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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오대송초의 승려화가

기자명 명법 스님

눈에 닿는 것 그대로 진실이라는 선적 경지 화풍에 담아

▲ 거연(巨然) 오대 남당 때의 화승. 계산난약도(溪山蘭若圖)의 부분.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듯이 문인의 그림이 화공의 그림과 격이 다름을 알아보고 그 예술적 가치를 평가했던 최초의 인물이 소식이다. 소식이 이름 붙였듯이 ‘사인화(士人畵)’란 벼슬아치, 즉 글을 쓰고 읽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을 말한다. 따라서 그림에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강조되었다.

오대 송초의 사회적 혼란기
문인들 중원서 촉으로 이동

험준한 산속 자연 은둔하며
선종으로부터 큰 영향 받아

눈 앞 사물은 경계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 얻는 기연

경계 위에서 물들지 않으면
사물 자체가 깨달음의 현현

문인화는 북송 이래 고문운동의 영향 아래, 선승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문인화는 승려들의 문화와 문인사대부의 문화가 결합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중에 귀인이 아닌 자가 없었다. 모두 은일하는 선비이거나 뛰어난 인물이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역대명화기’의 기술이 있듯이 문인화는 ‘사기(士氣)’, 즉 선비의 품격을 표준으로 하고 ‘일품(逸品)’, 즉 경계를 벗어난 초연한 마음을 종지로 한다. 또한 산수, 화조, 그리고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나 목석을 소재로 한 그림이 주종을 이루며 그림 속에 드러난 작가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고 그림을 그린 필묵의 정취를 추구했다. 또한 형사보다 마음의 운, 즉 개성적 표현을 강조하였다.

소식의 주장에 따르면, 문인화의 특징은 외형의 닮음, 즉 모방의 기술이나 손재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인다움, 즉 그들의 인격과 독립적 정신, 그리고 소박하고 담박한 취향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경지를 ‘의경’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의경은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탁했던 산수자연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소식이 왕유의 작품에서 얻은 통찰,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평가는 이후 문인화가들이 지향했던 창작의 기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림이 문인화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작가가 문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작품에 드러난 경계가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당말 오대에 이르러 불교의 중심이 중원에서 촉으로 이동하였으며, 촉 지방의 깊고 험준한 자연은 문인들이 몸을 숨기는 장소가 되었다. 당말 오대에 중국 전역에 퍼진 선종은 그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사상과 취미가 싹틀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사대부들이 거주했던 촉 지방의 험준한 산수는 바로 문인사대부가 마음을 수행하는 장소이자 동시에 그들 마음을 드러내는 매개체였다. 그들의 은거를 뒷받침해 준 사상적 근거는 노장사상이 아니라 선종사상이었는데, 마조도일이 주장했던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선법은 그들에게 새로운 안목을 열게 했다. 또한 “눈에 닿는 것이 모두 진실(觸目則眞)”이라는 선적 경계 역시 사대부들에게 개별적인 현상(事), 즉 ‘사상(事象)’으로부터 본성을 깨닫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청원행사가 주장했던 “즉사이진(卽事而眞)” 역시 개별적인 것에서 전체성을 파악하는 선적 경계를 제안했다.

선종은 ‘마음이 곧 부처’임을 주장했다. 초기 선종은 “일체 선악 경계의 밖에 심념이 일어나지 않는다”와 “안으로 자성이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를 강조했으며 자성을 모든 것 위에 두었다. 동시에 초기선종은 ‘자성본정’의 도리를 반복해서 지적했으며 사람마다 모두 불성이 있으며, “사람에겐 남북이 있지만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 오랑캐와 화상이 다르지 않은데 불성이 어찌 차별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일체 현상의 무차별성을 강조했으며, 마조도일과 석두희천에 이르면 불성과 일상의 일용사가 연관되어 “단지 평소에 무사하여 오줌 누고 똥 싸고 밥 먹고 옷 입고 곤하면 잔다”는 거침없는 경계로 나아갔다.

후기 선종은 더 나아가 ‘피곤하면 피곤하고 잠자면 잠잔다.’라고 하여 도를 깨달은 자가 보면, 사람의 본심은 청정하며 모두 불성이 있어서 한 점을 돈오하기만 하면 인간이 현세에 성불하고 성불하여서는 마음이 하고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적 실천적 변화에 상응하여 승려 사이에서 화선지와 묵을 가지고 노닐면서도 그것이 깨달음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생각들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들은 밝은 등불 아래서 좌선하고 계율을 지키기도 했지만,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비단을 펼치거나 화선지를 펼치고 묵희를 즐기는 데 걸림이 없었다. 그들에게 눈앞의 사물들은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 기연이었으므로 그림은 선으로 나아가는 기연이고 선은 그림의 경계를 알아보는 안목을 제공했다.

이와 상응하여 안사의 난 이후 중국 내부에서 일어난 전란과 세상 밖의 깊은 산속에서 일어난 선풍의 충격 아래 문인 사대부들은 다투어 산림에 은거하고 도회지를 벗어나 산수에 정을 의탁하여 중국회화사상 가장 뛰어난 산수화의 고봉을 일으켰다. 이 시기에 대가들이 나와 그림의 자취가 훌륭했으며 왕유, 장조, 형호, 관동, 동원, 이성, 범관 등 일대 종사 대가가 출현하였다. 이것은 속인화와 선승화가 필묵형식상 비록 각자 추구하는 바가 있지만 그들의 ‘묵희’ 사이에는 깊은 공동의 인연이 있다.

