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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윤구병 농부철학자

자연에 비스듬히 기대니 마음 비고 생명평화 가득하더라

▲ 윤구병 농부철학자는 변산공동체에서, 보리출판사에서, 문턱 없는 밥집에서 상생의 길을 탁발하고 있다. 영그는 가을 열매처럼 그의 뜻도 익는다. 머리 위, 감이 붉다.

마치 거지 행색이다.

옷차림이 단출하다. 하양 머리카락이 아주 짧다. 인사도 합장으로 한다. 법명도 있다. 웃을 땐 잇몸 다 드러낸다. 세월호 참사 때 아픔도 함께했다. 닮았다.

아홉 형제 중에 막내라서 ‘구병’
한국전쟁으로 형 6명 잃어 아픔
국립대 교수직 버리고 변산 정착
손수 농사하며 상생 공동체 일궈

경허·만공 존경, 자작 법명 만허
‘경전 한글로 풀자’ 불한당 당원
도법 스님 등과 ‘법성게’ 공부해

기성세대로 젊은세대에 부채감
어린이에 건강한 감성 심는 노력
보리출판사 설립 아이 도서 보급
문턱 없는 밥집 등 상생 운동도

굳이 다른 점 말하자면 한 사람은 향냄새 나는 잿빛 승복 입었고, 다른 사람은 흙냄새 나는 몸 놀리기에 편한 차림이다. 출가했고, 출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 위에 하늘 이고, 발 아래 땅 딛고 섰다. 두 사람이 만났다.

거지 한 무리가 변산반도 한 촌락에 닿았다. 스님이 서른 남짓 무리를 이끌었다. 날 저물고 흙먼지 뒤집어 쓴 육신 피로하고 배는 고팠다. 촌장도 장정 한 무리 끌고 내려왔다. 촌장이 길바닥에 앉으니 스님도 앉았다.

“뭣 하는 분들이시오?” “세상 사람들이 생명을 보다 존귀하게 여기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염원하며 탁발순례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저녁 먹여 주고, 하룻밤 재워 달라? 그럼 삼배를 하시오.” “왜 삼배를 해야 하지요?” “스님, 법당에 들어가서 돌덩이나 쇳덩이한테 삼배하지요?” “…….” “내가 여기 주인이고 스님은 객입니다. 삼배하는 게 잘못입니까?”

도법 스님이 촌장에게 넙죽 삼배 올렸다. 그러자 윤구병(74) 농부철학자는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스님 모시고 더 극진하게 삼배로 화답했다. 그뿐이었다.

▲ ‘스님과 철학자’ / 도법 스님·윤구병 / 레디앙
2013년 가을,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변택주 작가 제안이었다. 윤구병과 도법 스님은 조계사에서 ‘불한당’ 당원이 됐다. 불교 경전을 쉬운 한글로 풀어보자는 모임이다. 의상 스님의 ‘법성게’를 공부했다. ‘법성게’는 화엄 사상 요체를 시 형태로 간결하게 축약한 글이다. 전체가 210자에 불과하다. 불한당원으로서 윤구병은 도법 스님, 학생들과 ‘불후의 명작’인 ‘법성게’를 풀었다. 논쟁이 팽팽했다. ‘법성게’ 첫 구절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풀이부터 부딪쳤다. 그러면 해학 넘치는 유쾌한 농담이 무거운 공기를 깼다. 우주와 나라는 존재와 실상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깨달음 신비화, 우리말 풀이와 의미, 현대물리학과 불교정신 관계, 기독교와 불교 세계관 차이 등 다양한 주제가 논의됐다. 차곡차곡 쌓인 통찰이 엮였다. ‘스님과 철학자’(레디앙, 2016)다.

