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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구 전북불교대학 학장

아픔 직시할 수 있는 용기 있어야 집착 잘라낼 힘 생겨

▲ 이창구 학장은 “집착은 마음 안팎 사이에 생기는 괴리감에서 생긴다”며 “현실을 직시하면서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않으면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제바달다에게 가장 큰 아픔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사촌형님인 부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부처님만 계시지 않았다면 내가 임금이 됐을 텐데, 나는 머리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용감하지만 부처님이 옆에 계시니 늘 2등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의 존재 자체가 상처이고 아픔이고 콤플렉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자기가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지만, 출가한 부처님이 왕자였을 때보다 더 많은 칭송을 받자 같이 출가해버립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3번이나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 삼보에 귀의하는지 돌아봐야
자녀 합격 위해 부처님 믿는다면
위신력만 믿고 있는지 반성해야
부처님 어떤 삶 살았나 고민부터

아들 잃고 실의에 빠진 여인이
부처님에 살려달라 간절히 애원
죽음 없는 집 없단 사실 깨닫고
슬픔 딛고 일어나 삼보에 귀의
‘금강경’ 핵심 집착·비움에 있어

현장 스님도 그랬습니다. 현장 스님의 번역을 신역이라고 하고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을 구역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관음보살은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이고 관자재보살은 현장 스님의 번역입니다. 중생은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이고 범부는 현장 스님의 번역입니다. 지금 우리는 관음보살과 중생이라는 단어를 관자재보살과 범부라는 단어보다 더 많이 사용합니다. 지옥, 극락도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입니다. 현장 스님은 구마라집 스님에게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이 구마라집 스님에 의해 번역됐지만 현장 스님이 다시 번역합니다. 하지만 역사가는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에 손을 들어줬습니다.

구마라집 스님은 ‘금강경’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지혜로 우리의 번뇌를 잘라버려 열반으로 건너가게 하는 경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반야바라밀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금강경’은 집착과 비움의 대결입니다.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상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지혜로 열반의 언덕을 지나간다는 것도, 지혜로 열반을 넘어간다는 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게 ‘금강경’의 대의입니다. 보시 역시 내가 누군가에 보시했다고 우쭐해하는 순간 보시가 아닙니다. 보시하더라도 공의 마음, 텅 빈 마음으로 하라는 게 부처님 말씀입니다.

‘금강경’은 서분, 정종분, 유통분으로 구성됩니다. 모든 경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서분은 서론, 정종분은 본론, 유통분은 결론입니다. 부처님은 ‘금강경’을 수지독송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유통시키면 복이 헤아릴 수 없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일 좋아하셨던 게 법입니다. 우리는 법을 믿습니다. 항상 모든 법회의식에서 가장 먼저 삼귀의를 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합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을 믿으니까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게 무엇일까요. 자녀들의 합격을 위해 믿는다면 부처님을 부정입학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정도가 지나칩니다.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위신력만 믿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부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삶을 사셨고, 이런 멋진 가르침을 주셨구나.’ 이것을 알아야 그분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자님들은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과 말씀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은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고 싶어 오셨기에 성스러운 공간, 믿음의 공간입니다. 최고의 보시는 법보시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것을 하나씩 주위에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에게 “마음엔 평화, 입가엔 미소”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이처럼 주변을 환하게 비춰주세요. 문자로도 좋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는 게 점심입니다. “점심 먹었어”라고 하지 말고 “마음에 점 맛있게 찍었어”라고 문자로 보내시길 바랍니다.

중국에 유명한 ‘금강경’ 박사스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금강경’을 많은 분들에게 설하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스님이 부처님 가르침은 팔만대장경으로 전해진 게 아닌 마음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 들자 가섭존자 홀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처럼 경전으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이심전심’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강경’ 박사스님이 성질이 안 나겠습니까. 경전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 스님을 씩씩 거리며 찾아갑니다. 그러다 한 노인을 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배가 고팠던 박사스님은 떡을 파는 그 노인에게 “떡을 사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노인은 “내가 내는 문제를 맞추면 떡을 그냥 주겠지만 맞추지 못하면 주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금강경’에는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나와 있는데, 스님은 과연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습니까?”

