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8. 죽음과 정토

죽음·정토는 한 몸처럼 붙어 있어
임종할 때 연꽃에 앉아 왕생극락

죽음과 정토는 붙어있습니다. 한 몸입니다. 죽음이 없으면 정토도 없습니다. 정토는 죽어야 갑니다.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정토입니다. 이를 타방정토설(他方淨土說)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런 정토사상이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났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초기불교, 아니 붓다의 삶 자체에서 이미 그랬기 때문입니다.

죽음 없이 정토 있을 수 없어
정토사상은 사문유관서 결정
아미타불 자력 수행 있었기에
부처님 예배만 해도 왕생 가능

태자시절 고타마 붓다는 성(城)의 네 문을 나가본 일이 있습니다. 늙음과 병자, 그리고 죽음 앞에서 태자는 몸을 떨었습니다. 절망했습니다.

아, 이러한 인생이 전부란 말인가? 여기서 벗어나는 길이 없는가? 고통을 넘어서 즐거움을 가져다 줄 체험은 마지막 한 문을 통해서 만납니다. 붓다의 삶 속에서는 수행자(沙門)를 만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수행자는 해탈한 몸에 구현한 인물입니다.

붓다의 삶 속에서 늙음·질병·죽음 건너편에 있는 것이 해탈한 수행자라고 하였던 바로 그것, 그것이 정토불교에서는 정토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정토불교는 바로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사건 속에 결정돼 있었음을.

정토불교가 죽음을 건너서 존재한다고 했을 때, 삶과 죽음이 만나는 접점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임종(臨終)입니다. ‘관경’에서는 “임명종시(臨命終時)”라고 말합니다.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라는 뜻입니다. 정말 그때, 즉 우리가 숨이 넘어갈 때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임종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관경’은 임종행의(臨終行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품상생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살아생전에 계율을 잘 지키고 선을 행하면서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덕을 회향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임종을 맞이하게 될 때는 아미타불이 모든 비구와 여러 대중(眷屬)들과 더불어 맞이해 주러 오십니다. 이를 내영(來迎)이라 함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금색광명을 비추면서 임종하는 사람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서는 고, 공, 무상, 무아를 설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임종을 맞이하는 분의 왕생극락을 바란다면 울고불고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염불을 해주고, 법문을 들려주는 게 좋을 것입니다.

임종하는 사람, 즉 “수행자는 이렇게 (아미타불의 내영해 주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고, 스스로 자기 몸이 (극락세계의) 큰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시) 꿇어앉아서 합장하고 부처님께 예배하였는데, 머리를 다 들기도 전에 곧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었다.”

연꽃 위에 앉는 것이 급행길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연꽃 위에 앉는 것을 관찰할 수 있으며, 또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곧 왕생극락하게 됩니다. 법장보살이 48가지 원을 세우고서 그 원의 성취를 이루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5겁이라고 합니다. ‘무량수경’에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얼마나 긴 시간이었으며, 얼마나 가열 찬 고행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염불행자는 노래했습니다. “남들은 타력 타력이라 말하지만, 나는 아미타불의 자력이 고맙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미타불의 자력수행 덕분에 우리 중생들에게는 부처님께 예배만 해도 곧바로 왕생극락할 수 있는 돈교(頓敎)의 왕생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자력은 타력의 어머니입니다.

다시 “연잎이 열리고 연꽃이 피어났을 때 사성제(四聖諦)를 찬탄하는 많은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를 들음으로써) 곧바로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얻게 되었으며 팔해탈(八解脫)을 갖추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왕생하는 것을) 중품상생이라 이름한다.” 사성제를 비롯한 아라한 등은 모두 초기불교에서부터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그 초기불교 위에 정토불교가 건립되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64호 / 2016년 10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