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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수락산 석림사 주지 능인 스님

불교사회복지는 부처님 가르침 전하고 시은에 보답하는 길

▲ “인도성지에서 만난 가난한 아이의 눈망울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능인 스님은 불교사회복지와 불교사회복지학의 발전을 위한 변함없는 원력을 다졌다.

수락산 석림사는 의정부 장암역에서 수락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주말이면 등산객들 왕래로 늘 북적이지만 평일 오후에는 이곳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듯 고요하다. ‘큰법당’이라고 쓰인 한글 현판이 걸린 법당에 참배하고 내려오니 주지 지암능인(智庵能仁) 스님이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건낸다.

장애아 보살피려 개종하며
눈물 흘리는 신도 모습에
불교 사회복지 활동 발원

인도성지순례서 만난 아이
가난에 고통받는 이들 보며
“수행자의 안일한 삶” 반성

일본서 사회복지 공부하며
교육복지사업 중요성 절감

2000년 노인복지관장 맡아
교계 노인복지사업에 한 획

“불교복지학 정립이 과제
스님들은 상담전문가 돼야”

수락산 석림사는 조선후기 정치인이자 학자였던 서계 박세당(1629∼1703)의 화주로 1671년 석현, 치흠 두 스님이 세운 암자 석림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고찰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화마를 겪은 석림암은 폐허나 다를 바 없이 쇠락해 버렸다. 다행히 1956년 주지로 부임한 비구니 상인 스님과 상좌 보각 스님이 수십 년에 걸쳐 중창해 오늘의 석림사로 다시 섰다. 능인 스님은 바로 석림사를 중창한 상인 스님의 손상좌, 보각 스님의 상좌다.

“젊어서는 공부하고 학교, 복지관 등에서 소임을 맡아 사중의 일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이제 승가대학과 복지관 소임서 모두 물러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니 수행과 도량에 힘을 쏟아 신도들의 시은도 갚고 부처님 은혜에도 보답해야죠.”

중앙승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던 능인 스님은 2011년 정년퇴임했다. 이어 2012년 2월에는 고양시 일산노인종합복지관장에서도 물러났다. 2000년 복지법인 연꽃마을이 수탁해 문을 연 일산노인종합복지관 초대관장이었던 능인 스님은 고양시 최초의 노인복지관이자 전국 최대 규모였던 노인복지관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며 교계 노인복지사업에 한 획을 그었다.

“개관 첫날부터 어르신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어요. 나름 열심히 준비해서 문을 열었지만 그렇게 많은 어르신들이 올 줄이야. 무엇보다 공양간, 식당이 제일 큰 문제였어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니 혹시 식중독 사고라도 생기면 큰일인데다 밥이 모자라지 않을까, 반찬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죠. 그래서 매일 점심시간이 되면 두세 시간씩 식당에 가 있었어요.”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부족하다 싶으면 직접 식탁을 닦고 음식을 날랐다. 하루 종일 복지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살피고 급할 때면 주저 없이 일손을 거들었다. 덕분에 “호수공원 옆에 살면서도 꽃이 피는지 단풍이 오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지만 10여 년간 단 한 차례의 식중독 사고도 없이 언제나 최고의 평가를 받는 복지관이 되었다.

하지만 몸이 늘 마음을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었다. 누적된 피로, 그리고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복지관에 대한 타종교계의 끝없는 견제에 시달리던 스님의 건강은 2003년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들 정도로 악화돼 버렸다. 가뜩이나 허약하던 체질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것이다.

스님의 고향은 경북 영일이다. 보통의 농촌이 그렇듯 1년 가야 ‘고기반찬’ 구경하기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스님은 어려서부터 그 귀한 고기반찬에 손도 대지 않았다. ‘입이 짧아’ 먹는 것도 없으니 부친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기름기 있는 것을 먹이기 위해 야단 치고 굶겨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고기만 보면 소 눈망울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입맛이 당기겠어요.”

