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칠곡 정암사 주지 대현 스님
17. 칠곡 정암사 주지 대현 스님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6.10.2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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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현대 접목한 승가교육 변화로 불교 미래 모색해야”

▲ 대현 스님은 “강단에 서지 않았다면 불교라는 커다란 숲 속 어디 즈음에 내가 서 있는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며 “강사로서 경을 깊이 볼 수 있었던 시간을 가진 것이야 말로 출가해서 가장 잘 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도량이 들썩이던 전날의 흥겨움은 처마 밑을 장엄한 오색천에 아직도 조랑조랑 매달려 있다.  칠곡 정암사 사찰음식축제는 올해로 12번째를 맞았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도량이 꽉 차도록 사람들이 모였다. 간간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정암사를 찾은 700여명의 신도들에게 50여 가지 사찰음식을 정성껏 공양했다. 산사음악회, 서예·민화전과 함께 장학금 전달식도 열렸다.

‘금강경’ 독경소리에 매료돼
20살 출가…호된 행자 경험
“전생의 업장 녹이는 과정”

20대 중반에 시작한 공부에
먹고 자는 시간 줄이며 매진

포교당 운영하며 법회 성황
‘돈 세는 주지될까’ 경계하며
공부기회 찾아 동학사 강사로
원전 강의에 대학 교육 결합

정암사 창건 후 강의 주력
사찰음식축제·장학사업 등
지역복지·인재불사에 주력


주지 정과대현(淨果大玄) 스님이 지난 2004년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을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동학사승가대학 강사 소임을 마치고 나온 스님 수중에 변변한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고작해야 10가구 남짓한 마을, 비어있는 작은 농가 1채를 구입해 ‘정암사’를 창건했다.

“동학사승가대학서 꼬박 7년 강의를 한 후였어요. 이곳저곳서 강의를 부탁하니 거절할 수 있나요. 서울, 대구, 부산 오가기 편한 곳에 자리를 잡았죠. 부처님께 빚이 있어 그렀겠지요.”

경북 의성서 육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학교라고는 중학교가 고작이었다. 부농은 아니었지만 일꾼이 둘이나 있었으니 먹고 사는 것이 걱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막내딸을 중학교까지 공부시켰으면 ‘충분하다’ 여기는 시절이었다.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독경 소리 때문이다. 길을 지나다 흘러나오는 김성공 스님의 ‘금강경’ 독경 테이프였다. 내용도 모르면서 그 소리에 매료돼 책을 구하러갔다. 서점 주인이 ‘아가씨는 그 책 봐도 모르니 불교입문이나 보라’고 권유했다.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살생하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등등 십중계 대목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사회에서는 거짓말하는 일이 흔한데 이렇게 진실된 세상이 있다니? 보배구슬을 만난 기분이었다. 20살에 출가를 결심했다.”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불자 집안도 아니었다. 불교와 특별한 인연도 없었던 터다. 다만 17살 되던 해 ‘3년 후에는 내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출가를 염두에 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딱 3년 뒤, 출가인연이 그렇게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스님은 이것이 전생의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한 보살님의 소개로 내원사서 행자생활이 시작됐다. 때마침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있어 연등을 만들었다. 타고난 손놀림이 빠른 터라 어른들로부터 ‘잘한다’고 칭찬 들었다. 칭찬을 들으니 더 열심히 하겠다며 꼼짝 않고 앉아 연등만 만든 것이 그만 무릎 관절염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신심이 부족한가 싶어 아침저녁으로 1000배씩 절을 했지만 좋아지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치료를 하고 더욱 굳건해진 재출가의 원력으로 서울 도봉산 금강암으로 향했다.

▲은사 호관 스님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나.
“내원사에서 알았던 선객 혜눌 스님이 당시 서울 도봉산 금강암에 계셨다. 혜눌 스님 상좌가 되겠다고 찾아갔는데 당신은 상좌 둘 처지가 못 된다며 금강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라고 권하셨다. 두말없이 금강암 호관 스님 상좌가 되었다.”