선승들과 사대부들은 마음이 물을 주재하며 물에 의해 부려지지 않았으며 직관, 돈오를 통해 외물을 초월하고 절대 자유의 인생경계에 나아갔다. 이런 풍조는 오대 이후 대가들을 배출했다. 만당오대에 등장한 화승으로 관휴가 있다. 그는 꿈에서 본 나한의 상을 그려 이름을 떨쳤는데, 이른바 ‘몽수’는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광일한 필적으로 나한의 괴이하고 독특한 모습을 표현한 것을 말한다.

거연 역시 승려화가로, 강녕군 개원사에서 수련하였으며 남당시기에 산수를 그렸다. 송의 건국 이후 수도 개봉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거연의 산수화는 선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의 스승 관동에 비교해볼 때 필묵은 더욱 투윤하고 조금 성급한 기운(躁氣)이 있다. ‘역대명화기’에서는 거연이 “연풍기상을 잘 그렸으며 산천의 넓고 높은 경치를 잘 그렸다”고 하였다. 미불의 ‘화사(畫史)’는 그의 그림이 “풍기가 청윤하고 배치가 천진함이 많다”고 하였다. 또 ‘성조명화록’에서는 거연의 산수화가 “고봉이 산엄하고 풍골이 완연하게 서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석혜숭은 회남인이며 시를 잘하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그 시는 찬녕, 원오 등 몇 사람과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로 뛰어났다. 송초에 존재했던 ‘구승’ 중 한 사람이며,  ‘도화견문지’에서는 그가 “기러기, 원앙 등을 잘 그리며 작은 풍경을 잘 했고 한적하고 고원하며 쓸쓸하고 넓은 경계를 잘 그렸는데, 사람들이 다다르기 힘든 경지였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원하고 텅빈” 경계는 선적 경계를 의미한다.

혜숭의 작품은 구양수, 왕안석, 소식 등의 찬양을 받았으며, 침괄의 ‘도화가’에서는 “소경은 혜숭이 막막하다”고 하면서 혜숭의 그림에 나타난 선의(禪意)를 잘 이해하고 있다. 소동파 역시 혜숭의 그림에 대해 찬탄을 그치지 않았다. “대나무 밖의 복숭아 꽃 두세 가지, 봄 강의 물이 따뜻한데 오리가 먼저 안다”고 하여 혜숭의 오리 그림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했다.

거녕 역시 승려화가로, 풀벌레를 잘 그렸으며 명성이 매우 높았다. 곽약허는 ‘도화견문지’에서 그 수묵초충을 “비록 상함이 크고 진실성을 잃었으나 필력이 굳세어 드물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는데, 거녕이 큰 풀벌레를 그린 것을 보면 형사가 아니라 그 마음의 일기를 구하여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승려 전고는 오대 명가 중 한 사람이다. 전고가 그린 용 그림은 매우 유명했다. ‘도화견문록’에서는 “그 체를 보면 필묵이 유상하고 완사의상을 잘 그렸다”라고 하였다.

소식은 선종의 “모든 경계 위에서 마음이 물들지 않는다”는 사상을 사용하여 서화의 최대 작용이 ‘자오(自娛)’, 즉 스스로 즐김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선종의 이론을 통해 회화를 더 깊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는데, 그의 글을 통해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이 어떻게 외물에 걸리지 않고 마음의 깊은 경계를 드러내는 매체가 되는지 알 수 있다.

“군자는 사물에 뜻을 깃들일 수 있으나 사물에 뜻을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물에 뜻을 깃들이면 비록 미물이라도 즐거울 수 있고, 비록 우물(尤物)이라도 병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노자’에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귀를 먹게 하며 오미는 입을 상하게 하며 밭의 사냥에 치달리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한다”고 하였지만 성인이 이 네 가지를 폐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뜻을 깃들였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어찌 성색의 취미이겠는가? 그래서 즐거워하여 종신토록 싫증내지 않았다.

대개 사물은 즐거워할 수 있고 사람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옮기기 어려운 것은 글씨와 그림만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가 뜻을 머물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처음 내가 어렸을 때 이 두 가지를 좋아하여 집안에 있는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에게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웃으며 나는 부귀에 박하고 책에 후하며 생사를 가벼이 여기고 그림을 중시하는데 어찌 전도되어 착오하지 않고 그 본심을 잃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더 이상 보면 즐거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비록 그 때 다시 쌓아두어도 사람들이 가져가게 하고 또 다시 아까워하지 않았다. 마치 연기가 눈을 지나가는 것처럼, 백 마리 새가 눈을 감득하는 것처럼 어찌 흔연하게 접하지 않고 버리고 다시 생각하겠는가? 그래서 두 물건은 항상 나의 즐거움이 되었고 나의 병이 되지 않았다.”

소식의 이 말이야말로 오대송초의 중국회화 흐름을 적확하게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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