그렇게 허약한 체력은 장래 희망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여군이나 간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건강도 약하고 비위도 좋지 못하니 가능성이 없어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손에 잡힌 책 한 권이 출가인연의 꽃망울을 터뜨려 주었다.

▲ 2002년 대만에서 열린 샤카디타 대회에 참석한 능인 스님.

▲출가발심의 직접적인 계기는.
“이차돈 성사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었다. 성사의 순교 이야기를 읽으며 불교를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즈음 부친이 돌아가셔서 세간의 삶에 무상을 느끼던 차에 이차돈 성사를 만났으니 아마도 부처님 제자 될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1963년 석림사에서 보각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8살, 하지만 출가 후에도 좀처럼 건강은 좋아지지 않았다. 공부는 엄두도 못 내고 하릴없이 세월이 흘렀지만 은사스님의 생각은 달랐다.

▲학업을 늦게 시작한 편이다.
“은사스님이 공부를 해야 한다며 명성여중·고에 보내셔서 남들보다 10여년 늦은 나이에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물론 나도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10 살 이상 차이가 나는 학생들과 공부하며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것이 문제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책장을 못 넘길 정도였다. 머리에 염증이 생겼음을 나중에 알게 됐다.”

▲대학진학도 은사스님의 영향인가.
“그렇다.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프고 어지럼이 계속되니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데 은사스님이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공부하다 의자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가서 해라. 공부하다 죽으면 얼마나 행복하냐’며 독려하셨다. 내 의지였다면 공부를 지속하지 못했을 것을 오직 은사스님 덕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은사스님은 왜 공부를 강조하셨나.
“교육열이 높으셨다. 허약한 체질에 일도 잘 못하는 상좌니 어떻게든 공부를 시켜야겠다 싶으셨던 것 같다. 공부 기회가 충분하지 못했던 옛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있으셨을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석림사에 어린이법회와 청소년법회를 개설했다. 부처님오신날이면 절에 찾아오는 인근 마을 아이들에게 합장하는 법과 절하는 법 등을 가르치는데 그날 하루뿐, 이날이 지나면 아이들의 발길은 뚝 끊겼다. 아이들에게 사찰예절이라도 가르쳐야겠다 싶어 시작한 어린이법회는 100여명이 모일 만큼 호응이 좋았다. 그 아이들이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중·고등학교 법회로 이어졌다. 그 사이 인연은 마치 예정돼 있다는 듯 사회복지활동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계기는 가톨릭계가 1976년 충북 음성에 문을 연 꽃동네였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신도 한 명이 어느 날 스님을 찾아와 눈물을 떨구었다. 슬하의 세 자녀 중 한 아이가 중증장애를 갖고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내가 죽은 후 아이를 보살펴줄만한 곳이 꽃동네뿐”이라며 “그곳에서 봉사라도 해야 내가 죽은 후에라도 아이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스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개종하시라고 했어요.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인데 종교의 이름이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그렇게 보살님을 보내고 나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불교계에 그런 시설이 있다면 이렇게 눈물 흘릴 일이 없을 텐데 싶었어요. 사회복지활동에 눈을 뜬 계기가 되었지요.”

원력을 세우니 길이 열렸다. 1982년 떠난 첫 인도성지순례는 그 길의 단초가 되었다. 생전 처음 떠난 성지순례길, 부처님 태어나신 현장을 직접 만나본다는 설렘을 안고 출발한 여정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성지의 현실은 참혹했다.

▲인도성지순례가 어떻게 사회복지학 공부의 계기가 되었나.
“아이들 모습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거친 맨발로 손을 내미는 아이들. 성지순례 내내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저 아이들의 곤궁한 처지에 비하면 부처님 은혜를 받고 있는 내 삶은 그동안 얼마나 안일했는가. 물 한 모금 편히 넘길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성지순례 중 방문한 대만 불광산사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불광산사의 시스템을 배우면 우리도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특히 외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배워야겠다 싶었다.”