▲행자생활은 어땠나.
“일이라고는 양말 한 번 빨아본 적 없으니 야단맞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쩌다 거짓말이라도 하면 어찌나 잘 알아내시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대꾸나 질문도 마음의 분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은사스님은 속가의 업을 벗을 수 있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 어리석던 행자가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싶다. 감사할 뿐이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행동이 민첩한 상좌를 은사스님도 결국엔 기특히 여겼다.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권한 것도 은사스님이었다. 늦게 시작한 공부에 걸림돌도 많았지만 어렵기에 더 절실했고, 하루하루가 재미있었다. 남들 3년 하는 공부를 1년에 해치우려니 시간이 가장 절실했다. 은사스님은 시내에 있는 학원 옆에 자취방을 구해주었다. 스님이 절 밖에서 사는 것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던 시절이었지만 은사스님은 주변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손수 간식을 갖다 주기도 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기만 하면 수학문제를 풀고 암기과목은 수첩에 적어 목에 걸고 다니면서 외웠다. 하지만 주말에는 금강암 일을 도와야 되니 그 또한 공부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늦게 시작한 공부, 힘들지 않았나.
“몸이 힘든 것은 둘째였다. 시간이 천금 같았다. 내가 이 나이에 드디어 학문을 만났는데 이 천금 같은 시간을 하루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자고 먹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덕분에 성적은 학원 내에서 1, 2등을 다퉜다. 단박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내친김에 대학입시를 준비해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은 신세계였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쌓아놓고 독파했다. 책을 보면 볼수록 새로운 맛이 우러났다. 사회 변화와 불교의 역할도 눈에 보였다. 특히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 절실히 느껴졌다. 사회복지 선진국이었던 일본 유학에 마음이 끌렸지만 당시 형편으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 대현(사진 왼쪽) 스님과 은사 호관(가운데) 스님이 함께한 2011년 인도 성지순례. 오른쪽 진응 스님은 사형 대우 스님의 상좌다.

▲졸업 후 선방으로 향한 이유는.
“선학을 공부했지만 그것은 책 속의 글이었다. 선학이라는 것이 조사들의 가르침인데 그것을 글공부만으로 배울 수는 없었다. 실참을 해야겠다 싶어 졸업 후 곧장 선방으로 갔다.”

하지만 스님에게는 꼭 해야 할 공부가 있었다. 노령인구가 급증하는데 불교계의 노인복지는 미흡했다. 복지에 대한 관심을 더 이상 미루었다가는 불교가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라 생각한 스님은 동국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 석사학위와 사회복지사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공부를 할수록 불교가 해야 할 일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복지뿐 아니라 포교며 교육,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었다. 때마침 부산서 포교당을 무상보시 할 테니 맡아 달라는 연락이 왔다. 부산시내에 자리하고 있던 포교당 정암선원 주지 소임을 맡은 스님은 불교대학을 비롯해 어린이법회, 장애인법회 등을 개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0평 남짓한 포교당에는 발 딛을 틈 없을 만큼 사람들이 모였다. 일요일마다 열리는 어린이법회에도 150여명이 몰렸다.

▲포교당을 활성화시킨 비결은.
“행자시절 큰스님 법문을 들으면 대부분 한문 게송 중심이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청중 근기에 따른 법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래서 포교당을 시작하며 계층에 따른 법회를 만들고 그에 맞는 법문을 한 것이 적중했다. 불교대학 강의를 준비하며 나 또한 경전을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몇 해 지나지 않아 동학사 강사 소임을 맡았다.
“어느 날 포교당에 앉아 보시금을 세고 있었다. 100만원짜리 돈다발이 여러 개 만들어졌다. 불현듯 ‘내가 돈 세려고 여기 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는 큰 절에 앉아 돈이나 세는 주지가 되겠구나 싶었다. 큰절 살림꾼이 아닌, 제대로 된 출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전을 더 깊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사 주지 겸 승가대학으로 부임한 일연 스님으로부터 강사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서둘러 후임자를 구해 포교당을 맡기고 동학사로 향했다. 짐을 푼 지 2달 만에 사집반 수업이 시작됐다.

▲포교의 성과도 적지 않았다.
“물론 포교당 운영은 의미 있는 불사였다. 계속 포교에 전념했다면 결실을 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 만나는 귀한 기회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학인시절 강원서 불교라는 거목의 잎을 보았고 동국대에서 공부하며 불교의 숲을 보았다. 하지만 그 숲속 어디에 내가 위치하고 있으며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는 몰랐다. 승가대학 강단에서 비로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학인들을 지도하기 위해 내가 먼저, 더 깊이 연구해야 했고 그것이 오롯이 내 공부가 되었다. 부족한 나를 강사로 불러준 일연 스님에게 지금도 감사할 뿐이다.”

스님의 강의 방식은 새로웠다. 한문원전 강의에 대학교육 방식을 결합시켰다.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수행과 전법 활동을 하며 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해야 할 학인들에게는 옛것을 현대 사회에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스님은 옛것과 새것을 연결해주는 고리를 자청했다. ‘서장’을 강의하며 중국선종사를 접목했다. ‘절요’에는 조계종사를, ‘선요’에 한국불교사를 함께 다뤘다. 학생들에게 과제를 제시하고 발표하게 했다.

▲학인들의 반응은.
“발표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학인들은 고생이 많았다. 각자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다. 그런 수업방식은 대중 앞에서 말하는 법에 대한 연습이었다. 또 남는 시간에는 출가자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교양과 상식을 지도했다. 한 번의 수업이라도 학인들에게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꼬박 7년의 시간을 강사로 보낸 스님은 2002년 일연 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았다. 하지만 강단을 계속 지키기에는 건강이 허락하질 않았다.