박사스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책에는 나와 있지 않고, 다만 마음을 깨쳐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떡을 사먹지 못하고 쫄쫄 굶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점을 찍다”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금강경’을 배우면서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부처님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는다고 말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공부하지 않고 부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맹신입니다. 가장 경계해야하는 게 맹신입니다.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부처님께서 어떻게 사셨고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이 이유에서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금강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금강경’이 참 희한한 경전이라고 합니다. ‘금강경’의 핵심이 공인데 공이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이라는 글자는 하나도 안 나오지만 내용은 공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금강경’은 공과 상의 대결입니다. 이 두 글자만 기억하면 됩니다. 공과 상. 공은 비움, 상은 집착.

문제의 원인은 집착입니다. 어느 날, 아들을 잃은 여인이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아들만 살려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했습니다. 여인에게 아들은 정말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여인을 무시하고 멸시했던 사람들 태도가 아들을 얻고 나자 달라졌습니다. 사는 날이 기쁨 그 자체였던 여인이, 자신을 돋보이게 했던 아들이 죽자 그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결국 부처님을 찾아가 간절히 살려달라는 청까지 하게 된 겁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이가 하나도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 한 톨만 가져오세요. 그러면 제가 그대의 아이를 살려주겠습니다.”

희망이 생긴 여인은 집집마다 죽은 이가 없는지 묻고 다녔습니다. 죽은 이 하나도 없는 집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비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여인은 뒤늦게 깨닫습니다. 부처님은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여인을 이끌었습니다. 집착의 문제를 여인 스스로가 해결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물론 큰 아픔에 공감하는 위로가 더 나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로는 시간이 지나면 바래지고, 현실을 타개할 힘이 되지 못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이 여인에게 위로보단 다른 방편을 썼습니다.

현장 스님은 번뇌가 금강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단단하고 부서지기 어렵다는 비유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않으면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정말 힘듭니다. 죽음이 자신의 아들만 피해갈 수 없고,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어야 비로소 번뇌를 깨부술 힘을 얻습니다. 아들 잃고 슬퍼했던 여인이 부처님에게 귀의해 아라한과를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여기 분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답해도 10대, 없다고 답해도 10대를 맞을 것입니다. 제 질문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분필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 제 질문 때문에 여러분 마음은 모두 분필로 쏠립니다. 마음이 분필에 머무는 동안 정답이 나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선문답 같은 질문이지요. 사실 관계 유무를 떠나 집착에 대해 말씀드릴 때, 여러분 중 한 분이 ‘오늘 바람이 참 시원하네요’라고 답했다면 집착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집착은 마음 안팎 사이에 생기는 괴리감에서 생깁니다. 오늘 열심히 일해서 받은 일당 10만원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요. 대부분 불교대학서 공부한 만큼 ‘집착하지 말아야지, 집착하지 말아야지, 인연이 다 됐나보다’ 이렇게 자꾸 반복합니다. 돌이켜보면 이것도 집착이지요. 사실 마음 안에는 10만원의 잔상이 생생히 남아 있는데 마음 밖, 즉 10만원을 쥐고 있던 손이 텅 비었기 때문에 생긴 집착입니다. 이 간극과 괴리가 집착을 만들고, 집착은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아들 잃은 여인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착과 고통이 생기는 끊기 어려운 인과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가르침을 주신 겁니다. 진짜 괴로움은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 보다 죽은 아들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음에 있다는 점을 깨우치셨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분필과 아들의 죽음 등 갖가지 경계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거실 쇼파에 앉아 드라마에 빠져 딸이 들어와도 못 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마음이 한 대상에 들러붙어 집착에 이르면 좁은 시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게 우리들 마음의 시스템입니다.

한 번 더 묻겠습니다. 분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음에 평화, 입가엔 미소 가득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정리=신용훈 전북주재기자 boori13@hanmail.net
 
이 강의는 이창구 학장이 9월21일 개강한 전북불교대학 보현학림 과정에서 ‘금강경 다시 읽기’를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1362호 / 2016년 10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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