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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종교는 섣부른 위로를 주지 않는다

기자명 이미령

“‘스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무색합니다”

스님,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건네기는 했지만 이런 인사가 무색한 요즘입니다. 저는 지난 1, 2주 동안 책 한 권도 읽지 못했고 글도 쓰지 못했습니다. 패닉상태라고나 해야 할까요? 청와대와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능과 부패와 부조리 때문입니다. 대선 전에 벌어진 TV토론을 보면서 준비된 대통령 후보가 아닌 줄은 알아차렸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청와대와 정치판의 부패 보며
‘박대통령 이 정도였나’ 패닉
사이비 종교에 휘둘린 대통령
희생양 아닌 어리석은 장본인

더구나 이번에 벌어진 최순실 게이트(정확하게는 박근혜 게이트라 해야겠지요)는 정치적인 문제라고만 할 수가 없습니다. 최태민 목사가 애초 박근혜 대통령에게 접근할 때 종교라는 허울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비통하게 떠나보낸 딸의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불안한 그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현몽이니 접신이니 하는 사이비 종교인의 행태였습니다.

스님, 너무나도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이 부처님을 만났다면 부처님은 어떤 말씀을 건네실까요? 최태민 목사처럼 ‘고인께서 내게 그대를 잘 보살펴주라고 했다’고 하실까요? 

저는 이런 일을 접할 때마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키사 고타미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어머니인 키사 고타미는 깜짝 놀라지요. 아마 아이를 막 흔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잠시 기절을 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요. 주변 사람들이 아이가 죽었다고 일러주지만 키사 고타미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 어떻게 이 사랑스런 내 아이를 죽었다고 말을 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내 아이가 나를 두고 떠나갈 리가 없다.”

이미 품에서는 죽어버린 자식에게 서서히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데 어머니는 그걸 눈으로 보면서도 내 자식이 죽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지요.

결국 냄새나는 어린 시신을 안고 키사 고타미는 부처님을 찾고, 부처님은 아시다시피 이런 제안을 내놓으십니다.

“그 아이를 내려놓고 어서 마을로 가서 일곱 집에 들러 겨자씨를 구해오시오. 그것으로 이 아이를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을 것이오. 단, 한 사람도 죽은 적이 없는 집이어야 합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겨자씨를 받고서 “혹시 당신네 집안에서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만 했고, 키사 고타미는 “당연하지요. 죽은 사람이 없는 집도 있습니까?”라는 반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는 키사 고타미를 오히려 이상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스님,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이렇게 편지에 늘어놓는다는 것이 좀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이야기를 종종 떠올립니다.

첫째는, ‘살아있는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라는 이치를 우리 스스로 절감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생겨난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지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죽음이라는 현상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이고, 나와 나의 가족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습니다.

온 동네를 헤매면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불사와 영생의 약을 구하던 어미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들려줍니다.

둘째는, 그 당연한 이치를 당사자에게 인식시켜주는 부처님의 방식이 참으로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그 빤한 사실은 말로 일깨워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처님은 자식 잃은 어미를 향해 “사람은 다 죽게 마련인데 왜 그걸 모르는가?”라며 매정하게 일러주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그녀의 심정을 함께 공감하면서도 그녀 스스로가 이 일에서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자신의 말로 설득하기보다는 그녀 스스로가 그 이치를 체득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과연 키사 고타미는 천천히 알아차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죽은 자식의 장례를 치른 뒤에 수행자의 길로 들어섭니다.

스님, 저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늘 종교의 역할을 생각합니다. 종교는, 깊은 상실감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그 분은 죽지 않았다”라거나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난다”라는 위안을 주기보다는,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그 누구도 예외가 없는 이 덧없음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덧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돕는 것이 그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20대의 박대통령이 이런 이치를 깨달았다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이비교주가 비탄과 상실감에 빠진 이에게 다가가 그의 몸과 마음을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이는 사이비 종교의 망령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종교의 역할은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그 당사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로 보도록 안내하는 것일진대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이비’라고 하지요. 비슷해 보이지만 결국은 아닌 것입니다. 사이비의 탈을 쓴 종교는 세상에 넘치고도 넘쳐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에 신물이 난다’는 탄식과 함께, ‘종교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지독한 힐난까지도 쏟아내고 있습니다. 종교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그 비난 앞에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사이비 종교에 휘둘린 사람도 남 탓을 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그 자신의 어리석음이 불러들인 파국 앞에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사이비종교에 휘둘린 그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박대통령은 희생양이 아니라 ‘어리석은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스님, 이 파란이 언제나 가라앉을까요? 어쩌면 이제 본격적인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분히 지켜보면서 이 기회에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소들을 털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사바세계는 인내심을 요하는 곳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이만 맺습니다.

이미령 드림

이미령 북칼럼니스트 cittalmr@naver.com
 


[1366호 / 2016년 1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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