“승가대학 강사로 있는 동안 건강이  안 좋았어요. 서서 강의하기가 힘들 정도였죠. 약도 소용없고 의지할 곳이라고는 부처님뿐이었어요. 이생의 인연이 다했다면 하는 수 없지만 만약 저를 살려주시려면 언변을 함께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렇게 해주시면 어디든 마다 않고 찾아가 부처님 말씀을 전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동학사승가대학을 떠난 후 정암사에 터를 잡은 이유다. 사방에서 강의 요청이 계속됐고 그 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요즘도 하루가 멀다고 서울, 대구, 부산을 오가며 강의한다. ‘명강의’라는 입소문 덕에 오히려 강의가 자꾸 늘어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 전하겠다는 약속만큼은 꼭 지켜야하니 당분간은 이렇게 바쁘게 지내야 될 듯하다.

▲ 사찰음식축제에 맞춰 지역 아동들에 장학금을 전달한다. 대현 스님은 어린이포교는 불교의 미래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불사라고 강조한다.

▲오늘날 승가대학의 역할은.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승가대학은 그 변화의 속도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졸업 후 출가자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교육에 반영돼야 한다. 옛 강원의 교육방식과 학풍은 나름의 깊은 맛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보배를 갖고 있으면 뭐하나. 이어 받을 사람이 없다. 불교의 수승한 전통을 지키고자 하지만 출가자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옛 방식만을 고집하다가는 더 큰 것, 근본적인 토대를 잃어버릴 수 있다. 변화는 불가피하다. 좋은 교육을 하려고 연구하는 사이에 절 지키는 사람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제2의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전국비구니회 교육부장으로서의 구상이 궁금하다.
“전국비구니회 교육부는 올해 ‘템플스테이 지도자 양성과정’ 교육을 진행했다. 반응이 좋았다. 내년엔 ‘wellbeing. well dying. wellaging (사람답게 사는 것, 사람답게 죽는 것, 사람답게 늙는 것)’을 주제로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불교는 생로병사를 가장 심각한 문제로 다루는 종교다. 불교가 오래 전부터 제시해 온 대안을 새로운 용어로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또 스님들이 알아야할 호스피스에 대해서도 교육할 예정이다. 전국비구니회는 앞으로도 비구니스님들이 포교와 전법, 불사와 교육의 현장서 가장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주제들을 갖고 꾸준히 교육 자리를 만들 것이다.”

또 하나 남은 과제는 복지다. “일본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복지기반을 갖추겠다”는 원력을 실천하기 위해 스님은 정암사에 ‘정암노인복지센터’를 설치했다. 장기요양보호사가 필요한 지역 어르신들이 보다 쉽게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마련한 거점 시설이다. 비록 작고 소박한 출발이지만 이런 노력들이 모여 정암사는 지역사회 복지,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뿌리내리고 있다. 사찰음식축제, 독거노인 반찬봉사 등과 더불어 지역 아이들에 대한 장학금 전달을 잊지 않는 것도 스님에게는 더 없이 중요한 불사다. 그 아이들 중 누군가는 법사가 되고 포교사가 되고 또 스님이 될 것이다. 승가교육 못지않게 재가불자에 대한 교육이 불교의 미래를 담보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몸은 비록 강단서 잠시 멀어져 있지만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를 향한 스님의 강의는 오늘도 계속된다. 끊임없는 교육과 변화, 그것은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일로 이어가는 새로운 원동력이 될 것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타고난 부지런함에 추진력도 남달라”

내가 본 대현 스님

신상열 정암사 신도회부회장=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안동 홍은사에서였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사찰에 들러 법당 참배를 하고 나오는데 한 비구니스님이 들어와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불렀다. 절에 많이 다녀봤지만 스님으로부터 그런 권유를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친절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스님과 첫 인사를 나눈 후 마침 직장에서 불자직원들 모임이 만들어졌다. 15명 정도였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법문을 해주실 수 있는지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때부터 매월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후에 정암사를 창건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벌써 십 수년간 옆에서 스님을 지켜봤다. 신도에 대한 자상함, 친절한 모습은 십여 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부지런한 성격에 추진력은 남자 못지않다. 다만 정암사 불사부터 강의, 사찰음식축제 등 너무 많은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건강이 걱정된다.

서울 한성포교원 주지 법농 스님=동국대 대학원을 함께 다녔다. 천성이 부지런해 항상 일을 찾아다니며 했다. 학구파라 할 만큼 공부도 열심히 했고 틈틈이 군법당 같은 곳을 찾아다니며 자원봉사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만나기만 하면 포교 이야기를 한다. 특히 어린이청소년 포교를 강조하는데 아이들이 줄어드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안고 있다. 그만큼 후학 양성에도 관심이 많고 교육에 있어서도 옛것을 중시하면서 새로운 교육 방식을 연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말로 고민하기보다는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결과를 내는 스타일이고 무엇을 제안하든 먼저 솔선수범한다. 그러니 믿고 일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그 덕분에 맡은 소임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고 대충 넘어 가는 법이 없다. 타고난 성격임이 분명하다.


[1364호 / 2016년 10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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