1984년 불광산사로 향했다. 대만에 머무는 동안 한국사찰 홍법원을 통해 대만 문화대학 양백의 교수와 인연이 닿았다. 사회복지학에 뜻이 있음을 알게 된 양 교수의 추천으로 일본 정토종의 불교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세납 마흔이 넘은 나이에 사회복지학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부터 학부와 석, 박사과정을 모두 마치고 학위 취득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일본 불교사회복지의 특징은.
“일본은 유치원, 어린이집의 85% 이상을 사찰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불교계에서 교육 분야에 집중 투자한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1997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등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0여년 사이 한국 사회는 놀랄 정도로 변해있었다. 경제발전의 폭도 컸고 복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급격한 변화는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알 수 없는 위태로움을 안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사회는 요동쳤다. 복지사업에 대한 요구는 더욱 절실해졌다.

 
▲아동복지가 전공인데, 노인복지 분야에서 더 오래 활동했다.
“2000년에 일산노인종합복지관장직을 제안 받고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당시 일산노인종합복지관은 전국에서 제일 큰 규모였다.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 이사 수현 스님이 나를 관장으로 추천하셨는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일주일 동안 복지관을 오가며 고민을 했는데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좋은 여건에서 봉사할 기회가 생겼는데 이것을 거절한다면 또한 출가자의 도리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산노인종합복지관이 개관하던 2000년엔 중앙승가대 사회복지학과장 소임까지 맡게 되었다. 그 후로 10여년 넘게 스님의 일과는 중앙승가대학, 일산 복지관, 수락산 석림사를 오가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2009년에는 중앙승가대에 불교상담교육원의 전신인 불교상담대학도 개설했다. 스님들이 상담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불교계가 더욱 주력해야 할 복지 분야는 무엇인가.
“불교계의 노인복지활동은 지난 10여년간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타종교계에 비해 시설 규모와 운영 수준에서도 뒤지지 않는다. 활동하고 있는 스님들도 많다. 하지만 교육사업 분야는 아직 부족함이 많다. 취업이 어려워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음에도 출가 인원이 줄어드는 것은 교육에 대한 불교계의 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찰마다 보육시설을 설립해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하고 스님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대상이 된다면 출가자가 줄어들 이유가 없다. 요즘 세대가 물질적인 가치만 추구하고 경쟁하는 것은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불교계의 잘못도 있다. 그 결과가 부메랑이 돼 불교계에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상담전문가 양성을 강조한 이유는.
“스님들이 상담전문가가 돼야 한다. 물론 교육을 받지 않아도 상담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상담의 기법을 익힌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부처님은 최고의 상담사였다. 스님들이 상담전문가가 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불교사회복지의 의미는.
“부처님은 사회복지의 선구자였다. 전도 선언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부처님 스스로가 그런 삶을 보이셨다. 생로병사 문제의 해결부터 중생의 고통을 없애려는 모든 노력이 오늘날의 복지와 다를 바 없다.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먼저 줘야지 진리를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것이 불교복지의 기본이다.”

교수직과 복지관장 소임을 연이어 내려놓자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허전하지 않겠냐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새로운 기회, 출가자의 본분사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여긴다. 이는 스님에게 새로운 복지활동이기도 했다.

▲퇴임 후의 일상은 어떤가.
“사중에 봉사하고자 노력한다. 출가자의 삶은 신도의 시은에 의지한다. 신도들이 뒷받침을 해주니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수행이겠지만 앉아서 하는 수행만으로는 그 시은을 다 갚을 수 없다. 복지관을 운영하고 후학을 지도한 것도 모두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한 봉사였다. 지금까지 사중 밖 복지활동에 주력해 왔다면 이제는 사중의 활동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할 때다. 복지사업이나 활동도 시은을 갚는 길이고 사중에 봉사하는 것도 시은을 갚는 길이다.”

