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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

기자명 법상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6.10.24 12:03
  • 수정 2016.10.24 12:04
  • 댓글 0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권력, 지위, 진급 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곤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몸을 예쁘게 하기 위해 성형수술도 하고, 예쁜 옷으로 치장하거나, 명품으로 자신을 꾸미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무장함으로써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한다.

돈·권력 등 위해 살지만
사라지면 허망한 것일뿐
유한한 것에 삶 걸지말고
불법 진리 믿고 수행해야

이 모든 것들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것들은 한 번 오면 반드시 떠나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것이라는 점이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생사법일 뿐이다.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대상이 왔다가 갈 수밖에 없는 허망한 것이라면 과연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 필요가 있을까?

언젠가 퇴직하신 분들과 대화를 나누었더니 젊은 날 목메고 다니던 직장이나 성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 말씀들이 많으셨다. 한 생을 그것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왔고, 그래서 결국 얻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머지않아 그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이처럼 한 번 왔다가 갈 수밖에 없는 허망한 것들일 뿐이니, 그 유한한 것에 목숨을 걸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 한 생에 정말 가치 있는, 내 삶을 걸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있을까? 생사법이 아닌 것, 불생불멸하고 허망하지 않은 것이 과연 있을까?

그렇다. 10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인생에 대장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을 걸고 확인해 봐야만 할 삶의 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불교에서 흔히 방편으로 불성, 자성, 주인공, 일심, 한마음, 본래면목, 해탈, 열반이라고 불러왔던 것, 바로 진리요 법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말 그대로 방편으로 이름 지어 그렇게 부를 뿐이지만 그럴게 불릴만한 특정한 어떤 대상은 아니다. 특정한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인식의 대상도 아니다. 인식의 대상은 있거나 없어야 하는데,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아, 공, 무상, 무주상 등이라고 할 때는 이것의 없는 것 같은 특성을 설명하는 것이고, 참나, 불성, 본래면목이라고 할 때는 이것의 없는 것 같은 특성을 방편으로 설명하는 것일 뿐이지만, 사실 이것은 있고 없음을 초월하는 자리다.

이 자리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는 어떤 자리도 아니며, 이 순간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특정한 시간적인 어떤 시점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름붙이는 순간 사실은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름 지을 수 없고, 모양 지을 수 없으며, 더욱이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고 죽는 것이 아니며,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있었고, 이 육신이 죽고 사라진 다음에도 여전히 있다. 핵폭탄이 수백, 수천 개가 떨어지고, 우주가 전부 폭발하여 멸망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전혀 움직임도 없고 상처입지 않는다.

이것은 그 모든 것의 바탕이며 배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 이것 아님이 없다. 그렇지만 보는 것이 이것이라거나, 듣는 것이 이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렇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다’라고 하면 벌써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해진 무언가가 아니기에 무유정법이라고 한다.

▲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모든 종교나 사상의 최고 극에 이르면 어디에서든 이 자리를 설하게 된다. 이 자리야말로 우리 모두의 본향이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귀향, 귀의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에서처럼 ‘이것’을 이끌어주고, 확인시켜주고, 확고해질 수 있도록 보임까지 시켜주는 온전한 커리큘럼과 오랜 텍스트를 가진 전통은 없어 보인다. 우리가 불법을 믿고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 자리, 이것을 확인하고자 함일 뿐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전부 방편일 뿐이고, 가벼운 잠깐의 위안이고 힐링일 뿐이며, 진리의 길 위에서 잠시 엿볼 수 있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이 영원한 불이의 자리, 불생불멸의 자리,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생을 걸고 나아가야 할 바로 그 곳이 아닐까. 불법 안에서 어중간한 구경거리만 찾지 말고, 이 길로 곧장 들어가 보라.


[1364호 / 2016년 10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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