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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백암산 백양사-영천굴-운문암

약수천, 선지식 잉태한 백암산 가을을 담다

▲ 백양사 쌍계루 약수천에 백암산 가을 정취가 담겼다.

10월 단풍을 놓친 나그네들이 11월의 단풍이라도 붙잡으려 찾는 산사가 있다. 가을 단풍을 가장 늦게 보낸다는 전남 장흥의 백암산 백양사. 11월10일 전후면 절 진입로로 향하는 사하촌 삼거리부터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3.5km의 길은 붉게 물든다. 애기손바닥만한 단풍잎 색깔이 고와 여기 사람들은 ‘백양사 단풍’을 일러 ‘백양사 애기단풍’이라 한다. 그렇다고 단풍잎이 여느 산사의 단풍잎보다 작은 건 결코 아니다. 나무가 다소 작아 붙여진 이름이다.

흰 양이 윤회 메시지 전한 후
백암사서 백양사로 사명 변경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 면한
운문암엔 옛 선사 선기 가득

약수천을 따라 쌍계루를 향해 걷다 보면 오른쪽 비탈진 언덕에 서 있는 작은 문을 만난다. 합장배례 한 후 문을 열어 보시라. 묵담, 영월, 금해, 화담, 양악 스님 등 백양사에 주석했던 역대 고승 18인의 사리와 유골을 안치한 승탑과 비석이 ‘말없는 법문’을 전하고 있다. 다소 아쉬운 건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벽송지엄의 승탑을 누군가 몰래 빼내가 선사의 선기를 느낄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또 하나! 보물 1346호로 지정된 소요태능의 승탑 또한 여기서 볼 수 없다. 백양사박물관 앞마당에 서 있기 때문이다.

단풍은 쌍계루를 건너 대웅전과 극락전 처마에도 내려앉았다. 화분에 담긴 채 도량 곳곳에 자리한 국화도 짙은 향을 피워내니 산사의 가을 정취는 더욱 더 깊어만 간다. 이 멋진 풍경 사람만 감상하겠는가! 바늘귀를 꿰고 있는 나한이나 등을 긁고 있는 나한도 잠시나마 하던 일 멈추고는 이 풍광에 젖어 있다. 백암산 백학봉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 산 기슭에 절 이름 백양사와 연관된 영천굴이 있다.

▲ 백양사 40년 중창불사를 주도했던 만암 스님 부도.

백암산(741m)은 내장산 국립공원 남부지구에 속한다. 조선 팔경의 하나로도 꼽혔던 이 산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한데, 거대한 바위들이 하얗게 드러내고 있는 백학봉의 웅대함은 압권이다. 저 하얀 암석을 본 여환 스님은 산 이름을 ‘하얀 바위 산’의 백암산(白岩山)이라 했고 절 이름도 산 이름을 따 백암사(白岩寺. 백제 무왕 33. 632)라 했다. 고려로 접어들며 극락의 땅을 꿈꾸는 정토사(淨土寺)라고 바뀌었고, 조선으로 넘어온 후엔 백양사(白羊寺)로 불렸다, 그런데 왜 하필 ‘하얀 양’이라는 사명을 쓴 것일까?

숙종이 조선의 백성들을 다스릴 당시 환양선사는 저 산 기슭에 자리한 영천암(영천굴)에서 법을 설했다. 감로법문이 끝나자 백양이 홀연히 나타나서는 환양 선사에게 눈물을 흘리며 절을 올렸다. 그 연유 물으니 백양이 답한다.

▲ 백양사 부도전에는 묵담, 영월, 금해 등 백양사에 주석했던 역대 고승 18인의 사리와 유골을 안치한 승탑과 비석이 있다.

