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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불연(佛緣)의 땅 스와트

1400개 가람에서 1만8000명의 승려가 수행했던 불국토

▲ 스와트의 중심도시 밍고라에서 망글라(인욕선인이 칼리 왕에게 사지를 절단당한 몽게리 성)로 가는 도중에 만난 스와트 강.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한때 이 강을 끼고 1400여 가람에 1만8000의 승도가 수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 연재 프롤로그에서 마가다를 중심으로 한 갠지스 강 유역이 불타 현생의 무대였다면 간다라는 본생의 무대였다고 하였지만, 스와트 강을 끼고 있는 웃디야나(烏仗那國)는 전설에 따르면 본생은 물론이고 현생의 부처님과도, 부처님의 가계와도 관련된 불연(佛緣) 국토이다. 부처님은 이 나라의 중생들을 위하여 중국(인도의 중국(中國), 즉 중천축의 마가다)에서 이곳 변방까지 날아와 아파랄라(Apalāla) 용왕을 조복시켰다.

아름다운 집·정원이라는 뜻으로
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려지던 곳
정부군이 2009년 탈레반서 탈환
인근에 신도시인 밍고라 들어서

스와트의 고원지대에 올라서자
돔 형태 싱게르다르 탑 나타나
부처님이 아파랄라 용왕 조복 후
웃타라세나 왕에게 사리를 받아
공양하라고 권해서 세워졌던 탑

이 용왕은 비바람이나 한발, 우박, 서리를 방치하여 식물의 싹은 물론이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아파랄라’ 즉 ‘무도간(無稻竿, 혹은 무묘(無苗))’이나 ‘무류(無留)’라고 이름하게 된 것으로, 불전(佛典)에서는 마가다의 라자그라하(왕사성)의 용왕으로 전하기도 하지만, ‘불소행찬’에서는 간다라의 용왕으로,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나 ‘대지도론’에서는 북천축의 용왕으로 전하며, ‘대당서역기’에서는 웃디야나 몽게리 성 동북쪽 스와트 강의 발원지가 바로 아파랄라 용왕이 사는 용천(龍泉)임을 밝히고 있다.(이처럼 아파랄라 용왕의 처소가 북쪽으로 옮겨가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전도지역의 확대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유부비나야약사’에서는 부처님께서 허공을 날아 북천축국으로 가는 도중(혹은 중천축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카슈미르에 이르렀을 때 당신이 반열반에 들고 100년 후 어떤 비구제자가 독룡을 조복시키고 온 나라에 정법을 유포할 것이라 예언하고서 이곳이 사마타와 비파사나를 닦는데 최적지임을 강조하였는데, ‘서역기’에서도 “옛날 불세존께서 웃디야나에서 악신(惡神)을 조복시키고 중국(중인도)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허공을 날아 카슈미르에 왔을 때 아난에게 내가 입멸한 뒤 말전티카 아라한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워 인민을 편안케 하고 불법을 널리 유통시킬 것이라 예언하였다”고 전하고 있다.(제2회 참조) 이로 본다면 적어도 ‘유부비나야약사’가 편찬될 당시 부처님께서 북천축의 웃디야나을 방문하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 1. 스와트 강을 끼고 있는 웃디야나는 부처님의 본생은 물론이고 현생의 부처님과도, 부처님의 가계와도 관련된 불연(佛緣) 국토이다. 전설에 따르면 웃디야나 왕은 코살라가 카필라를 멸망시켰을 때 도망쳐 온 석가족으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들기 직전 이곳에 오셔서 아파랄라 용왕을 조복시키고(2∼3세기, 페샤와르 박물관), 2. 불족을 남기셨다.(스와트 박물관) 이 불족은 스와트 강 상류 티라트(Tirat)라는 마을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가락 위쪽에 ‘석가모니불의 족적’이라는 카로스티 문자의 명문이 있다.

정말로 여래 세존께서 이곳 변방까지 오셨던가? 당시도 이런 의문이 있었던 모양인지 옛날 이곳의 불교도들은 그 징표로서 불족적(佛足迹)까지 남기고 있다. 현장법사는 아파랄라 용천 근처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으며, 이전에 왔던 송운도 법현도 역시 그러하였다. 오늘날 밍고라 스와트 박물관에서도 불족을 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다 같이 불족은 보는 이의 공덕(혹은 마음)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보인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부처님의 족적이 워낙 위대하였기 때문에 그같이 말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부처님께서는 어떤 인연에서 서북인도 최 변경인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던가?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웃디야나국의 왕통은 석가족이었다. 법현이 웃디야나에서는 중국인 중천축의 말을 쓰고 있고 속인들의 음식과 의복 역시 중국의 그것과 동일하였다고 전한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옛날 코살라의 비루다카(Virūḍhaka) 왕이 카필라의 석가족(釋迦族)을 정벌하였을 때 그 중 한 석종(釋種)이 도망쳐 이리저리 헤매다 기러기를 타고 웃디야나 몽게리 성 북쪽 람발로 산 정상의 용지(龍池)까지 날아오게 되었는데, 용녀와 용왕의 도움으로 이 나라의 왕이 되었다. 부처님께서도 이런 인연을 아시고 아파랄라 용왕을 조복시키고 돌아가는 길에 이 나라 도성에 들러 왕(석종의 아들)의 눈먼 모친께 설법하여 그녀의 눈을 뜨게 하고, 이제 곧 쿠시나가르에서 여래가 반열반에 들 것이니 빨리 가서 사리를 분배받아 공양하라고 권유하였다는 것이다.

