 대세이기 때문에 갈수록 강화될지언정 약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화두선을 갈림길 앞에 서도록 한다. 지금까지의 고유성을 지켜갈 것인가, 아니면 시대적 흐름을 고려하며 변화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두 길 중 필자는 후자를 지지한다. 그렇다고 전자를 부정하거나 멸시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이 글의 앞부분에서 현대는 나와 개인이 주체가 되는 시대라고, 누구나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진 시대라고 말했다. 그 점에서 화두선 또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으므로 그가 어느 편을 결정하든 그 결정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필자는 화두선이 대학원대학교 과정에서 대학교 이하의 과정으로 내려와서 변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화두선이 교학의 입지를 인정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입지 또한 한계를 명백하게 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화두선은 교학을 무시, 폄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하는 말이다.

이 입장에서 화두선은 사교입선(捨敎入禪: 교를 버리고 선으로 들어감)을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다. 교는 부처님 말씀인데 불교 신자로서 교를 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교는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용해야 할 대상이다. 물론 교 자체가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교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교를 기초로 하지 않는 깨달음은 이루어질 수도 없거니와 혹 무언가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불교의 깨달음은 아니다.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교는 선정을 위한 훌륭한 전 단계다. 같은 의미에서 대승불교 또한 교를 선정을 위한 전 단계로 보아야 하고, 이는 미래 불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래 불교는 사교입선이 아니라 통교입선(通敎入禪: 교를 통해 선정으로 들어감)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는 선정을 위한 좋은 기초이며, 선정은 깨달음을 향한 좋은 발판-그것을 굴려 마음을 비약하는 도약대(다이빙대)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60호 / 2016년 9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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