두 사람 생각도 닮았다. 다른 입에서 같은 단어가 나온다. 상생, 생명평화. ‘법성게’ 공부하면서 더 확실해졌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로 존재합니다. 그 무엇도 홀로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실천하는 가르침이라고 봐야 합니다. 보살도 깨달음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죠.”(도법 스님)

“중도란 무엇일까요. 시소처럼 중간에 자리 잡고 앉으면 될까요. 기울어진 마당을 누구나 바로설 수 있게 만드는 게 중도라고 봐요. 기울면 높이 오른 곳에 가서 끌어내려 평평하게 해야 합니다. 있을 게 없는 세상에서는 있도록 애써야 하고, 없을 게 있는 세상에서는 그게 없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윤구병)

 윤구병과 도법 스님의 생각 줄기는 닮았다. 생명과 평화, 이 두 단어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둘 다 한 무리를 이끈다. ‘붓다로 살자’와 ‘변산공동체’다. 윤구병은 ‘철밥통’ 국립대 대학교수 15년 생활 버리고 농촌으로 발길 돌렸다. 입시 위주 교육 탓에 질문을 잃어버린 학생들에게 책임 돌리지 않았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게 됐다. 질문 없는 대답과 대답 없는 질문의 평행선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1995년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 농사를 시작했다. 이듬해에 생태주의 공동체를 꾸렸다. 그의 나이 50대였다. 조금 답이 보였다고나 할까. 도법 스님 표현으로는 생명평화 이루는 길이다. 성과나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사회에서 공허한 메아리일지 모른다. 그래도 윤구병 생각은 변함없다.

“빚지고 있어요. 조상으로부터 맑은 물과 공기, 깨끗한 땅을 물려받았잖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물려줄 수 없는 젊은 사람들 등에 올라타 살아남는 격이에요. 더럽혀진 물, 공기, 땅 물려받은 그네들은 88만원 세대, 7포 세대라고 불리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어요.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이 다른 생명과 평화롭게 더불어 살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외에 다른 생명 죽여야 살 길 찾을 수 있다는 비뚤어진 생각을 바꿔야 해요. 도법 스님 말씀처럼 생명평화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그런 삶의 길로 안내해야 합니다.”

윤구병은 “농사꾼 되라고 하신 아버지의 교육 효과가 40년 지나서 나타났다”며 웃지만, 여기엔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다. 그는 1943년 전남 함평에서 아홉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래서 ‘구병’이다.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성실한 농부였다. 자식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대로 교육열도 상당했다. 한국전쟁이 큰 상처를 남겼다. 집 팔고 논 팔아 서울로 이사했지만 아들 셋은 인민군에 끌려갔고, 셋은 국군에 징집됐다.

“가난하고 배고파 ‘허천병(가상허기증)’에 걸리기도 했어요. 형편상 학교는 꿈도 못 꿨어요. 아버지는 아들 잃은 상처에 남은 아들 셋은 평범한 농부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하셨던 것 같아요. 전쟁 통에 아들 여섯 잃은 슬픔을 새벽마다 경전을 염송하며 달래셨지요.”

훗날 서울대 철학과에서 공부하며 불교에 흠뻑 빠진 게 우연일까. 숙연이리라. 경허, 만공 스님을 존경한다. 한때 두 스님의 법명 앞 글자만 따서 스스로 ‘만허(滿虛)’라는 법명을 만들었다. 우리말로 ‘가득 비어’란다. 필명으로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 불교는 원효(元曉) 스님에게서 새벽[曉]을 맞았고, 두루 비춘다는 뜻의 보조(普照) 스님 때 한나절 맞았습니다. 서산(西山)대사에 이르러 날이 기울었는데, 만공월면(滿空月面) 스님에 이르러 달이 떠오른 거죠.”

윤구병은 민머리다. 모자 벗고 합장 인사하면 절집 사람이라는 오해도 받는다고 했다. “상관 없다”며 또 웃는다. 노란리본 단 검은 잠바를 외출할 때 즐겨 입는다. 그는 3년상을 치르고 있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에 정답은 하나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교육 현장에서 그렇게 배워요. 만약 단원고 학생들이 교육 받지 않았다면 본능 따라 살려고 뛰쳐 나왔을 거예요. 교육 현장에 있었던 제게도 죄가 일부 있다고 생각해요. 팽목항 가서 두 번 밀었고, 달마다 16일이면 깎습니다. 내년 4월16일이면 3년이네요.”

그래서 건강한 감수성과 바른 통찰력, 자연 사랑과 생명 사랑 교육에 애쓴다. 변산공동체에서 보리출판사 그리고 문턱 없는 밥집으로 이어지는 정신이 생명평화다. 11월중 나올 ‘윤구병 일기 1996’(천년의상상, 2016)에서 익어가는 그의 사유가 드러날 예정이다. 특히 보리출판사는 어린이 교육 위해 살다간 고 이오덕 선생, 고 권정생 아동문학가, 출판인 고 한창기 선생 영향이 컸다. 보리출판사의 ‘보리’에는 겨울 이겨내고 먹을 것 주는 곡식과 깨우침,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 3가지가 담겼다.