“저는 원래 신(神)이었으나 하늘나라에서 죄를 지어 백양으로 태어났습니다. 영천굴 승려에게 법문을 들은 후 감동하면 인간의 모습으로 환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에야 법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백양은 이 한마디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주변을 살펴 본 환양 스님은 영천암 앞 마당에 죽어 있는 하얀 양을 발견했다. 이에 환양 선사는 사명을 백양사로 바꿨다. 그 백양, 분명 사람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업력에 따른 윤회 메시지를 전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설화도 사명(寺名)과 관계된 6개 버전 중 하나일 뿐이다. 구비문학대계와 불교문화연구 등의 문헌을 검토한 김진영 선생은 등장인물과 양의 수에 따라 백양사 유래 버전을 6가지로 분류했다. 환양 선사 자리에 환성 선사가 들어가기도 하고, 법문 대신 ‘경 읽는 소리’로 대치되기도 하며, 한 마리였던 백양이 세 마리, 일곱 마리로 늘어나기도 한다. 구전으로 전해지다 보니 어떤 시점에 이르러서 각색된데 따른 것이리라. 그러나 백양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감동한 후 사람으로 환생했다는 기본 구조는 같다. 굳이 환양 선사의 이야기를 택한 이유는 ‘양을 부르는’ 뜻을 가진 환양(喚羊) 선사가 설파 상언의 법손으로서 실존 인물이기 때문이다.

▲ 백학봉 약사암 부근서 바라본 백양사.

약사암은 백학봉의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 크진 않지만 200여명이 설법을 들을만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백양계곡을 품은 백양골과 붉게 물든 백양사를 한꺼번에 안고 있었다. 계단을 좀 더 오르니 절벽에 간신히 걸터앉은 영천굴이 나타났다.

20평 남짓의 천연석굴인 영천굴도 쌀과 연관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옛날 한 스님이 상좌와 함께 영천굴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굴은 바위틈으로 하루에 딱 두 사람 분량의 쌀을 내보냈다. 어느 날 객승이 찾아왔다. 식구 한 명 더해졌으니 한 사람의 식량이 부족했다. 상좌는 더 많은 쌀을 얻으려 작대기로 바위틈새를 후볐다. 그러자 바위는 쌀 대신 피를 토해냈고, 그 언제인가부터 바위는 피 대신 물을 내 보냈다. 이 물이 병 고치는 데 영험하다는 입소문이 퍼져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진묵, 한영, 만암, 서옹 스님 등 내로라하는 선지식이 주석했던 운문암 염화실.

백학봉에 올라 보니 동남쪽의 담양호와 서남쪽의 장성호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반월리와 농암리 들녘은 추수가 끝나 텅 비어 있다. 그렇다. 저리 비워 놓아야 새로운 곡식을 담을 수 있다. 산바람 청량해 더 앉아 있고 싶지만 일어섰다. 상왕봉 아래에 자리한 운문암(雲門庵)을 참배해야 하지 않겠나.

조선의 벽송, 정관, 백파 스님과 근대의 학명, 용성, 석전, 고암, 서옹 스님이 주석했던 운문암은 선기가 가득한 도량이다. ‘운문암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를 면한다’는 말이 선승 사이서 회자될 정도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 피폐한 상황에 직면해 있던 백양사를 중창해 낸 만암 스님이 아니었다면 백양사도, 운문암도 그 명맥을 이어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 약사암은 영천굴 바로 아래에 있다.

네 살 때 부친을 잃은 만암은 10살이 되던 1886년 취운 도진 스님을 은사로 백양사로 출가한다.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운문암에 주석하고 있던 대강백 한영, 경운 스님으로부터 사사를 받고 환응 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이어 받았다. 1898년부터 강단에 오른 만암은 1907년 해인사로부터 강사 초청을 받으며 일약 ‘전국구 강백’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1906년 이회광이 친일종단 원종(圓宗)을 창립한 후 1908년 종정직에 오르자  만암은 한영, 용운 스님과 함께 임제종 창종을 주도하며 일본에 맞서기도 했다.

1916년 주지를 맡은 만암은 백양사 중창불사에 매진한다. 주지 취임 당시만 해도 서너 개의 건물만 있었던 백양사는 1929년 150여 칸 이상 규모의 대가람으로 변모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25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됐다. 만암은 2차 중창불사를 일으키며 천왕문과 대웅전, 조사전, 극락전 등을 복구해 다시금 대가람으로 우뚝 세웠다. 따지고 보면 40년에 걸친 대작불사였다.