1998년부터 인도를 오가며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을 받은 능인 스님은 ‘티베트스님교육공덕회’라는 장학사업도 이끌고 있다. 인도에서 목격한 티베트스님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인연 닿는 이들로부터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아 전달하고 있다. 30여년 전 떠난 첫 인도성지순례에서 만났던 가난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떠올리며 시작한 활동이다.

▲불교복지학을 위한 조언을 한다면.
“불교복지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독립된 분야로 정립되는 것이 시급하다. 부처님말씀이 모두 복지와 연결돼 있지만 접근 방향 또한 중요하다. 특히 불교의 가르침을 오늘날 사회에 맞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해석과 응용에 대한 학계의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이와 함께 불교계의 복지활동 역사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전통적으로 복지활동의 중심이었다.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키웠고 의탁할 곳 없는 노인들을 품었다. 사찰에서는 명절이나 법회가 있을 때마다 음식을 마을의 가난한 이들과 나누었다. 이런 사찰의 일상들이 모두 비공식적인 복지활동이었다. 하지만 무주상보시라는 가르침과 상을 내지 않는다는 풍토로 인해 기록되고 정립되지 못했다. 이제는 사찰의 역할을 사회복지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교수가 되려고 시작한 공부가 아니었다. 복지관을 운영하기 위해 공부한 사회복지학도 아니었다. 그저 모두에게 이익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에서 출발한 길이었다. 그리고 이제 본분사,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스님은 전국에서 제일 큰 복지관을 운영할 때와 다름없는 마음으로 사중 소임에 임하고 있다. 평생을 걸어온 불교복지학과 사회복지활동이 출가의 길에서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듯 스님은 이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모두의 이익이 되는 길을 변함없이 걸어가고 있다. 거친 맨발로 손을 내밀었던 그 옛날 어린아이의 눈망울이 여전히 스님의 가슴에서 등불처럼 반짝이며 그 길을 밝혀주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원칙과 정의로 판단…시간이 갈수록 더욱 존경”

내가 본 능인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본각 스님=능인 스님은 중앙승가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비구니수행관장 소임을 맡아 수행관의 여러 전통을 세웠다. 매일 아침 학인들 모두가 동참하는 기도수행을 제도화시켰고 매년 대중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는 비구니 스스로가 승가의 위상을 세우고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가자는 취지였다. 이런 뜻은 평소의 소소한 생활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의복을 바르게 갖추고 계율에 맞지 않는 음식을 공양하지 않는 등 비구니의 위의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로 언제나 다른 스님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는 비구니승가에 대한 깊은 자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다. 올바른 출가 정신을 지키려는 스님의 마음가짐, 그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몸에 배인 하심 역시 출가자의 표상과도 같다. 하지만 스님의 성격은 매우 단순하다. 원칙과 정의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타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비구니의 정체성을 세우고 그 전통을 만들어가는 스님의 모습은 늘 존경심을 품게 만든다.

김학석 연천군노인복지관장=일산노인종합복지관 초대 과장으로 부임하신 스님을 처음 만난 후 지금까지 내 인생의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 현장 실무에 대해서는 일을 맡은 담당자를 끝까지 믿어주셨고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어떤 일이든 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단해 정의롭지 않은 부분과는 전혀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현장 실무경험 같은 기계적 능숙함과는 다른, 지혜에서 비롯되는 안목이었다. 또 만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그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과 조언을 주셨다. 10여년 간 함께 일을 하며 스님을 보필했지만 일선에서 물러나신 지금도 여전히 스님을 가까이서 모시고자 하는 것은 존경의 마음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건강한 체질이 아님에도 한 번도 남들에게 당신의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맑은 정신, 흐트러짐 없는 원칙이 있으시기에 육체의 어려움에 끄달리지 않으셨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셔서 수행과 전법의 본래 자리서 열심히 정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존경받는 스님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362호 / 2016년 10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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