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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사바의 모순

기자명 성원 스님

“이 나라에서 사람들의 힘겨움 누가 알까요?”

▲ 일러스트=강병호

10월의 마지막 밤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제법 쌀쌀해진 아침의 공기가 밤을 설친 지난밤의 무거움을 씻어주는 것 같습니다. 차가운 날씨를 너무 좋아합니다. 언젠가 주변사람들에게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강하게 느낀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신뢰란 것은 쌓기는 힘들어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에 불과
이어지는 국정문란행위 소식
온몸으로 ‘사바의 모순’ 느껴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 할 때 새벽에 일어나 관음전 뒤뜰에 있던 수각의 얼음을 탁탁 깨고 들이키는 차가운 아침 냉수는 열정의 젊은 날 하루를 살아가는 충분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습니다.

나이 드신 스님들은 냉이 들 수 있다고 찬물을 들이키지 말라 하셨지만 이른 새벽 한 바가지 찬물의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겨울 내내 물이 얼지 않는 이 제주에서는 아직도 더없이 그립기만 합니다.

올 1월, 서귀포에 온 이후 가장 차가운 영하 7도를 기록하는 한파가 이곳 국토 최남단에 몰아닥쳐서 많은 나무들이 냉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은사스님께서 약천사 초기 불사 때 심어 매년 풍성하게 수확해 많은 사람들께 보시했던 하귤은 단 한 개 맛볼 것도 없이 지난 겨울 이상 한파에 모두 낙과하고 말았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하귤을 좋아하시고, 전국 선원과 많은 인연처에 하귤 공양하기를 즐기셨던 은사스님께서는 하귤을 수확하는 6월 장마철에 약천사에서 사라져버린 하귤과 함께 마지막 온기를 거두셨던 것입니다. 우리 스님이 나서는 길을 하귤이 먼저 알아차린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요즘 매일매일 아니 매시간 온 국민들이 나랏일 걱정입니다. 이렇게 걱정할 바에는 뭐 하러 애써 대표를 뽑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 열 가지의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격언이 떠오릅니다. 그전부터 자주 자칭 통합 종교의 교주노릇을 했던 영세교 교주 최태민에 얽힌 일화들로 의구심을 자아내더니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을 보면 현생인류는 상상을 현실화 할 수 있는 특이한 두뇌를 가졌기 때문에 보다 큰 사회 조직을 형성 할 수 있었고 나아가 국가라는 체계를 만들 수 있었으며 결국에는 보이지도 볼 수도 없는 신의 존재를 실체화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영상 매체가 없던 시절 일생 한 번도 보지 못한 머나먼 구중궁궐에 머무는 국왕을 위해 충성하는 것은 인류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여타 종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랍니다. 이러한 인류의 순기능이 자칫하면 역기능을 발현시킬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보이는 실체보다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더 강한 믿음을 가지곤 하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직접 보고 듣는 현실의 당혹감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도피의 시간일 수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화된 사회와 조직화된 체제를 운영하면서까지 보이지 않는 대상을 실체화하여 의지한다는 것은 정말 여간 문제가 아닙니다.

언젠가 수사기관의 관계자와 대화하는 중에 종교인, 특히 기독교 성직자와 관련된 사기사건이 생각 이상으로 많아서 골머리를 앓을 때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반적인 사기사건은 증거를 찾아 접근하는데 종교를 빙자한 사기사건은 형이상학적인 추론으로 접근했고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다가 벌어지는 것이라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는 실체적 업무에 있어서 무속적 힘에 의지했다는 이야기가 자꾸 회자되니 더욱 허탈감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외교, 안보문제까지 비업무적 접근방식으로 처리 했다니 온 국민이 ‘멘붕’에 빠진 듯합니다.

신뢰를 쌓기는 힘들어도 무너지기는 한 순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한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아올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요.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는 말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듯합니다. 그래도 이전에는 믿기 어려운 판단과 과정에서도 믿으려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다렸던 국민들을 이제 어떻게 통제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SNS에서 ‘이 나라에 산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또다시 부끄러움을 딛고 일어나 미래로 나아가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힘겨움을 누가 이해 해 주겠습니까?

현 정부를 바라보면서 얼마 전 편지에서 ‘불자들이 스님들을 걱정한다’는 말의 의미가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부처님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고, 엉클어진 통치자들을 계몽하실까 지혜가 더욱 목말라지는 시간입니다. 매일 독송하는 경전을 잠시 미루고 오늘은 먼지 쌓인 경전을 찾아 목마른 갈증을 풀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한 자식을 위해 수백억을 낭비하면서 굶주린 북녘의 어린아이를 지원하는 일에 냉혹함을 보여 왔다는 것이 갑자기 오싹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들이 지원하는 쌀과 강냉이, 제주의 밀감으로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 이제는 독립운동 당시 김일성이 솔방울로 총알을 만들었다는 저네들 말처럼 허망하게 들리니 이 마음을 어찌 해야겠습니까?

정부에서 나서서 도우려 하지 않으면서, 도우려는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선행마저 왜곡시켜온 것이 확실하다는 막연한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어쩌면 굶주린 북한 어린이들의 원한이 서울 중심부까지 들려지게 된 것만 같습니다.

이번 국정문란행위의 실체가 밝혀져 아픔을 보상할 수 있는 길은 그동안 정부가 주장해온 일방적 논리를 내려놓고 더 발전된 길로 가는 갈림길이 되도록 하는 방법뿐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같은 조국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아서 이렇게 편지로나마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난번 단돈 3000원에 넘겨야 했던 옷가지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함께 아파해야 하는 온 나라를 다 삼킬듯한 이 아픈 현실도 언젠가는 단돈 3000원짜리 싸구려 이야기가 되어 모두들 싱겁게 웃으며 대화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바의 모순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아침
참괴사문 성원 드림

성원 스님 sw0808@yahoo.com
 

[1365호 / 2016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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