“목으로 들이 쉬고 내쉬는 숨을 합해서 목숨이라고 해요. 나무와 우리는 목숨을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우리가 내쉬는 이산화탄소로 나무 자라고, 나무가 내쉬는 산소로 우리는 손발 놀리잖아요. 나무 베서 책 만드는데 한 그루 벨 때 적어도 열 그루 스무 그루 이상을 다시 심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책을 낸다는 생각으로 보리출판사를 운영합니다. 문턱 없는 밥집도 마찬가지에요. 자연서 유기농으로 농사 지으면 농산물은 모두 제각각 크기로 나지요. 우리는 손질한 크기가 크고 같은 것만 가려 먹지요. 그러면 농부들은 자잘한 것들을 다 못 먹고 버립니다. 우리가 조금 손품 들여 도시에서 가장 건강 해치기 쉬운 허드렛일 하는 분들에게 제공하는 밥집이 문턱 없는 밥집이에요.”

천상천하유아독존에서 ‘존’자를 높고 우러른다는 ‘존(尊)’ 말고, 존재한다는 ‘존(存)’으로 해석하는 윤구병식 사유다. 온 누리 둘러봐도 나 아닌 것 없으니 서로 돕고 사는 삶이 나와 모두를 위한 삶 그 자체인 셈이다.

닮았다. 가을하늘 깊어간다. 윤구병의 뜻도 열매처럼 익는다. 그의 머리 위, 감이 붉다. 설익었더라도 작은 어둠 하나 밝힐 빛 가득하리라. 만허(滿虛)다. ‘가득 비어’ 아닌 ‘비우니 가득’이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우니 물고기가 아니 물어[夜靜水寒魚不食]/ 빈 배에 밝은 달만 가득 싣고 돌아오네[萬船空載月明歸].”(야부도천 스님)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윤구병 추천도서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 저자 프랑수아 자콥/ 궁리
“생명체가 어떻게 태어났느냐,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불평등은 있을 수 없지요.” 윤구병은 최근 모든 존재의 평등을 가르치는 이 책을 탐독 중이다. 파리, 생쥐를 통해 유전과 진화 비밀을 재미있게 설명한 노벨상 수상학자의 글이다. 윤구병은 “인간도 마찬가지고 여러 생명체들은 저마다 다 다르다”며 “그럼에도 불평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이 사회에 가르친다”고 평했다. 

 

 
‘짐승의 시간’/ 글·그림 박건웅/ 보리
고 김근태 전 국회의원이 남영동에서 보낸 고문의 22일을 기록한 만화다. 뚝심 있는 작가 박건웅이 550쪽 넘는 글과 그림으로 생생하게 담았다. 만화를 좋아한다는 윤구병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 주목했다. 그는 “고문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짐승으로 바꾸는 시간이 고문”이라며 “이런 세상이 지속되거나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주는 책”이라며 추천했다.

 

 
‘봐라, 꽃이다!’/ 저자 김영옥/ 호미
윤구병은 “조각하듯이 정성들여 썼다”고 했다. 저자가 월간 ‘해인’에 1995년부터 5년 남짓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다. 당시 조계종 법랍 30~40여년 된 중진스님 30명에 대한 인터뷰다. 참선수행의 길을 오롯이 지키고 있거나 경전 연구와 역경에 매진하거나 저자거리 아픔을 함께하는 스님 등 삶과 세상사가 담겼다. 윤구병은 “수행자 마음가짐을 잘 드러냈다. 오래된 책이지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숨결’/ 저자 변택주/ 큰나무
“법정 스님과 인연 맺은 분들의 슬기로운 이야기가 많다.” 윤구병이 “깨끗한 우리말로 쓰인 글”이라며 마지막으로 추천한 책은 ‘법정 스님 숨결’이다. 그와 인연 깊은 변택주 작가가 법정 스님과 10년 인연의 갖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여 풀어놨다. 겉모습과 다르게 여리고 푸근한 법정 스님의 인간다운 면모를 만날 수 있다.

 

 

[1365호 / 2016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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