불연(佛緣) 국토도 이런 불연국토는 없다. 부처님은 당신이 그들과 일가(一家)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현장이 이곳을 방문할 당시 비록 쇠락하였을지라도 스와트 강을 끼고 1400여 가람이 있었고, 승도의 수 또한 한때는 1만 8000명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제 간다라를 떠나 불연의 땅 스와트로 간다. 말대로라면 스와트는 아름다운 집, 아름다운 정원(suvāstu, 현장 당시 명칭은 소파벌솔도(蘇婆伐窣堵))이지만, 그래서 가이드북에서는 여전히 ‘동양의 스위스’로 불린다고 하였지만, 오늘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스와트는 상부(upper)와 하부(lower)로 나눠지는데, 하부의 중심도시는 사이두 샤리프(성스러운 샤리프)이며, 20세기 초 인근에 밍고라라는 이름의 신도시가 들어섰다. 이 지역은 2007년 탈레반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2009년 치열한 시가전 끝에 정부군이 탈환한 곳으로, 여전히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외국인에게 금단의 땅일 것이다. 사실 페샤와르에서도, 마르단에서도 한국 사람은 고사하고 외국인을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밍고라, 오늘의 우리는 그곳에서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라는 한 소녀를 떠올린다. 그녀는 만 11세이던 2009년부터 영국 BBC방송 사이트 우르드어 블로그를 통해 당시 탈레반 점령지에서의 억압과 여성교육 금지를 비판하다가 2012년 하교 도중 탈레반 무장대원으로부터 머리에 총격을 받는 테러를 당하였지만 기적적으로 소생하였고, 그 후로도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여 201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역대 최연소였다. 물론 그녀는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 아마도 당분간은 고향 밍고라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페샤와르에서 밍고라까지 불과 150여 ㎞에 불과하지만, 다른 세계로 상상되었다. 그곳은 해발 1362m의 말라칸드 고개를 넘어야 할뿐더러, 불상의 형태도 간다라와는 확연히 달랐다.

▲ 이 나라 웃타라세나(上軍) 왕은 부처님의 권유에 따라 불사리를 분배받아 불탑을 세우기도 하였다.(바리코트 인근 신게르다르 스투파)

오전 7시, 어제 같은 시간에 탔던 대우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던 푸루샤푸르(페샤와르의 옛 이름)를 떠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곳에서 5일을 묵었다. 업무를 보듯 한 시간의 여유도 없이, 하루 세 끼 무엇을 먹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닷새를 보냈다. 시네마로드에 있는 호텔에 묵었음에도 극장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이런 저런 제약으로 가보고 싶은 곳, 가 보았어야 할 곳을 가보지 못하였다. 카이버 패스도 그 중의 한 곳이다. 그곳 정상 인근 스폴라(Sphola)에도 불탑이 있다. 그 불탑은 어떤 인연에서 그곳에 세워졌을까? 페샤와르에서 스폴라까지는 25㎞, 거기서 아프간 국경까지는 30㎞, 평상시 같으면 한 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다.

버스는 다시 카불 강을 건너고 마르단 초입에서 검문 때문에 잠시 멈추었다. 군인이 여권을 요구했지만 별다른 체크는 없었다. 그 새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르단을 거쳐 탁티 바히를 지나고 있었다. 남자 차장이 나눠준 음료와 간식거리를 마시고 먹는 둥 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잠이 깨었을 때는 무장군인이 승차하여 검문하고 있었다. 아이덴티티(신분증)를 요구하였다. 여권을 내밀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내리라고 한다. 단순히 다른 곳에서처럼 사진을 찍고 신원을 기입하는 외국인의 통행절차로 알았다. 사무실 앞에는 이미 아프간 난민으로 보이는 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군인은 우리를 그들과는 분리하여 바로 사무실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기다리라고 하였다. 버스 차장이 따라와 군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역시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버스로 돌아갔다. 필경 NOC(여행허가증) 때문일 것이다.

