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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아침의 경 읽기

기자명 이미령

“2600년전 부처님 마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스님, 서늘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답장을 씁니다.

진리 앞에 간절한 스님 모습
계율 두려워하는 스님 모습
재물 보지않는 결연한 모습
이런 모습에 불자들 감명받아

제게는 매주 월요일 아침 7시 니까야를 함께 읽는 벗님들이 있답니다. 이 모임도 벌써 4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첫차를 타려고 일찍부터 서두르는 분도 있습니다.

월요일 새벽마다 집을 나서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길잡이 노릇을 하기 때문에 결석도 지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월요일까지 써야 할 많은 글들이 늘 있었고, 또 매주 월요일 저녁에는 책읽기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지난 3년 간 저의 월요일은 거의 밤을 꼴딱 샌 상태에서 집을 나와 그날 밤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고행이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매주 참석하다가 결국은 올해부터 매월 한 차례만 참석하는 것으로 양해를 구했지요. 함께 경을 읽던 벗님들이 너그럽게 이해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변함없이 매주 월요일 새벽 경을 읽으러 집을 나서고 있지요.

그런데 새벽의 경읽기는 말할 수 없는 매력을 안겨줍니다. 뼈가 녹을 것처럼 고단한 중에도 새벽 공기를 쐬며 달려가서 경전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가다 보면 2600여 년 전 부처님 마음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부처님이 스님들을 불러 모아 놓고서 어떻게 수행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내용을 만날 때면 감격하고 맙니다.

상상해보세요. 스님!

지금 우리에게 부처님은 금빛 번쩍이며 저 높은 단 위에서 눈을 반쯤은 감고 앉아계십니다. 하지만 사실 부처님은 그렇지 않았잖아요. 다른 스님들과 똑같이 하루 한 끼 탁발로 허기를 지우시고,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서 절에 돌아오신 뒤 한나절을 보내시고 나서 해질 무렵이면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지요.

지금은 “덕 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하며 청법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대중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법사 스님이 근엄하게 오르지만,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갓 출가한 스님들과도 똑같이 바닥에 앉으셨던 것 같습니다. 대중을 위해서 방석 하나 정도의 높은 자리에 앉으셨을 수도 있겠네요.

월요일 아침에 읽는 경전 속의 부처님은 바로 이런 분이었습니다. 경전을 읽으면 당신을 흠모해서 당신과 똑같이 집을 나선 제자들을 바라보는 그 눈길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귀한 출가인연을 아름답고 가치 있게 완성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수행자의 몸가짐, 마음가짐을 일러주시는 그 음성이 들려옵니다.

저는 벗님들에게 경전의 내용을 설명해드리다 가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아, 그 당시 스님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부처님이 자신과 똑같이 바닥에 앉으셔서 이렇게 조곤조곤 일러주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니까야를 읽다보면 문득 문득 니까야야말로 우리 같은 재가자보다 스님들이 먼저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힙니다. 스님들이 아침저녁으로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니까야를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 가셔야 하고, 니까야를 읽으신 스님들이 우리 앞에 서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스님, 요즘 재가자들 사이에는 초기경전 읽기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팔리어를 공부하는 재가자들도 많아졌습니다. 팔리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저처럼 한글로 번역된 니까야를 꼼꼼하게 읽어가면서 2600여 년 전 부처님 가르침을 자신의 눈과 귀와 입으로 탐독하는 재가자가 아주 많습니다.

경전을 읽고 싶은데 재가 생활이 너무 바빠서 결국은 월요일 그 이른 새벽에 눈 비비며 모여와 경을 읽은 뒤 부랴부랴 직장으로 달려가는 재가자들이 이렇게 있습니다. 세상은 또 얼마나 다양합니까? 얼마나 치열합니까? ‘절이 싫으면 스님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지만 세속 세계에서는 나 싫다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몸이 병들어 가는 걸 알면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푼돈에 벌벌 떨어야 하는 것이 세속 생활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틈을 내어 경을 읽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재가불자들입니다.

이런 재가자들 앞에서 스님들이 법문을 하실 때면 재가자들은 알아차립니다. 저 말씀이 얼마나 간절하고 진지한 수행의 샘에서 길어 올려 졌는지, 혹은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채 그냥 법좌에 올라 시간만 때우려는 것인지….

그렇다고 불자들이 모든 스님에게 부처님 같은 지혜와 선지(禪旨)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진리 앞에 간절하게 서 있는 모습, 사소한 계율 앞에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우리 같은 재가자가 24시간 쫓아다니는 재물과 명예쯤은 돌아보지 않는 결연한 모습만을 보아도 재가자는 감동합니다.

아, 스님, 출가재가를 딱 나누어서 쏟아내는 저의 이런 생각에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요? 사실, 이런 답장을 쓰는 건 어제 수요일 저녁의 일 때문이기도 합니다. 불교책 읽기 모임에 가려고 조계사 뒷길을 가던 중이었지요. 직장인 남성 서너 명이 제 앞에서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저녁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인 것 같았지요.

마침 조계사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염불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소리가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그 남성들이 쏟아낸 말은, “중도 고기 먹지?”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겠더군요. 스님을 중이라 불러서도 아니었습니다. 고기를 먹고 안 먹고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불교와 관련해서, 승가와 관련해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의미 있고 아름답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저들은 목탁과 염불소리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고작 저런 말만을 주고받는가 하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스님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하루를 사느냐가 불교를 보여주는 유일한 창(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보다도 팔만대장경보다도 한 스님 한 스님의 행동거지가 세속에는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자 “아, 스님! 스님들께서는 정말 잘 살아주십시오”하는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잘 사시려면 2600여 년 전 부처님께서 당신과 똑같은 모습의 스님들에게 어떤 당부를 하셨는지를 조목조목 적어놓은 경전을 읽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잇따랐지요.

오늘 아침은 너무 서늘해서 그만 창을 닫고 말았습니다. 지난 무더위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환절기에 특히 감기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평안하시길.

이미령 드림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60호 / 2016년 9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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