여기서 눈여겨 볼 건 만암의 불사 방식이다. 시주를 받으면서도 사중들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철칙을 세웠다. 사찰 주변에 대나무 밭을 일궈 땅에서 자란 대나무로 죽제품을 제작해 시장에 내놓았고, 양봉을 쳐 얻어 낸 꿀도 내다 팔았다. 짚신 한 짝이라도 만들어지면 곧장 시장으로 달려갔다. 외형불사뿐만 아니라 내적 불사에도 만전을 기했던 만암이었다. 절에서 제정한 청규는 그 누구라도 지켜야만 했다. 사미든 비구든 그 누구라도 법의를 입지 않고는 조석공양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 환양 스님의 설법에 감동한 양이 사람으로 환생했다는 설화가 담긴 영천굴.

사부대중의 원력이 집결된 백양사! 만암의 생애를 연구한 김상영 선생은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백양사가 불교지식인들로부터 조선 전체에서 가장 모범적인 도량이라는 칭송을 듣게 되는데 이러한 사격은 만암의 특별한 노력에 의해 갖춰지게 된 것’이라고 논문을 통해 평한 바 있다. ‘남유구도예찬(南遊求道禮讚)’을 쓴 김소하의 소감이 이를 뒷받침 한다.

“백양사는 승속간에 누가 와서 보든 환희심이 날만한 삼보주지(三寶住持)의 대가람이며 선지식이 있을만한 대도량이다.” 

운문암 염화실 앞으로 사자봉을 품은 산줄기와 백학봉을 안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힘차게 뻗어 있다. 저 곳 어딘가에 광주와 나주를 관통하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을 터. 그 물결에 시름 하나 흘려보낼 수 있다면 이 산에 들어 선 보람은 충분하다. 쌍계루에 걸린 포은 정몽주의 시가 스쳐간다. 

‘…안개빛 어슴프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사의 번뇌에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볼까’

쌍계루 처마에 걸린 단풍은 이제 며칠 후면 일주문으로 줄달음쳐 갈 것이다. 아직 단풍을 못 본 나그네가 있다면 백양사로 걸음 하시라! 도량이 전하는 선미(禪味)는 덤이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참고자료 : 김상영 논문 ‘만암 종헌의 생애와 활동’ 김진영 논문 ‘백양사 설화의 문학적 양상과 그 의미’

 

 

길라잡이

들머리는 백암산 관리사무소. 쌍계루까지의 1.5km 구간은 평지여서 산책하기에도 좋다. 쌍계루를 건너면서 오른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상왕봉에 오를 수 있다. 운문암과 약사암으로 나누어지는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먼저 들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약사암을 거쳐 백학봉까지 이어지는 계단은 어림잡아도 400개는 족히 넘을 법하다. 백학봉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500m 거리에 운문암으로 횡단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상왕봉을 넘었다면 몽계폭포, 사자봉, 운문암(백양사), 상왕봉으로 갈리는 ‘능선 사거리’에서 운문암 방향으로 하산해야 한다. 운문암부터 쌍계루까지의 내리막 길은 포장돼 있다. 백양사를 기점으로 원점 회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5시간. 계단 오르는 게 버거우면 운문암을 먼저 참배한 후 백학봉과 영천굴로 이어지는 코스를 택해야 한다.


이것만은 꼭!

 
백양사 대웅전: 1917년 만암 스님이 백양사를 중건할 때 건립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979년 보각행(普覺行)이 조성하여 새로 모신 10척 높이의 불상, 그 왼편에 용두관음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43호다. 대웅전 옆에 자리한 극락보전은 400년 전에 지은 전각으로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백양사 사천왕문: 1917년 세워졌다. 오른쪽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왼쪽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봉안되어 있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44호다.

 

 

 

 
팔층탑: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 이 탑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 3과를 안치했다고 한다. 대웅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기에 참배를 못하고 가는 불자들이 꽤 많다.

 

 

 

 


[1366호 / 2016년 1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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