페샤와르에서 방문하였던 좀 이상한 곳이 상기되었다. 호텔 지배인에게 NOC가 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인터넷의 어떤 여행자 블로그에서 호텔의 소개로 그것을 오전나절 손에 넣었다는 무용담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예(例)의 ‘노 프로블럼’, 걱정 말란다. 자기가 책임지고 받아주겠단다. 경비는? 없단다.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기에 다시 독촉하니 자기는 지금 바빠 못가고, 오피스에 전화를 해 놓을 테니 직접 가서 발급받으라며 릭샤까지 잡아주었다. 이른바 ‘오피스’라는 그곳은 골목 안 지하에 있었다. 문이 잠겨있었고 무장한 민간인이 지키고 있었다. 1시 이후에 오란다. 좀 미심쩍어 동네 사람들에게 여기가 뭣 하는 곳인지 물었지만, 역시 오피스라고만 말한다. NOC? 하니 OK란다.

망고라시(주스)에 짜파티로 요기하고 다시 가 보았다. 어째 좀 으스스 하였다. 지하로 내려가자 한쪽 방에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다른 방에서는 10여 대의 컴퓨터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뭔가를 상담하고 있는 듯하였다. 안내하는 이나 상담하는 이 할 것 없이 모두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조용하였고, 이러한 정적이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하였다. 그렇지만 들어오자마자 돌아나가는 것도 이상한듯하여 입구 안내인에게 여기 온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여권을 챙겨가며 기다리란다. 지하의 음습함과 침묵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얼마 후 어떤 이가 우리를 부르더니 외국인은 증명서가 필요 없다며 여권을 내어준다. 파키스탄 비자가 있는 한 어디든 여행이 가능하단다. 무장은 하였지만, 매우 친절하였다. 아마 짐작컨대 아프간 난민들에게 NOC를 발급해주는 사적인 단체 같았다. 두말 않고 돌아 나왔다. 그곳을 방문한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경솔한 짓이었다.

검문소 사무실에서 기다린 지 10여 분 지났을까, 우리를 검문한 이보다 상급자인 듯한, T셔츠 차림의 검은 구레나룻의 군인이 들어와 문제의 NOC를 요구하였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우리는 파키스탄 비자를 갖고 왔고, 라호르를 통해 입국한 이래 어제 페샤와르까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연신 당신들은 우리의 손님으로 우리가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NOC가 절대 필요하다고 하였다. 매우 친절하였고 진지한 태도였다. 그 틈을 노렸다. 우리는 파키스탄에 들어온 지 이미 보름이 지났고, 일정상 내일 하루 스와트 박물관과 밍고라 시내의 불교유적지만 둘러보고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가 바로 출국할 예정이기 때문에 밍고라를 벗어날 시간적 여유도 없다고 둘러댔다.

그는 어디론가 오랫 동안 전화를 하고, 우리만을 남겨둔 채 다시 밖으로 나갔다. 10여 분 뒤 돌아온 그는 우리들 사진을 찍고 여권을 스캔하고서 입경(入境)을 허락해주었다. 근심어린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보던 버스차장이 NOC 없이는 스와트에 들어갈 수 없다고 비로소 말해준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없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30분 가까이 우리를 기다려준 젊은 차장과 빈 라덴보다 긴 구레나룻의 운전기사가 고마웠다. 보채지 않은 승객들한테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검문소를 나온 버스는 바로 말라칸드 고개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고개 역시 매우 유서 깊은 고개다. 힌두쿠시를 넘은 알렉산더의 3만 보병도 바리코트에서 이 길을 넘어 간다라로

내려왔고, 거의 모든 순례승들이 이 길을 넘었다. 그런데 버스는 고개를 오를 때는 굽이굽이 기진맥진하더니 고갯마루에 올라섰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지나쳤다. 이제 스와트의 고원지대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밍고라 역시 해발 900m의 고원도시이다.

바리코트를 지나자 도로공사로 인해 차량들이 정체되어 길게 줄지어 섰다. 그러는 사이 오른쪽 산 밑에 돔 형태 탑이 보였다. 싱게르다르 스투파이다. 불타가 아파랄라 용왕을 조복하고 같은 종족인 웃타라세나 왕(Uttarasena, 상군왕(上軍王): 코살라 침략 당시 카필라에서 도망쳐온 석종(釋種)의 아들)을 위해 사리를 분배받아 공양하라고 권유하여 세운 바로 그 스투파이다. 왕이 쿠시나가라에 갔을 때 그곳 왕들이 변방의 왕이라 가벼이 여겨 사리를 나누려 하지 않았지만, 천인이 부처님의 뜻을 거듭 밝힘에 비로소 공평하게 분배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장은 그의 여행기에서 이 이야기를 두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다. 그만큼 감명 받았다는 말일 것이다. 저 탑은 내일 저 마을로 직접 가서 둘러볼 작정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63호 / 2016년 10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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