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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삼국유사 순례 현장-부여 정림사지·공주 동혈사·공주박물관

옛 백제 수도서 아픔 깃든 불교문화의 아름다움에 취하다

▲ 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 사비성에 창건된 정림사는 1942년 발굴조사에서 그 존재가 드러났다. 순례단 뒤쪽으로 보이는 정림사지5층석탑은 정림사와 동시대에 세워졌음에도 긴 세월 당나라 소정방의 승전탑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역사는 인류 사회의 발전과 관련된 의미 있는 과거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이나 현상이 진행되거나 존재해 온 과정을 비롯해 자연 현상의 변화 등 인류 사회의 변천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도 누가 어느 시점에서 기록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정권이 바뀌었을 때 앞선 정권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전 정권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심지어 그 기록을 말살하기까지 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부국강병 꿈꾸며 세운 정림사
백제 멸망 후 자연스레 잊혀져

오층석탑은 소정방 훼손 이래
당나라 전승기념탑으로 인식
1979∼84년 발굴조사 과정서
정림사와 동시대 석탑 밝혀져

공주 4방에 세웠던 혈사 가운데
동혈사엔 아름다운 고려탑 남아

오랜 역사를 이어온 우리의 과거사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있었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역사는 신라의 관점에서 기록됐다. 자연스럽게 신라의 그것에 비해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는 축소됐고, 정사와 야사 모두에서 그 분량이 줄어들고 말았다.

▲ 순례단은 세월의 풍파를 온 몸으로 마주하며 곳곳에 상처 입은 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 앞에서 몸을 낮췄다.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한 축을 형성했던 백제는 그런 점에서 상당한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백제불교의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경우도 있었다. 백제가 부국강병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며 마지막 수도 부여 사비성에 세웠던 정림사(定林寺)가 대표적이다.

정림사는 1942년 발굴조사에서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중건 당시 절 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현종 19)년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 이후 1979∼1984년까지 이어진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 절터가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됐다. 당나라 소정방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해 설립한 탑으로 인식되어온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이 정림사 창건과 함께 건립된 석탑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이때다.

▲ 공주 4방위 혈사 중 하나인 동혈사에는 쌀이 나오는 바위에 관한 옛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법보신문 삼국유사순례단은 9월24일 이토록 서글픈 역사를 품은 옛 백제의 불교 흔적을 따라갔다. 첫 번째로 찾은 정림사지는 한창 백제문화제 개최 준비로 분주했고, 축제를 시작하는 주민들의 표정엔 설렘이 묻어나기도 했다. “목조를 석조로 변형해 만든 것으로,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뿐 아니라 삼국시대 석탑 연구의 귀중한 예”라고 정림사지5층석탑의 상징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한지연(금강대 교수) 박사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1층 탑신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새겨놓아 당시의 수난을 엿볼 수 있다”고 쓰라린 백제의 역사를 설명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의 계백은 겨우 5천의 군사로 소정방의 13만 군사와 김유신을 필두로 한 5만 신라군 등 18만의 나당연합군을 맞아 황산벌에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계백이 전투에 패하며 죽음을 맞자 사비성은 손쉽게 연합군에게 함락됐고,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도 소정방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나라로 보내져 그들의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곳에서 병들어 죽은 후에는 오나라의 마지막 왕 손호와 진나라의 마지막 왕 진숙보의 무덤 옆에 묻히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이때 백제 땅에서 승리를 만끽한 소정방은 바로 정림사5층석탑 1층 탑신 사방에 승리를 기념하는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겨놓았다. 그로 인해 자칫 정림사 창건과 함께 건립됐던 탑이 당나라의 승전비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패자의 역사가 지워진 순간이다.

불운한 역사를 간직했음에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한 석탑에 매료됐던 순례단은 이어 바로 옆 석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대 건축물인 보호각 안에 자리한 정림사지석조여래좌상(보물 지108호)은 오른팔과 왼 무릎이 떨어져나갔고 몸체의 마멸이 심한 상태였다. 비로자나불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연꽃을 엎어놓은 모습의 하대, 8각 받침돌로 구성된 중대, 연꽃이 활짝 핀 상대 등 3대로 이뤄져 있다. 불상보다 대좌가 눈의 띌 정도다. 순례단은 옛 백제에 불교의 숨결을 불어넣었던 선조들을 그리며 불상 앞에서 몸을 낮췄다.

▲ 공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지역 출토 불교문화재들은 가치를 잃은 채 그저 한 공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정림사지를 떠나 발을 디딘 곳은 웅진시대의 주 무대였던 공주다. 이 지역에는 백제가 공주산성을 기준으로 동서남북 사방의 혈자리에 건립한 혈사가 있다. 그 중 순례단이 찾은 곳은 동혈사. 한 박사는 “풍수지리적 차원에서 4방의 방위기준을 세운 것뿐만 아니라 당시 양나라와의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던 백제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활용하면서 이러한 혈사가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이 절이 세워진 배경을 설명했다.

지금의 동혈사는 왕복 2차선 도로에서 600미터 산길을 올라야 모습을 드러낸다. 본래의 동혈사지는 동혈사 가는 산길의 중턱 즈음에 있고, 그 규모는 일반적으로 산사에서 볼 수 있는 산신각 크기 정도로 작다. 동혈사지 위쪽에 자리한 지금의 동혈사는 한때 법당과 산신각이 불에 타 없어졌었다. 이후 1996년에 현재 볼 수 있는 법당과 나한전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절에는 옛 텔레비전 프로그램 ‘전설의 고향’에 등장하는 쌀바위에 얽힌, 그야말로 옛날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한 스님이 아픈 호랑이를 절로 데려와 보살핀 끝에 나았고, 호랑이는 생명의 은인인 스님에게 쌀이 나오는 바위를 알려주었다. 이후 가난한 이 절에 손님이 찾아오면 그 사람 수에 맞게 쌀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스님이 욕심을 부려 바위의 입구를 크게 만들면서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법당 뒤편의 쌀바위를 지나 조금 오르면 고려시대에 지은 동혈사지3층석탑이 참배객을 맞는다.

▲ 동혈사지3층석탑은 빼어난 풍광을 배경으로 백제와 고려의 예술혼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 위쪽 나한전에서 바라본 3층석탑은 흡사 설악산 봉정암 5층석탑(불뇌사리보탑)과도 닮았다. 탑은 옥개의 추녀 끝이 위로 곡선을 그리면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정림사지5층석탑의 아름다움에 비견할 만큼 탑 자체가 유려한데다, 저 멀리 아스라이 펼쳐지는 공주의 모습과 산 능선을 배경으로 한 풍광은 더없는 비경을 연출한다.

한참이나 탑을 바라보며 무념무상의 세계에 들었던 순례단은 마지막으로 공주박물관을 찾았다. 지역의 옛 절터에서 옮겨온 불상들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야외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종교적 배려는 물론 문화재로서의 가치조차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불상들은 우리나라 문화재관리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불교문화재, 즉 성보는 제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가 빛나는 법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박물관에서 유물과 불교문화를 눈에 아로새긴 순례단은 정림사지5층석탑과 동혈사지3층석탑의 아름다운 잔상을 간직한 채 백제로의 시간여행을 마쳤다.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제6차 삼국유사 성지순례
일시 : 10월22일 / 순례코스 : 서산·예산
동참인원 : 40명 / 문의 : 02)725-7012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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